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에벤에셀 (삼상 7:12-17)

鶴山 徐 仁 2020. 9. 11. 10:24

에벤에셀 (삼상 7:12-17)

 

09월 11일 (금)

   

에벤에셀 (삼상 7:12-17)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15.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16.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17.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12절).

그렇습니다. 근 40년 가까이 블레셋의 압제에 시달리던(삿13:1) 이스라엘이 싸움에서 이겼을 뿐 아니라 가나안 서쪽까지 블레셋 군대를 공격하여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란 뜻으로 미스바 전투의 승리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였습니다. 실제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셨다>(13절)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14절). 그간 접경지역인 이스라엘 동쪽의 성읍들은 오랫동안 블레셋의 통치와 압제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시대, 미스바 성회를 기점으로 모두 되찾은 것입니다.

 

특히 <아모리 사람>이란 가나안 원주민 중 가장 강력한 족속들로 출애굽 이후 계속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공격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도 평화가 유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블레셋의 강력한 군대가 이스라엘에 패하자 이를 지켜 본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 군대의 위세에 눌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벤에셀>은 사무엘과 이스라엘이 미스바 성회에서 하나님께 바친 위대한 신앙고백이자 자손들, 후손들, 오늘 우리들에게 남긴 위대한 신앙 간증입니다. 이 위험천만하고도 황량한 <코로나> 시대를 살며 우리가 꼭 세워야 할 기념비가 있다면 바로 이 <에벤에셀>입니다. 우리의 가슴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의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우고 감사한다면 우리도 모든 난적들을 제압하고 사무엘 시대 미스바의 백성들처럼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왜 사무엘이 해마다 <벧엘>, <길갈>, <미스바>를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렸을까요(16절)?

-옛 이스라엘의 지도를 보고 <에그론>과 <가드>를 특정해 보십시오(14절).

-당신은 오늘 지난 반년을 되돌아보며 가슴 속 깊은 곳에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울 용의가 있으십니까?

 

주님, 그렇습니다. 사무엘과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물을 붓듯 진심으로 회개하고 금식하며 통회했을 뿐 아니라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비를 세우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셨다>며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더 큰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사 블레셋 군대를 쫓아내시고 잃었던 땅을 다 되찾게 하셨습니다. 지난 반년을 <코로나19>로 고통했던 저희도 모두가 마음속에 <에벤에셀>의 감사비를 세우게 하사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어둠을 만나도

 

“폐족이 된 집안의 사람으로서 제대로 처신하는 방법은 무엇이겠느냐?

오직 공부뿐이다(중략).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견문을 넓히고,커서는 온갖 어려움을 겪은 너희들 같은 사람만이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는 법이다.”

 

정약용 저(著) 오세진 편역(編譯) 《아버지 정약용의 인생강의》

(홍익출판사, 1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로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살다 신유교옥에 연루되어 40세부터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다산은 기약 없는 유배생활을 떠나며 폐족으로 몰려 앞길이 막막한 두

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폐족의 상처를 가졌으니 오히려 학문에 깊게

정진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상처가 있는 너희들이

가장 공부의 맛을 알 수 있다며 격려합니다.

“공부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고아(高雅)한 일이지만,

아무나 그 참맛을 아는 것은 아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집안의 자제에

게는 공부의 참맛이 허락되지 않는다. 또한 시골의 가난한 천재에게

공부의 심오한 경지가 쉽게 허락되는 것도 아니다. 부유한 고관대작

가문의 자제나 시골의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태어난 천재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읽기만 한다고 해서 독서라고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고난에 지지 말고 고난을 발판으로 학문에 정진하라고 아들들을 독려

했던 정약용은 유배지에서의 18년 동안 매일 책을 읽고 그 유명한 《목

민심서》를 저술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며 살다가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수 많은 바울 서신을 교회들에게 보내며 생명의 사역을 계속합니다.

고난으로 폐인이 되는 사람이 있고, 고난 속에서 본질을 알게 되는 사

람이 있습니다. 고난으로 주저앉는 사람이 있고, 고난 속에 기도하여

날아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is poured out for many for

the forgiveness of sins.(NIV)

   

상대평가보다는 절대평가

우리나라 교육 중 가장 잘못된 점의 하나가

상대 평가제도라고 생각한다.

상대평가는 오직 소수만이 승리하는 제도이다.

내가 아무리 90점을 맞았더라도

남이 더 많이 맞추었다면 나는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왜 다 같이 승리하는 방안을 찾지 못 하는가

많은 사람이 모두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누군가 승리한다면 누군가는 패배하는 것이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은

어린이들에게 약자는 강자에게 잡아먹히고

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그 약자라고 생각한 동물들이

더 많은 먹이를 얻고 더 많은 새끼를 키우고 번성하며

강자라고 생각한 동물이 더 배고프고

더 고통 속에 있으며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나는 모든 것이 절대 평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자미상의 글 ‘예수님의 일생’에서-

 

절대평가란 60점만 넘으면 모두 합격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승리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도와주면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수록 바로 이

절대평가의 나라가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0점이 낸 아이디어나 100점이 낸 아이디어나

다 똑같이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경쟁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고 말하지만

자기 자신과 경쟁하여 60점을 따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이 넘는다면 모두 똑같은 것으로 보고

이후는 각자의 창의력과 도움으로

함께 발전하면 되지 않을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