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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위 헬기 치워라” 46년전 월남 조종사 목숨건 착륙 순간

鶴山 徐 仁 2021. 5. 2. 12:15

“항모 위 헬기 치워라” 46년전 월남 조종사 목숨건 착륙 순간

 

미 해군연구소 긴박했던 당시 상황 사진 공개
2인승 연락기에 아내와 자녀 5명 태우고 탈출
남베트남, 파리 평화협정 체결 2년 뒤 무력으로 패망

 

정지섭 기자


입력 2021.05.02 10:13 | 수정 2021.05.02 10:13

 

남베트남 공군 부앙라이 소령과 가족 6명을 태운 세스나 연락기가 사이공이 함락되던 1975년 4월 30일 미 미드웨이함 갑판에 착륙하는 모습. /미 해군역사재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헬리콥터를 바다 쪽으로 밀어내고 있다. 헬리콥터가 치워진 자리에 작은 비행기 한 대가 착륙한다. 1975년 4월 30일.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 함락으로 남베트남이 패망하던 순간 항공모함 USS 미드웨이함 갑판에서 벌어진 장면이다. 사이공 함락 46주년을 맞아 미 해군연구소가 당시 상황이 담긴 세 장의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부앙라이 남베트남군 소령이 몰고 온 정찰기의 착륙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미드웨이함 승조원들이 갑판에 있던 헬기를 밀어내고 있다. /미 해군연구소 페이스북

 

 

왜 군인들은 멀쩡한 헬리콥터를 배 밖으로 밀어낸 것일까. 단서는 갑판에 착륙한 작은 비행기에 있다. 이 비행기는 미국에서 만들어 남베트남 공군도 연락이나 관측용으로 이용했던 ‘세스나 O-1 버드 독’이다. 두 명이 탈 수 있는 작은 정찰기 안에 일곱명이 타고 있었다. 남베트남 공군 소속 부앙-라이 소령과 아내, 그리고 다섯명의 자녀들이었다. 북베트남군의 파죽지세 공세에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조국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자유를 찾기 위해 가족들을 태우고 목숨을 건 착륙을 시도한 것이다.

부앙라이 남베트남 공군 대령이 가족들을 태우고 몰고 온 정찰기를 착륙시키기 위해 미드웨이함 승조원들이 갑판위의 헬기를 치우고 있다. /미 해군연구소 페이스북

 

 

당시 미 해군은 잦은 바람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이라는 이름으로 아직 베트남을 빠져나가지 못한 미국인과 미국으로 가려는 남베트남인들을 탈출시키는 임무를 하고 있었다. 이는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진행한 마지막 군사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날 비행기의 출현은 작전과는 무관한 돌발 상황이었다. 갑판 위를 낮게 날던 세스나 비행기에서 권총 한 대가 툭 떨어졌다. 그 권총 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종이에는 부앙-라이 소령이 급하게 쓴 영어 필기체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헬리콥터를 다른 곳으로 옮겨줄 수 있습니까. 갑판 활주로에 착륙할 수 있게요. 아직 한 시간 정도는 날 수 있어요. 제발 구해주세요. 부앙 소령, 아내와 다섯 아이’. 정상적 교신이 어렵자 택한 최후의 방법이었다.

 

부앙라이 소령이 급하게 써서 미드웨이함 갑판에 떨어뜨린 메모. 한 시간 정도 비행할 수 있으니 갑판 활주로를 확보해 착륙을 도와달라, 자신과 아내, 다섯 아이가 탑승해있다고 알리며 구조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미 해군역사재단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미 해군 로렌스 챔버스 대위는 상황을 파악한 뒤 이들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세스나 정찰기가 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갑판위에 있던 헬기들을 긴급히 치우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1000만 달러(약 111억7500만원)의 헬기들이 갑판 바깥으로 치워졌고, 상당수가 남중국해 해상에 떨어졌다. 활주로가 확보되고 착륙 허가를 뜻하는 파란 신호등이 켜지면서 부앙라이 소령 부부와 아이 다섯명이 탄 세스나 비행기는 무사히 갑판에 착륙했다.

사이공 함락 당시 이른바 ‘보트 피플’ 말고도 이 경우처럼 남베트남군 조종사들이 직접 비행기를 몰아 미군에 도움을 요청한 사례들도 있었다고 한다. 부앙라이 소령 가족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미드웨이함 승조원들 사이에서 그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전개됐고, 이들은 이후 미국에 정착했다. 부앙라이 소령이 타고온 비행기는 플로리다주 펜서콜라에 있는 국립 해군-항공 박물관에 전시돼있다. 값비싼 헬기들을 포기하면서 부앙라이 소령을 구출한 당시 이야기는 한 가족의 생존기인 동시에 한 나라의 망국 스토리이기도 하다. 부앙라이가 속했던 남베트남 공군은 한 때 세계에서 6번째로 규모가 공군으로 위용을 떨쳤지만,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으로 남베트남이 패망하면서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14년 플로리다에서 열린 한 행사장에서 미국에 정착한 부앙라이 전 남베트남군 소령(오른쪽)과 가족들이 당시 갑판 착륙허가를 내줬던 로렌스 챔버스 예비역 소장(뒷줄 오른쪽에서 둘째)과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미 해군 역사 재단

 

 

1968년 미국과 북베트남이 파리평화회담을 시작했고,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두 달 뒤 미군 미군 철수가 이뤄지면서 베트남전은 본격적인 종전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상황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북베트남은 1975년 3월 이른바 ‘남부해방작전’을 대대적으로 펼쳤고, 남베트남이 한 달 만에 무력으로 병합되면서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