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하나님사랑, 환경사랑 시편 19:1-6

鶴山 徐 仁 2021. 7. 31. 14:04

하나님사랑, 환경사랑 시편 19:1-6

 

 

07월 31일 (토)

   
하나님사랑, 환경사랑 시편 19:1-6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지금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와 도전은 환경문제로 환경은 이제 인류의 생존이 달린 절박한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50년경에는 지구의 온난화로 인해 일본 열도가 물에 잠길 것이라는 충격적인 예측을 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은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하셨습니다(마24:21). 물론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라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종말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를 모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우리의 자연 환경은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기에 우주만물이 창조주의 솜씨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을 보고,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시편 기자는 창조주의 창조의 솜씨를 어떻게 노래하고 있습니까?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표현하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고백입니까?(1). 우리의 환경은 이처럼 창조주의 하신 일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본래 모습입니다. 지금도 인간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지, 이 모든 자연이 조물주의 영광과 사역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보존해야 하는가? 아니면 개발해야하는가? 일차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가꾸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최초의 인류 아담은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욕심대로 자연을 마구 파괴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는 그 소중한 자연의 심포니를 깨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인간의 임무는 창조의 관리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개발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인간에게 문화명령, 곧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창1:28). 그러나 자연의 개발은 인간의 탐욕과 욕심에 의해서만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죄 일뿐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연을 개발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 속해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연을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일방적인 지배나 개발이 아니라 책임감 있는 돌봄이 있어야 합니다. 자연은 인간의 소유물이나 이용물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자연은 이간에게 삶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친구이지 무분별한 소비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렇게 자연을 동반자로 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존하고 회복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 환경오염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어떤 면을 심각하게 느끼셨나요? 
- 지구 환경의 회복을 위해 실천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적어봅시다. 
- 환경위기의 원인 제공자가 아닌지 살펴보고 나의 잘못된 세계관을 수정하십시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위해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라고 하셨지만, 사람인 우리들이 지구와 환경을 잘못 다스려서 이제는 먹을 물도, 마실 공기도 모두 더럽게 만들어 버렸나이다. 이제라도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보존하여 만물의 영장으로서 책임을 감당케 하시옵소서. 
 
   
권위와 권위주의


“참된 권위는 권위주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 권위주의에 사로
잡혀 권위를 찾고자 하면 독재만 있을 뿐이다. 진정한 권위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낮추는 데서 생겨난다.”


이주형 저(著) 《평생갈 내 사람을 남겨라》 (비즈니스북스, 7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아저씨들을 흔히 ‘아재’라고 합니다. 아재는 그래도 애교스럽습니다.
그런데 아재들에게 권위주의가 더해지면 미운 ‘꼰대’가 됩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릅니다.
영어권 문화에서도 Authoritative (권위 있는)와 Authoritarian (권위
주의적인)의 차이를 구별합니다.
‘권위’는 성경적입니다. 성경은 ‘권위’권세를 하나님이 정하신다고
말합니다. 권위가 무너지면 모든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질서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권위에 순종하라고 가르
칩니다. 그러나 자신의 직위나 역할을 이용하여 위압적인 권력을 행사
하는 ‘권위주의’는 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는 장점도 많지만, ‘파괴와 해체’
라는 부정적인 면도 다분합니다. 권위를 파괴하고 조롱하는 무질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의 권위를 무시했던 미리암이 징계를 받는 모습이 나옵니다.
권위주의는 잘못된 것이지만 권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롬13:1)
   
믿음의 사람은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
사탄이 가져다주는 것은 마음의 근심과 걱정이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 속에 근심과 걱정을 만들어 준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빌립보서에서도 “너희 모든 근심을 모두 내어버리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아뢰라.”고 말씀하신다
스탠리 존스는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찬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다.”고 단정짓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배제시키기 때문이다.
 뿐 만 아니라 근심과 걱정이 커지면 
주님이 도와주지 않았다 원망한다.
 반면 믿음의 사람은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한다. 
-강용규 목사의 ‘축복의 통로’에서-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려고 오신 것입니다. 
왜 근심 걱정을 하면서 혼자 쓰러지고 넘어지십니까? 
근심 걱정을 이 시간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이 우리의 짐을 해결해주실 것을 
믿으시고 기도하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므로 
믿음으로 하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