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9.05 16:43
[김태훈의 이슈&북스] ‘러시아혁명사’
청와대가 이른바 ‘진인 조은산씨의 시무7조’ 청원을 접수 후 보름간 비공개 상태를 유지하다가 뒤늦게 공개전환하며 비판을 받았다. 청와대는 앞서 ‘김현미를 파직하라’는 내용의 조은산씨 청원도 비공개처리한 바 있다.
시무7조 청원은 비공개 상태로 있던 15일 동안 이미 4만명을 넘었선 것으로 드러나 청와대가 공개를 미적댄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물론, 국민청원이라고 해서 모두 공개할 수는 없다. 명예훼손이나 근거 없는 비방까지 무작정 공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비판은 최대한 허용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시무7조는 내로남불, 혹세무민, 살인적 증세, 외교 무능 등 이 정권의 치부와 실책을 7가지로 나눠 낱낱이 적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추상같이 꾸짖었다.
‘간신이 쥐떼처럼 창궐하여 역병과도 같으니 정책은 난무하나 결과는 전무하여 허망하고 실(實)은 하나이나 설(說)은 다분하니 민심은 사분오열일진데 조정의 대신들과 관료들은 제 당파와 제 이익만 챙긴다.’
이러니 공개하기가 꺼려졌던 것 아닐까,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1905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위키피디아
‘역사는 동어반복’이라고 한다. 인간사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청원에 귀를 막았다가 나라가 기운 사례가 여럿 있다. 민심은 천심인데, 민심에 귀를 닫았다가 정권이 무너졌다. 제정 러시아의 비극적인 몰락을 부른 러시아 혁명도 단초는 정권의 청원 뭉개기에서 비롯됐다. 1905년 1월 22일 터진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이날 노동자 농민들이 황제 니콜라이2세의 겨울궁전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청원 행진을 벌였다. 그들 손에는 황제에게 바치는 상소문이 들려 있었다. 김학준 전 인천대 총장이 쓴 ‘러시아혁명사’에 관련 내용이 소개돼 있다.
‘폐하, 저희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들, 저희 처자식과 무력한 늙은 부모님들은 진리와 보호를 구하기 위해 폐하께 갑니다. 저희는 거지가 됐으며 억눌려 살아왔으며 숨이 넘어가고 있나이다.(중략) 저희가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나이다.(중략) 관리들은 이 나라를 완전한 파멸 속으로 몰아넣었으며 가증스런 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나이다. 그들이 세금이란 이름으로 저희로부터 엄청난 경비를 거두어가지만 저희 노동자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나이다.’(‘러시아혁명사’ 407쪽)
조은산씨가 시무7조 상소문을 쓰며 ‘피를 토하고 뇌수를 뿌리는 심정으로’ 라고 표현했는데, 그 청원 글처럼 비장하기 그지없다.
러시아 백성은, 삶이 곤궁하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러시아 황제인 차르에게 청원했다. 이 청원을 차르가 수용하면 백성들은 차르의 은덕을 칭송했다. 이게 반복되면서 차르를 신처럼 받드는 숭배 사상까지 민간에 뿌리내렸다.
1905년 1월 그날의 분위기도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다. 백성들은 청원서를 들고 ‘하느님, 차르를 지키소서’라는 성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런 군중을 향해 차르의 군인들이 발포했다. 그로 인해 500명~1000명이 떼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민심이 차르로부터 돌아섰다. 사람들은 “이제 차르는 없다”고 외쳤다. 러시아 혁명사는 그날의 분노를 이렇게 전한다.
‘이제 러시아 대중은 차르와 자신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동화같은 관계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났다(중략) 자비로운 아버지 차르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존경에서 그들은 고통을 직접 호소하고자 그 앞에 무릎 꿇으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비로운 아버지 차르의 반응은 발포였다. 이제 그 발포는 차르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모든 찌꺼기를 없애버린 것이다. 정말 차르는 무능했다. 사태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409쪽)
이후 러시아혁명이 터지며 폐위된 니콜라이2세와 그의 가족은 유폐됐다가 이듬해 모두 총살당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니콜라이2세가 청원에 적절히 대응했다면 역사는 다르게 진행됐을 수도 있다.
환자가 괴로움을 호소하면 의사는 청진기를 몸에 대고 무엇이 문제인지 귀 기울여야 한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불편함, 괴로움, 억울함을 토로하면 민심의 청진기를 국민의 마음에 대고 들어야 한다. 그러려고 만든 게 국민청원이다.
이 정권은 생색내기 좋은 것, 야당 공격에 이용하기 좋은 것, 맞아도 별로 안 아픈 것만 듣는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반면, 자기들을 뼈아프게 공격하거나 치부를 드러내는 내용은 외면한다.
국민청원 사이트가 청와대 정부 성토장이 됐다는 게 꼭 위험신호인 것만은 아니다. 성토를 한다는 건, 국민이 기대를 완전히 접지는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청진기의 막힌 구멍부터 뚫어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민심 청진기의 구멍을 막은 독선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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