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양화가 악화를 구축해야 할 대선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16 00:30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은 사실 ‘코페르니쿠스의 법칙’이 됐어야 했다. 지동설로 더 유명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화폐론』(1517년)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질과 저질 주화가 함께 유통되면 세공업자들이 양질의 주화를 골라내 은을 녹여낸 뒤 무지한 대중들에게 팔 것이다. (…) 열등 주화가 양질 주화를 몰아내기 위해 도입된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재정고문이었던 토머스 그레셤이 비슷한 말을 한 것은 40여 년 뒤다.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경고한다.
“주화의 저질화가 영국 주화의 교환비율을 떨어뜨릴 것이며, 좋은 금화들이 영국에서 유출되고 있다.”
수치 아는 선인 이익 좇는 악인
악인에 밀리는 선인들의 운명 악화도 퇴출되지만 막대한 피해 국가 지키려면 양화 잘 골라야 |
누가 주인이든 간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이 법칙이 인간 세상 최고의 보편적 공리(公理)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사회와 정치·문화 등 인간사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 양화(선인)는 늘 악화(악인)에게 구축될 운명을 안고 태어난다.
이 슬픈 운명이 현실이 되고 마는 이유는 간단하다. 선인(善人)은 먼저 부끄러움을 알고, 악인(惡人)은 앞서 이로움을 좇는 까닭이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이른바 ‘대장동 게이트’가 단적인 예다. 게이트의 주역들이 회사 이름으로 삼은 ‘화천대유(火天大有)’와 ‘천화동인(天火同人)’이란 주역의 궤를 보는 눈이 서로 다르다.
선데이 칼럼 10/16
화천대유란 본래 ‘하늘의 도움으로 대풍(大豊)을 얻는다’는 뜻이며, 천화동인은 ‘여러 사람이 뜻을 모아 막힌 것을 통하게 한다’는 의미다. 각각 14번째, 13번째 괘인데 주역에서 가장 좋은 궤들로 통한다.
누군들 이런 점괘가 나오면 안 좋을 리 있겠나 마는, 선한 사람들은 즐거워하며 그 괘를 이루도록 더욱 노력할 따름이다. 하지만 악한 사람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에게 대유란 천하를 사고도 남을 만큼의 막대한 ‘부’이며, 동인이란 그러한 부의 창출을 가능케 하는 ‘권력 네트워크’다. 더욱이 그런 괘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괘를 만들어 세상을 속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끌어내는데 불법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주역의 가장 좋은 궤가 범죄로 전락한다.
여기에 부패가 섞여 들어간다. 악인들의 범죄에 권력자와 정치인들이 동원되는 것이다. 그 분야에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이익을 좇아 ‘배임’을 할 준비가 돼 있는 악화들이 늘 대기하고 있다. 창피하지만 언론도 마찬가지다.
대법원 이발소를 애용하는 기자 출신 화천대유 대주주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선거법 위반 판결을 전후해 8번이나 머리를 자르러 갔다. 그때마다 만났을 대법관은 무죄 의견을 거듭 냈고 결국 무죄 판결을 끌어낸 뒤 퇴임 후 화천대유의 고문 자리를 얻었다. 또 국정농단 의혹사건 특검을 지낸 대검중수부장 출신 변호사, 대통령 민정수석까지 지낸 역시 검찰 출신 야당 의원이 딸과 아들을 통해 천화대유로부터 막대한 특혜를 받았다.
단언할 순 없지만 그들이 그런 자리까지 오를 수 있던 것은, 평소 자신이 속한 조직의 미래(국가의 미래는 기대하지도 않고)보다는 자신의 다음 자리만을 추구해온 악화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사이 묵묵히 자기 일만 해온, 그래서 조직을 지킨 (나아가 국가까지 지킨) 양화들은 정당한 자신들의 몫까지 빼앗겼을 공산이 크다. 아, 가엾은 양화들의 운명이여!
구축된 양화들을 위로하자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더 크고 중요한, 국가와 국민의 명운을 좌우할 역사적 맥락에서 또 한 번 양화가 악화에 구축될 위험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천화동인과 화천대유 두 괘를 이어 읽으면 ‘어렵고 막힌 세상에서 군자들이 협력해 백성을 구하고 임금은 하늘의 뜻을 따라 밝은 정치를 펼친다’는 해석이 나온다. 주역은 화천대유에 이렇게 덧붙인다.
“군자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드러내며 순리에 따르고 삶을 즐긴다.(君子以遏惡揚善順天休命)”
화천대유 세 번째 효에는 ‘소인불극(小人不克)’이라는 구절이 있다. 아무리 괘가 좋아도 소인들은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 천화동인 두 번째 효에 ‘동인우종린(同人于宗吝)’이라는 구절도 있다. 이익을 좇아 끼리끼리 뭉쳐서는 또한 얻을 게 없다는 얘기다. 양화들은 새삼 강조할 것도 없는 당연한 말인데, 악화들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주역의 결론이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만, 그렇다고 악화가 영원하지는 않다. 대장동 악화들의 운명처럼 결국 응징과 함께 퇴출되고 만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도 많은 상처를 남긴 뒤다.
우리는 지금 대선이라는 중요한 결정을 코앞에 두고 있다. 여기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지금까지 그랬듯, 그 악화 역시 퇴출되겠지만 그때는 국민과 국가에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에 너무도 많은 해악을 끼친 다음이 될 것이다.
폴란드 국왕에게 저질 주화를 발행해 이득을 취하라고 건의하는 학자들에게 맞서 코페르니쿠스는 “화폐는 왕의 법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법을 따른다”고 말했다. 대선 역시 자신의 법을 따라 움직인다. 악화를 잘 구별해 양화를 골라야 할 이유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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