尹, 잘해서 이긴 게 아니라 잘못해서 질 뻔했다 [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입력 2022.03.18 03:00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3월 8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광장에서 마지막 집중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뉴시스
# 1987년 민주화 이후 여덟 번째 대선이 국민의힘 윤석열 승리로 끝났다. 이 기간 대통령 8명이 모두 다른 당명으로 당선된 것이 한국 민주주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인지, 부실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쿠데타와 혁명을 동시 폐기하고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기로 한 ‘1987 체제’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꾸준히 앞으로 나가고 있다. 5년 전 탄핵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무효 표보다 적은 표 차 낙선자의 승복으로 또 한발 전진했다.
# 윤석열 당선인은 ‘심리적 내전’ 상태를 의식한 듯 국민 통합을 여러 번 강조했다. 당선 첫 일정으로 국립현충원을 방문했는데 문재인 대통령,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통화하느라 지체되지 않았다면 전직 대통령 묘를 참배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또 참배 순서가 기사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노무현 대통령도 국립현충원에 모셨으면 한다.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유족과 지지자들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국민 통합을 위해 그게 좋다. 대통령의 애국은 시효가 없다.
# 5년 만의 정권 교체다. 무능·오만·위선·내로남불·분열로 일관한 5년이었다. 정권 교체 ‘10년 주기’를 깬 부끄러운 첫 기록이다. 축구로 치면 전반 45분 끝난 하프타임에 전격 교체해 버린 격이다. 치욕적 교체다. 민주당의 대선 평가는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에서 시작하면 안 된다. 0.73%는 윤석열과 국민의힘 반성의 출발점이지 민주당 위로의 출발점이 아니다.
# 0.73%. 질 뻔했다. 윤석열 캠페인 전략은 시종일관 위험했다. 경선도 홍준표에게 질 뻔했다. 본선도 캠페인을 잘해서 정권 교체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잘못해서 정권 교체에 실패할 뻔했다. 승리의 일등 공신, 이등 공신, 삼등 공신 모두 국민의힘 밖에서 찾아야 한다.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윤석열 검찰총장과 최재형 감사원장이 국민의힘 소속으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된 초현실적 상황이 문재인 정권 실패를 상징한다. 이등 공신, 삼등 공신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다. 수많은 사람을 열거할 수 있다. 시민의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킨 ‘어용 지식인’들의 역사적 죄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1987년 이래로 민주 진영에서 숱하게 변용한 ‘비판적 지지’는 사실 ‘맹목적 지지’를 위한 마취제였다.
# 민주당의 전략적 오류는 세 가지 ‘거대한 착각’ 때문이다. ①문재인 대통령은 레임덕이 없다. ②우리에겐 40%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 ③중도는 ‘적폐 청산’ 전선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과거 대통령 대부분의 지지율은 임기 말에 10~20%대로 낮아졌다. 한 자리까지 떨어진 대통령도 있었다. 대통령만 그런 게 아니다. 이회창·노무현 두 사람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직후 10%대로 떨어지기도 했다. 유권자들이 지지한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라 하더라도 말과 행동이 기대에 어긋나면 지지 철회로 경고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상식이 사실상 사라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명·윤석열의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극단적 진영 싸움 때문이다. 아무리 금지된 반칙을 해도 우리 편이면 “어쩔”로 버틴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45%는 국민을 분열시킨 부끄러운 결과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총괄선대위원장, 송영길 상임선대위원장, 추미애 명예선대위원장 등 지도부가 20대 대통령 선거일인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 마련된 개표 상황실에서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선거는 정체성 전쟁이다. 누구든 지역·이념·세대·성 정체성에 따라 투표한다. 좋아해서 찍든, 필요해서 찍든, 상대가 싫어서 찍든 정체성은 가장 강력한 투표 동력이다. 어느 정당이든 자신의 정체성만으로 승리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그것만으로 승리가 불확실한데도 정체성 강한 지지층만 결집하는 전략은 패배를 자초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전략적으로 실패했다. 선거 전략을 단순화하면 네 가지다. ①나에 대한 지지 강화 ②나에 대한 반대 약화 ③상대에 대한 반대 강화 ④상대에 대한 지지 약화. 이재명과 민주당은 4·7 재보선 참패 이후 ②번, 즉 등 돌린 중도와 2030 세대의 민주당 반대를 약화하는 데 전략을 집중해야 했는데 끝까지 ①번과 ③에만 집착했다. 그게 패착이다. 반대로 윤석열과 국민의힘은 ①번, 즉 중도를 향해 더 좋은 비전과 더 나은 리더십을 증명하는 데 집중해야 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③번, 즉 정권 교체만 외쳤다. 위험한 전략이었다.
# 취임 후 윤석열 대통령이 강한 보수 정체성에 기반한 전략, 대선 경선·본선과 같은 전략으로 국정을 운영하면 바로 지지를 잃고 레임덕에 빠질 것이다. 이제는 보수의 전략적 자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전략적 자산’이라는 초당파적 지도자로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 3당 합당으로 ‘통치 연합’을 확대한 노태우 대통령과, 정체성을 뛰어넘는 ‘DJP 연합’으로 국정을 운영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배워야 한다.
# 민주당은 ‘친문 정체성’에서 빠져나오는 데 오래 걸릴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총선,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총선,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총선,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총선에서 공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 번뿐이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과 2016년 공천에 강하게 개입했다. 결국 ‘친박’당으로 변한 당은 2020년 황교안 체제로 총선 참패할 때까지 후유증이 오래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 2016, 2020년 총선까지 세 번 공천했으니 민주당이 ‘친문’당을 벗어나는 데는 시간이 훨씬 걸릴 것이다. 이재명이 대통령이 됐다면 문재인당을 이재명당으로 바꿀 수 있었겠지만 낙선했으니 대주주 변경은 쉽지 않을 것이다.
# 캐스팅 보터로 부상한 ‘2030 세대’는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중국·북한에 비판적인 이 세대는 민주당의 외교·안보 정책 기조도 흔들 것이다. 노동·복지·부동산·여성 정책에도 강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요즘 중2 아들과 40대 엄마의 ‘페미’ 갈등이 가장 풀기 어려운 난제라는 우스개가 있다. 5년 뒤에는 그 중2가 유권자가 된다. 젠더 갈등은 이번 대선이 보수·진보 모두에 남긴 가장 어려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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