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묘 곁에서 삼하 19:31-37
06월 14일 (월)
부모의 묘 곁에서 삼하 19:31-37 31.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32.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33.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34.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35.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36. 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37.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31-32절). <길르앗>은 요단강 동북쪽이었으며 <바르실래>는 그곳의 대부호였습니다. 다윗 왕이 압살롬에게 쫓겨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소비, 마길과 더불어 다윗 왕 일행을 힘껏 후원한 사람이었습니다.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17:27-29절). 그래서 다윗 왕이 지금 그동안 자기를 섬기며 후원해 준 그에게 보답하겠다며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33절)고 한 것입니다. <공궤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쿨>은 <떠받치다, 유지하다, 제공하다>는 말로 특히 물질적인 필요을 공급해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다윗의 그 보은을 겸손히 사양합니다. <... 왕께서 어찌하여 이 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3-37절). 바르실래야말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겸손하고도 성숙한 인격으로 삶의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낸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 단지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사심 없이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습니다. 바르실래의 자선은 그야말로 <흐르는 물에 던진 떡>이었습니다. 그게 당장은 떡을 버리는 행위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떡을 발견해서 먹고 허기를 채우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약삭빠르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게 다 무모하고 부질없는 짓 같으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자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열매를 가져다주는 실마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르실래에게서 배웁시다. 하나님은 인간이 물 위에 던진 사랑과 정성을 결코 그냥 떠내려 보내시지 않습니다 그게 아무리 작고 하찮게 보이는 것이라 해도 절대 낭비하는 법 없이 반드시 감사하며 보람을 느끼게 하십니다.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를 평가해 보십시오. -<바후림 사람 시므이>(16:5)와 <바르실래>를 비교해 보십시오. -전도서 11:1 말씀을 찾아 적어 보십시오. 주님, 다윗이 입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겠다는 심정으로 <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자, 내가 너를 공궤하겠다>고 했지만 바르실래는 겸손했고, 아름다운 인격으로 왕의 그 청을 사양했습니다. 그는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바르실래에게서 사심 없이 남을 돕는 마음과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남에게 자비의 손을 내미는 선행을 배우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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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릇보다 빈 그릇 “선한 일을 많이 행한 사람일수록 사랑을 받는 그릇이 크다. 따라서 더욱 큰 사랑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작은 그릇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큰 사 랑을 주더라도 받을 수가 없다. 그릇의 크기만큼만 받고 나머지는 그릇 밖으로 모두 흘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릇 속에 담겨 있는 사랑만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외수 저(著)《뼈》(동방미디어, 1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간장 종지에는 고깃국을 담을 수 없습니다. 깊이가 없는 그릇 안에 진한 맛을 내는 음식을 담아 둘 수 없습니다. 큰 것을 담으려면 큰 그릇이 필 요합니다. 우리의 그릇이 커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그릇보다도 깨끗하고 빈 그릇을 더욱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 하나님은 금, 은, 나무, 질 그릇 등 여러 그릇을 만드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 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2:21) 하나님이 절대 주권 하에서 만드신 그릇은 금 그릇이냐 은 그릇이냐 나무냐 질 그릇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큰 그릇이냐 작은 그릇 이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주인이 쓸 수 있는 깨끗하고 빈 그릇이 명품 그릇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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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장 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장 8절)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and this not from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Ephesians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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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실 때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크게 3가지이다. 저는 첫 번째 고백인 전능하신 하나님도 중요하고, 두 번째 고백인 창조주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고백이 세 번째 고백인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시지만 나와 상관이 없다면 앞의 두 가지 고백은 나에게 의미가 없다. 그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실 때 그분의 전능하심과 창조주이심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옆집 아저씨가 아무리 돈이 많고 능력이 있고 인격이 좋아도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 능력 있고 돈 많고 인격도 좋으신 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실 때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경훈목사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신분의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확실해지면 그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확실하면 그 믿음에 합당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믿음에 합당한 말을 하게 되고, 그 믿음에 합당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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