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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칼럼]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鶴山 徐 仁 2021. 8. 27. 13:14

[윤평중 칼럼]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민주주의의 처음이자 끝인 언론 자유 질식시킬 악법
앞장서거나 방조하면서 민주주의자일 순 없다
자유 언론 두려워하는 그가 바로 파시스트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입력 2021.08.27 00:00

 

 

민주주의 규범과 제도가 무너지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입법 독재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정점엔 문 정권이 강행하고 있는 언론중재법이 있다. 국내외에서 두루 반(反)민주적 악법으로 규탄받는 언론중재법이 통과된다면 언론의 권력 비판 기능은 사라지고 민주주의는 위태로워진다. 절대 권력이 전횡하는 파시즘의 지옥문이 열릴 게 분명한데도 여론은 분열돼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골자로 한 언론중재법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처리된 25일 청와대를 배경으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외벽에 언론중재법 개정에 반대한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다. /뉴시스

 

 

문 정권이 위헌적 독소 조항으로 가득한 언론중재법을 강행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살아있는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는 권력을 잃고 정치적 청산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두 전임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데다 전임 정권보다 심각한 국정 농단과 권력 부패를 저지른 문 정권으로선 장기 집권만이 살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 안전장치 마련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는 배경이다. 검찰을 무력화시켜 청와대에 대한 수사를 차단한 데다 언론까지 재갈을 물리면 민주당 정권의 장기 집권 구도가 확보된다. 제2의 ‘조국 사태’가 터져 정권을 흔들 여지를 근원적으로 막을 수 있게 된다.

 

보통 사람을 위한 피해자 구제는 시늉일 뿐 언론중재법은 철저히 권력자와 가진 자들을 위한 법이다. 권력 비판을 봉쇄해 문 대통령과 조국 전 장관(이하 조국) 같은 정치 권력을 성역화(聖域化)하고 재벌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 언론중재법의 실체다. 적폐 청산의 업보에 시달리는 문 정권이 온갖 무리수를 총동원해 군사작전처럼 밀어붙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론중재법은 ‘정의롭고 보편 타당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의 지배’ 정신과 정면에서 충돌한다. 독재자가 법을 남용하는 ‘법에 의한 지배’가 핵심인 언론중재법은 진정한 법치주의와 동행할 수 없다.

 

세계 시민사회와 언론계의 질타가 쏟아져도 문 정권은 묵묵부답이다. 이 단계만 버티면 자신들만의 세상이 열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민주적 절차를 거쳐 권력을 부여받은 위임 민주주의가 위임 독재로 변질되어가는 생생한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권이 민주 절차를 악용해 민주주의 자체를 해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 정권은 비(非)자유 민주주의(iIliberal democracy) 권력이다. 비자유 민주주의 정권은 직접 민주주의를 빙자해 포퓰리즘과 민족 감정을 부추기고 자유주의와 법치주의를 공격하는 대중 독재다. 여기서 문 정권의 대중 독재는 현대 대중 정치의 괴물(怪物)인 파시즘과 만난다.

 

세계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보편적 잣대를 거스르는 언론중재법을 문 정권이 강행하는 배경엔 열광적 정치 팬덤이 자리한다. 문 대통령 지지율은 임기 말인데도 대선 득표율(41%) 수준으로 강고하다. 대깨문과 문빠는 문 대통령과 조국을 민족 공동체를 구원할 정치적 구세주와 순교자로 우러르는 세속 종교의 신도들이다. 이들은 부동산 폭등과 백신 정책 실패를 보면서도 맹목적인 지도자 숭배에 집착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는 결과로 판정된다’는 민주시민의 균형 감각을 거부하는 정치적 근본주의는 파시즘의 독버섯을 키운다. 현란한 색깔의 독버섯이 위험한 것처럼 선악의 정치를 가르는 파시스트적 근본주의도 민주주의에 치명적이다.

 

파시즘으로 치닫는 문재인 정권에서 광신적 정치 팬덤 못지않게 나라에 해로운 것이 살아있는 권력에 부역하는 지식인들이다. 문 정권의 특징인 ‘내로남불’은 위선을 넘어 파시즘의 본질인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서 나왔다.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지식인들이 문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를 파시스트적 우적(友敵) 논리로 옹호하는 것보다 참담한 풍경도 드물다. 조국 일가의 범죄를 입증하는 온갖 물증과 법원 판결조차 궤변으로 부인하는 전문가들은 지식인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한다. 영악한 철학박사 출신이었던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P J Goebbels·1897~1945)는 나치 패망으로 자살할 때조차 ‘괴벨스 박사’로 불리길 원했다. 그리고 괴벨스 없이는 나치 제3제국과 히틀러도 있을 수 없었다.

 

언론중재법 사태는 민주시민의 정체성을 측정하는 시금석이다. 민주주의의 처음이자 끝인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질식시킬 악법 통과에 앞장서거나 방조·방관하면서 민주주의자일 순 없다. ‘자유의 적(敵)에게는 자유를 부여할 수 없다.’ 한국 민주주의를 전대미문의 위기에 빠트린 언론중재법은 누가 진짜 민주주의의 적인지 만천하에 폭로하고 있다. 자유 언론을 두려워하는 자(者), 바로 그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파시스트다.

 

 

#윤평중 칼럼#읽어주는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