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과 문재인의 ‘홍위병 정치’ : ‘대깨문’은 21세기 한국판 홍위병
⊙ 문재인이 조국 의혹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에 ‘검찰개혁’ 빙자한 대중 동원으로 맞선 것은 마오쩌둥식 수법 ⊙ 대중 선전선동과 조직 우선하던 主思派가 ‘한국판 홍위병’의 뿌리 ⊙ 親文 세력의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는 소리는 홍위병의 “毛 주석은 무조건 옳다”는 주장과 통해 ⊙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과 문재인의 ‘소주성’도 경제적·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점에서 닮은꼴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지난 9월 28일 서초동 대검 청사 앞에서 이른바 ‘검찰개혁 촛불집회’라는 게 열렸다. 맞불집회였다. 조국 전(前)법무장관 임명에 대한 반발이 날로 거세지자 현 정권 지지층이 동원돼 조직한 것이었다. 더불어민주당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이재정 대변인, 이인영 원내대표가 연이어 논평을 내놨다. “200만명이 모였다!” 나팔수 언론들도 일제히 그렇게 떠들었다. 간만의 세(勢) 과시로 흥분한 탓이겠지만 이건 ‘삶은 소머리도 웃을 만한’ 과장이었다. 그곳은 그만한 인원이 모일 공간이 아니었다. 잘해야 1만~2만 남짓의 인원이었다. 당연한 반박이 나왔다. 자유한국당의 나경원 원내대표는 9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대전 인구 150만보다 더 많은 인구가 모였다는, 한마디로 판타지 소설급으로 뻥튀기하고 선동하고 있다”고 힐난했다. 민주당의 그 행태에 대해 나 대표는 그 발언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물타기와 감성팔이에 이어 이제는 홍위병(紅衛兵) 정치로 나섰다. 문 대통령이 분노에 가득 찬 검찰 증오를 드러냈다. 그러고 나서 극렬지지층 총동원령을 내렸다. 가장 타락한 민주주의 정치, 군중 정치로 가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나치의 수법에 기대보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음 날인 10월 1일 홍익표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맞받았다. “국민을 모독하는 발언…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그런 식으로 폄하하는 것은 매우 잘못됐다.” ‘홍위병’이라는 말은 민주당에도 매우 기분 나빴던 모양이다. 확실히 홍위병은 폄하의 용어다. 문재인 대통령이 난데없이 ‘일제(日帝)잔재’라며 발끈했던 ‘빨갱이’라는 용어 못지않은 비칭(卑稱)이다.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렇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공산좌익을 일컫는 ‘reds’가 그렇듯 홍위병도 자랑스러운 자칭(自稱)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그야말로 넌더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본고장 중국에서부터 그렇게 되었다. 홍위병을 길러낸 ‘사회주의교육운동’
| 홍위병들은 공산당 간부, 교수, 교사, 지식인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학대하거나 살해했다. |
홍위병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과 짝을 이루며 등장했다. 기획 연출은 마오쩌둥, 홍위병은 그 주연이었다. 기치는 ‘파사구(破四舊)’였다.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慣習)을 타파(打破)하여, 진정한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명분이고 이면에는 연출자 마오쩌둥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좌(權座) 복귀를 위해 한바탕 일을 벌인 것이었다. 배경에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라는 게 있었다. 마오쩌둥이 제2차 5개년계획(1958~1962)을 시작하면서 서구(西歐) 선진공업국가들을 단시일에 따라잡겠다며 벌이기 시작한 운동이었다. “7년 안에 영국을 초월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는다.(七年超英 十五年赶美)” 마오쩌둥이 1958년 내린 이 교시(敎示)와 함께 대대적인 경제도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대약진이 아니라 대참사였다. 3000만명이 넘는 인민이 대약진운동 기간 굶어 죽은 것이다(평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통상 그 정도로 추정한다). 1960년대 당시 한국 인구가 2500만이었다. 한국만 한 나라의 전(全) 인구가 통째로 굶어 죽어 사라진 것과도 같은 엽기적 사태였다. 마오쩌둥은 그 책임을 지고 1959년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후퇴할 생각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권좌 복귀를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1963년 그는 ‘사회주의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영향 아래 성장한 학생들이 나중에 홍위병이 됐다. 朴正熙의 5·16, 毛澤東의 5·16 ‘문화대혁명(문혁)’의 공식적 시작은 공교롭게도 1966년 5월 16일이었다. 마오쩌둥이 당 정치국을 움직여 약칭 〈5・16 통지〉라 불리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를 공포한 날이었다. 이어 5월 29일 첫 번째 홍위병이 결성됐다. 칭화(淸華)대학교 부속중학교의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8월 8일 마오쩌둥은 《인민일보》에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논평을 게재했다.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와 당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조반유리(造反有理)!” 홍위병의 구호로 “반항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외쳐대는 수백만의 홍위병이 《마오쩌둥 어록》을 흔들며 중국 전역을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파사구’란 말대로 구시대 유물은 다 때려 부수고 다녔다. 공자(孔子) 묘를 파헤친 것은 그 대표적 사건이었다. 부르주아적 잔재 또한 모조리 청산한다며 난동을 부렸다. 지식인, 정치인 등에 대한 폭행·고문은 일상이었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신고해 살해당하게 하는 패륜(悖倫)까지 발생했다. 재앙이었다. 모든 면에서 그러했지만 특히 학문과 지성(知性)의 영역에선 더욱이 그랬다. 교수들이 모욕과 구타를 당하고 도서관은 홍위병들의 공동숙소로 전락했다. 실어낸 책들은 헛간에 쓰레기처럼 쌓여 있다 썩어가고 불태워졌다. 야만이 지성을 완전히 밟아버렸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문혁은 그 얼마 뒤 마오쩌둥의 처 장칭(江靑)을 중심으로 한 사인방(四人幇)이 체포되고서야 끝이 났다. 중국사는 1966~1976년까지의 그 기간을 ‘10년 대동란’으로 부른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 했다. 그에 빗대 국내 일각에서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그렇게 평가하려 하기도 한다. 하나 이 같은 비교는 덩샤오핑도 인정치 않을 것이다. 1961년 박정희의 5·16은 한국을 ‘한강의 기적’으로 이끌었지만, 1966년 마오쩌둥의 5·16인 문혁은 중국을 10년간 퇴행(退行)의 수렁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천안문에는 마오쩌둥의 초상이 걸려 있기는 하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문혁이 과오였다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다. 홍위병 경력은 내세우지도 못한다. 당연히 홍위병이라는 용어는 비칭이다. 文革을 찬양한 자, 毛를 존경한 자 그럼에도 중국 바깥의 좌익 지식인들은 엉뚱하게도 문혁을 찬양했다. 프랑스의 사르트르를 비롯한 수많은 서구 지식인이 그랬다. 한국에도 그런 인물이 있었다. 리영희라는 사람이 대표적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10억 인의 나라》 등 그가 1980년대 전후(前後) 내놓은 책들은 마오쩌둥과 문혁을 찬양하는 글이 가득했다. 그런데 이게 그 말썽 많은 586세대의 필독서였다. 온갖 시비에도 법무장관에 버티고 앉아 온 나라를 들끓게 하고 있는 조국(曺國)이 바로 그 586이다. 그는 여전히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했다. 그를 끝끝내 법무장관에 임명해 말썽을 일으킨 장본인인 문재인 대통령부터가 마오쩌둥과 문혁을 찬양한 리영희를 존경한다고 했다. 그들의 내심에는 마오쩌둥, 문혁, 홍위병이 어떻게 각인돼 있는 것일까? 민주당의 홍익표 의원은 “홍위병 정치”라는 비판에 “모독, 폄하”라며 발끈했다. 하지만 그도 따지자면 586운동권 세대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느끼고 뭐라 하든 그 시절 586세대에 이미 홍위병적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든 좌익운동에는 그런 속성이 내재돼 있지만, 특히 주사파(主思派)가 문제였다. 주사파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운동권에는 적어도 지적(知的) 풍토는 살아 있었다. 토론과 논쟁으로 날밤을 지새웠고, 제법 행세를 하려면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좌익 편향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론과 지성이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주사파가 대학가를 휩쓸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 토론과 논쟁이 사라지고 교시가 자리를 대신했다. 지적인 탐구가 소(小)부르주아적 속물 근성으로 매도되고 품성과 대중성이 강조됐다. 반지성주의였다. 지성은 내팽개쳐지고 남은 것은 싸구려 선동과 구호뿐이었다. 한국판 홍위병 문화였다. 그 이면(裏面)에 목적을 갖고 기획과 연출을 하여 홍위병을 부추긴 마오쩌둥과 같은 자들이 없을 리 없다.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뿌리 깊은 좌익 세력은 늘 있었다. 성인판 홍위병, 청소년판 돌격대
| 나치당의 청소년단체인 히틀러유겐트. 히틀러에 대한 광적 충성심으로 무장한 이들은 ‘독일판 홍위병’이었다. |
한때 운동권 내에선 스스로 지하 전위(前衛)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가 제법 강력히 이어졌었다. 그러나 주사파가 주류(主流)로 자리 잡게 되면서 이 논리는 밀려났다. 오직 대중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게 됐다. 이렇게 되면 이제 운동 방법론의 초점은 대중의 선전선동과 조직화에 맞춰지게 된다. 단순화된 구호, 감성팔이 선동이 중요해진다. 별달리 홍위병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홍위병과 다를 게 없다. 사실 중국 마오쩌둥의 홍위병이 그 경우의 원조도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고 널리 살피면 이건 매우 고전적 수법이고 사례다. 이미 독일 나치의 돌격대와 히틀러유겐트(나치의 청소년 조직)가 그런 것이었다. 그 동원 수법과 행태를 보면 마오쩌둥의 홍위병과 본질에서 차이가 없다. 굳이 구분해 비유하자면 히틀러의 돌격대는 ‘성인(成人)판 홍위병’이고, 마오쩌둥의 홍위병은 ‘청소년판 돌격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겐트야 당연히 홍위병이다. 그런데 이건 당연했다. 애초 마오쩌둥의 홍위병 자체가 바로 그것을 흉내 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극우고 마오쩌둥은 공산좌익이라 다르다는 얘기는 틀린 것이다. 나치와 볼셰비키 둘은 본질에서 차이가 없다. 선전·선동·조직 방법론상으로는 특히 더 그렇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레닌 이래 좌익혁명운동에는 청년동맹을 만드는 건 언제나 기본 중 하나였다. 유겐트와 홍위병은 그 연령을 더 낮춘 것일 뿐 본질적 문제의식은 동일했다. 그래도 미성년 청소년까지 동원한다는 점에서 청년동맹보다 좀 더 엽기적이긴 했다. 그런데 히틀러와 마오쩌둥이 그런 점에서 닮았다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생각하는 머리’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지금 문제가 되는 586운동권 세대들은 이런 경과 과정을 알게 모르게 거쳐 왔다. 물론 좀 더 깊숙하게 내막을 알고 있는 이들과 대중조직 활동만 경험한 이들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겪고 공유(共有)한 문화는 비슷할 수밖에 없다. 그 경험과 문화가 세대의 속성이 되고 발상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속성을 그 후배 세대에도 물려주었다. 문재인 지지자들을 자칭(自稱) 타칭(他稱) 일컫는 용어가 ‘대깨문’이다. ‘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라는 뜻이다. 자칭이 없었다면 단지 욕설이기 딱 알맞은 이 용어가 그야말로 상징적이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는 구호까지 덧붙여 생각하면 이건 딱 한국판 홍위병이다. 문혁 당시 “마오(毛) 주석은 무조건 옳다”라고 한 것의 그냥 판박이에 가깝다. 지난 9월 28일 서초동 대검 앞 ‘골목’에서 열린 이른바 ‘검찰개혁 촛불집회’라는 건 말하자면 ‘대깨문’의 집회였다. 그러더니 10월 5일에는 ‘조국 지키기’ 집회가 열렸다. ‘대깨문’이 드디어 ‘대깨조’가 되었다. 과거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아니 그럴 생각이 없는 386운동권 세대 일단의 무리와 그 세례를 받은 후배 세대들은 그렇게 한 덩어리의 한국적 홍위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범법자가 법무장관, 정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다.” 지금 시민들은 이렇게 분개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을 법무장관에 임명하면서 “의혹만으로 임명 않는다면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 운운했지만 이야말로 문명국가 어디에도 선례(先例)가 없는 해괴한 경우였다. 국민의 반발과 저항은 상식적으로 당연했다. 하지만 그 상식에 돌아온 응답은 비상식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것은 비상식이 아니다. 문재인-조국과 대깨문-대깨조의 비상식적 행태는 마오쩌둥의 홍위병 동원의 경우를 빼다 박았다. 그 양상, 수법, 행태 모두가 그렇다. 그게 그들의 상식인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소위 ‘촛불혁명’으로 화려한 출발을 했다. 그러나 문 정권은 출범 이래 국정 전 영역에서 파탄상을 보였다. 조국 임명은 그 정점(頂點)이었다. 그러자 “설마” 하던 이들조차 심상찮은 반발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문 정권은 제대로 위기에 봉착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응은 딱 마오쩌둥식 수법이었다. 자기 패거리를 조직적으로 부추기고 동원하는 맞불이었다. 애초 이들의 정권 탈취 수법 자체부터가 그랬다. 사실과 진실은 따질 필요도 없었다. 기회는 왔고, 그러니 얼마나 자극적으로 군중적 분노를 부추길 것인가만 중요했다. 요설이 언론을 뒤덮고 광장을 휩쓸었다. 대중은 선동당했고, 책임 있는 자들은 겁을 먹었다. 거짓 선동 앞에 양식(良識)이 무릎을 꿇었다. 문재인 세력은 그렇게 하여 권력을 탈취했다. 전형적 반복이다. 불순한 자들이 부추기고 어리석은 자들은 놀아난다. 선동에 의한 정변(政變)에서 보이는 전형이다. 그런데 의도를 갖고 부추긴 자들의 수법도 그렇지만 그에 동반되어 나타나는 대중의 행태 또한 그러하다. 군중심리는 한번 작동되기 시작하면 일과성(一過性)으로 멈추지 않는다. 놀아난 자들은 결코 자신들이 어리석다 여기지 않는다. 놀아난 게 아니라 각성(覺醒)된 주체(主體)라 여긴다. 그런 착각과 함께 열에 들뜬 감성이 고집스러운 자기합리화를 이어간다. ‘촛불’의 감격을 자랑하는 이들이 그랬다. 그들은 ‘대깨문’이라 자처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대가리가 깨져도” 운운이라면 ‘생각하는 머리’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부끄러움? 생각하길 포기했으니 부끄러울 까닭도 없다. 마오쩌둥의 홍위병들도 그랬다. “조반유리(造反有理)”라고 했지만 말이 그랬을 뿐 홍위병들에게 합당한 이유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그들에게 “마오 주석의 말은 무조건 옳은 것”이었다. “대가리가 깨져도 마오 주석”, 즉 ‘대깨모’였던 셈이다. 홍위병은 ‘대깨문’의 원조(元祖)고, 대깨문은 21세기 한국판 홍위병이다. 마오의 ‘대약진운동’ 문 정권과 그 지지층의 행태에 ‘홍위병’이라는 비판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 사실 국정 파탄 자체가 마오쩌둥과 닮아 있다. 특히 문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의 전개 양상은 마오쩌둥 실각(失脚)의 원인이 되었던 ‘대약진운동’ 실패의 리메이크판이라는 느낌이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경과는 괴이하기까지 하다. 우선 ‘제사해(除四害)’다. 모기·파리·쥐, 그리고 참새, 이 4가지 동물을 인민과 농업에 해를 끼치는 사해(四害)로 규정짓고 박멸하자는 것이었다. 1958년 한 해 동안만 참새 2억1000만 마리를 잡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메뚜기가 창궐해 곡물을 먹어 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참새는 곡물도 먹지만 메뚜기도 먹는 새였다. 그 참새를 없애니 메뚜기가 증가하는 건 당연했다. 흉년과 기근을 부르고 있었다. 운동이 시작되던 1958년 이미 굶주림과 식량 부족이 중국 전역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은 참새잡이 한 가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1958년 대약진운동과 함께 시작한 ‘토법고로(土法高爐)운동’이 더 결정적으로 파탄으로 몰아갔다. 토법고로란, 말하자면 홈메이드(home made) 용광로다. 집집마다 작은 용광로를 지어 철(撤)을 생산하면 대규모 제철소가 없어도 대량의 철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생산이 늘기는 했다. 위에서 할당량을 부과하고 독려하니 그럴 만했다. 그러나 그 철은 질(質)이 나빠 아무 쓸모가 없었다. 또 다른 부작용도 발생했다. 연료로 쓰기 위해 산의 나무를 모조리 베어내 농토 인근의 산이 모조리 민둥산이 돼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가 올 때 토사(土砂)가 씻겨 내려가 산사태를 일으키고 농지도 뒤덮어버리기 일쑤다. 문제는 또 있었다. 농민들이 농사를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하게 된 것이다. 안 그래도 어차피 자기 소유가 아닌 탓이라 농사에 소홀한 터였다. 그런데 철 생산을 닦달해대니 고철(古鐵)과 땔감을 찾아 돌아다니느라 추수조차 못 챙기는 일이 발생했다. 제대로 수확했어도 이미 수확량은 형편없을 터였는데 그마저도 팽개치게 됐으니 결과는 재앙일 수밖에 없었다. 흉년이 왔다. 그런데 따라온 기근은 통상의 경우가 아니라 사상 유례없는 대기근이었다. 농민들의 이주를 원천 봉쇄한 때문이었다. 중국은 장강대하(長江大河)의 나라다. 남(南)에는 양쯔강(揚子江)이 있고, 북(北)에는 황허(黃河)가 있다. 어느 한쪽에 흉년이 들어도 난민이 되어 이동하면 구걸을 해서라도 목숨은 일단 구한다. 왕조시대 중국은 그랬다. 그런데 공산 중국은 농민들을 호적제로 지역별 인민공사(人民公社)로 묶어 타(他) 지역 이주가 불가능하게 해버렸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닥쳐온 기근은 그리하여 재앙적인 대기근이 되었다. 당시 중국 농민들은 그야말로 앉은 채 굶어 죽었다. 그 관련 기록은 참혹하다. 인육(人肉)에 대한 기록이 적잖이 등장한다. 경제 실패도 마오쩌둥과 닮은꼴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한국 경제를 완전히 망치고 있다. 그에 대해선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경제를 망쳐먹는 양상이 마오쩌둥 실패의 경우의 판박이다. 친(親)환경, 원전(原電) 중단, 태양광 발전, 소득주도성장 등등은 마오쩌둥의 ‘제사해’나 ‘토법고로’의 발상법을 너무 닮았다. 어처구니없는 비과학적 망상에다 경제학적으로도 말도 안 되는 게 그대로 닮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마오쩌둥의 괴이하기 짝이 없는 실패를 거의 유사하게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실패를 제대로 바로잡기는커녕 정치적 술책으로 만회하려는 작태도 닮았다. 존경하는 리영희를 통해 배운 대로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 출처 : 월간조선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