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삼하 13:7-14)
05월 06일 (목)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삼하 13:7-14) 7. 다윗이 사람을 그의 집으로 보내 다말에게 이르되 이제 네 오라버니 암논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한지라
<다윗이 ... 다말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7절). 암논의 요구가(6절) 부자연스럽기는 했으나 다윗은 아들의 그 부탁을 받아들여 아프다며 자리에 누워있는 암논에게로 다말을 보냈는데, 이게 바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암논의 가공할 범죄에 그 아비가 말려드는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다말은 아버지의 분부고, 또 몸져 누운 오라버니 암논을 위한 수고였으므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손수 구운 과자를 들고 암논의 침실까지 들어간 것입니다.
<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11절). 비록 배가 다를망정 오라비와 누이 관계임에도 암논이 숨겨온 흑심을 드러내며 완력으로 간음을 요구하는 대목입니다. 병든 암논을 위로하기 위해 무방비 상태로 그의 침실까지 들어갔던 다말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위기 앞에서 자기를 강간하려는 암논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호소해봅니다.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 왕께 말하라 그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12-13절).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은 암논은 다말의 그 부르짖을 무시하고 결국 그녀를 범합니다. 다말의 온갖 설득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폭력으로 자신의 욕정을 채우고야 말았습니다. 마치 아비 다윗이 이성을 잃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처럼 큰 아들 암논도 그렇게 누이인 다말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14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족조차도 끊임없이 새롭게 사귀어야 진실한 가정으로 성숙해갈 수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혈연적 기초에만 의지해서 인간관계를 풀어가다 보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극과 파탄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 형제와 자매간에도 계속해서 그 정신적인 교감이 성숙해가지 않는 가족은 결국 이런 뼈아픈 불행을 당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이 암논의 비극을 통해 깊이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누이를 범한 암논의 범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뜻하지 않게 암논의 범죄를 도운 꼴이 된 다윗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근친상간의 성폭력 피해자인 다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 다윗이 충직한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듯이 그의 장남인 암논도 배다른 누이인 다말을 범했습니다. 그것도 교활한 속임수로 부친인 다윗을 이용해 <억지로 그와 동침했다>(14절)고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가 지불해야 했던 죄값은 참혹했습니다. 일찍이 다윗의 집에 닥쳤던 이 끔찍하고도 참혹한 비극을 보며 오늘 저희도 많은 것을 느끼고 또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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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거북이’를 바라보는 나무늘보
“사실 이 이야기의 초고는 ‘토끼와 거북,그리고 나무늘보’라는 제 목이었어. 나무늘보는 나무 꼭대기에서 두 동물을 내려다보며 남과 경 쟁하는 시합은 왜 하느냐고 물었대(중략). 토끼와 거북이가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어”
팀 콜린스 저(著) 《지친 당신에게 고요를 선물합니다》 (리드리드 출판, 16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화 속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의미 없는 경주, 그라운드 자체가 기울어진 경주였습니다. 이런 경쟁이 없으면 인류는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흥부와 놀부, 개미와 베짱이,그리고 토끼와 거북이 등 서로 경 쟁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경쟁하게 하고, 선과 악을 나누는 이야기에 익숙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 쪽을 선택하는 대신 각자를 그대로 인 정하여 서로 상생하는 이야기가 더욱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아프리카의 ‘우분투’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한 아프리카 선교사님이 아이들에게 달리기 경주를 제안하며 1등에게는 초콜릿을 선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은 눈을 의심하였습니 다. 아이들이 손을 잡고 함께 결승점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의아해서 물었더니, 한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나만 좋을 수는 없잖아요.” 경쟁과 등수에 찌든 삶을 살아온 선교사님은 크게 감동을 받고 아이들 에게 사과했다고 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1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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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장 18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갈라디아서 6장 18절)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r spirit, brothers. Amen. (Galatians 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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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공의의 두 손으로 주님의 사랑은 공의와 분리될 수 없다. 사랑 없는 정의란 무자비한 폭력에 지나지 않고 정의가 상실된 사랑이란 무책임한 방치에 불과하기에, 주님께서는 정의를 가능케 하는 힘인 사랑의 손을, 사랑하게 하는 능력인 공의의 손을 동시에 갖고 계신다 그분에겐 정의의 다른 모습이 사랑이요, 사랑의 다른 이름이 공의인 것이다. 바로 주님의 그 공의와 사랑의 손 안에서 사울과 같던 우리의 옛 사람은 꺾어지고 바울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바로 그 손 안에서 우리가 걷고 있는 다메섹 도상의 의미와 가치가 새로워졌다. -이재철 목사의‘다메섹으로’에서-
우리 역시 두 손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불의를 향해 정의의 손을 내밀되 반드시 사랑의 손이 함께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그때에만 우리의 정의가 산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손으로 이웃을 품되 그 손은 언제나 진리인 공의의 손과 겹쳐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미명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수 있고, 우리의 사랑이 상대를 타락시키는 마약이 아니라 참 생명의 묘약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공의와 사랑의 두 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께로부터 얻은 새 삶에 대해 책임을 다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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