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다시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창세기 35장 1-7절) 외 1

鶴山 徐 仁 2019. 4. 1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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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월 10일 (수)
말씀 큐티더 보기
성경 본문 다시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창세기 35장 1-7절)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5.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본문 해석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넘어질 때가 있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과 너무 멀리 떨어져서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정말 행복하게 주님 따라가고 싶었는데, 하루아침에 무너져서 ‘내가 진짜 주님을 믿어왔나?’라는 이런 의심까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에서 장자권을 빼앗아 자신을 죽이려 하는 형을 피해 도망 다니고, 삼촌의 집에서 종처럼 20년을 일하는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 가운데 요셉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 하나님의 꿈을 안고 세겜에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세겜에서 요셉은 뜻밖에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요셉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요셉의 아들들은 추악한 복수를 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오늘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일어나서 베델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하나님을 만나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던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야곱처럼 넘어져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면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처음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던 마음, 하나님이 전부라고 기도하던 그 자리로 오늘 주님과 함께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넘어진 그를 세우셔서 벧엘에 세우십니다.

 벧엘이 어디입니까? 야곱이 아무것도 없을 때, 하나님만으로 만족했던 자리입니다. 거부가 되어 자식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 것 같았던 세겜이 아니라, 주님 한 분 만으로 내 인생의 모든 것들이 충분함을 고백했던 벧엘에 서면, 다시 그 신앙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 야곱은 벧엘로 그냥 올라가지 않습니다. 몸을 깨끗이 하고 자신의 귀걸이와 우상들을 상수리나무 밑에 묻고 올라갑니다. 당시의 귀걸이는 지금처럼 장신구의 역할도 했지만 자신을 지켜주는 부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다시 하나님이 자신의 삶이 전부라는 고백을 했던 벧엘로 올라가며 그 신앙을 회복하기를 결단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요셉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땅에 영원히 묻어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면, 결단하며 우리의 벧엘로 올라가는 하루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결단과 적용

 - 나에게 벧엘,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온전한 은혜를 주셨던 곳은 어디입니까? 그 때의 은혜를 기억해 봅시다. 

 - 지금 다시 나의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주님의 온전한 은혜를 깨닫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했던 그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결단하고 내려놔야 할 것들이 있다면 담대히 내려놓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인문학 큐티더 보기
신(神)의 일식(日蝕)(The Eclipse of God)
인문학 나눔

“‘신의 일식’ 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현실이다.  

그러나 일식은 태양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지 

태양 그 자체에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신은 지금도 

암흑의 벽 뒤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신이라는 

이름을 파기할 수는 있어도, 그 버려진 이름에 의해 나타나는 

신은 영원의 빛으로 살아 있다.  이러한 신의 일식은 인간이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박홍규 저(著) 「마르틴 부버」 (홍성사, 26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기독 메시지

구약성경 신명기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사람 뒤에 숨기신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신32:20)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사태를 신학적 용어로  ‘신의 부재’ 라고 합니다.  

니체는 더 극단적으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신의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신의 일식’ 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식은 태양이 달 뒤로 숨어서 어두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부재’와 ‘일식’은 다릅니다.   

‘부재’는 절망의 상태이고,  ‘일식’ 은 희망이 있습니다.  부버는  이 시대를 가리켜  

‘신이 죽은 시대’ 가 아니라  ‘신의 일식’ 시대라는 것입니다.  

일식으로 인해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태양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온갖 죄악으로 말미암아 마치 하나님이 없어 

보이는 세상 같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단지 인간의 죄악을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대화가 결여된 상태가  

‘숨은 하나님’ 의 의미입니다. “주님 어디 계십니까?” 하며 깊은 고난 속에 

부르짖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의 잠시 동안의 일식임을 믿습니다.  

 

 

그림 큐티더 보기
마가복음 12장 30절
고린도전서 15:1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도서 큐티더 보기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과 적대자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화를 자주 낼 일이 뭐가 그렇게 많습니까?

아내에게 쉽게 화를 내는 남편들,

 화를 멈추세요. 아내가 나만을 바라보고 결혼해서

 충성하고 사랑하며 섬기지 않습니까? 

남편만 보면 화를 내고 잔소리 하는 아내들이 계십니까? 

화를 멈추세요. 남편이 가정을 꾸리기 위해

 바깥에서 얼마나 수모를 받으며 일하는지 아십니까? 

남편을 좀 세워 주세요.

-김지철 목사의 주일설교 ‘분노와 인내의 경계선에서’에서-| 

 

함부로 화를 내는 것은 자존감이 깨지고 있고, 

우리의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증거입니다. 

의로운 분노라면 모르되 별것 아닌 것으로 

아내 탓, 남편 탓하고, 부모 탓, 자녀 탓하면 

우리의 삶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쉽게 성을 내시는 분이라면, 

그 앞에 누가 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화를 멈추고 사랑하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가정에서부터

삶의 현장으로 실천해 나가십시오.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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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월 11일 (목)
말씀 큐티더 보기
성경 본문 네 조상에게로(신 31:14-19)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죽을 기한이 가까왔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문 위에 머물렀더라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본문 해석

<회막>(14절)이란 여호와의 영광이 임재하는 곳이라 하여 흔히 <성막>(출 26:9)이라고 하고, 증거막(출 38:21), <여호와의 전>(출 23:19)이라고도 불린 천막으로 된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회막>(출 23:7, 39:32)이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회중이 이곳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중요한 문제를 공포하거나 결정할 때도 다 이곳에서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여호수아를 그 회막으로 부르신 것도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 곧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공식 임명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16절) 그러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오직 자기중심적으로만 사는 사람을 성경은 <멸망하는 짐승>(시 49:16-20)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본분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지혜로운 자는 죽음조차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전 12:13). 

 

성경은 흔히 이런 지혜로운 자의 죽음을 표현해 <열조에게로 돌아간다>, <조상들과 함께 눕는다>(창 15:15, 25:8, 35:29, 33, 민 20:24)고 합니다. 따라서 이제 코앞에 임종을 앞둔 모세에게는 이 말씀이 더없이 큰 위안과 소망이 됐을 겁니다. 간혹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모세에 대해 <과연 천국 갔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을 상징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모세는 천국 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울 것>이라고 하셨고, 주님이 주최하신 변화산 회동에도 엘리야와 함께 나타난 바 있으므로 그 점은 전혀 의심할 바가 없다 하겠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한 것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오한 계시적 의미가 있습니다. <므리바 사건>은 그저 표면적인 핑계일 뿐이고 보다 깊은 실체적 진실은 <율법으로는 천국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를 전달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의 가나안 입국을 막는 퍼포먼스를 연출하신 겁니다. 

결단과 적용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사건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본문 18절에서 하나님이 <내 얼굴을 숨기리라>하신 말씀의 의미는?

-어디서든 찾아 본문이 말씀하는 <회막>의 구조를 확인해 봅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일찍이 하나님이 죽음을 앞둔 모세와 모세의 후계인 여호수아를 함께 회막으로 부르신 사건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조상들과 함께 누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간 천국은 갔음을 확신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디 모세의 최후를 통해 말씀하시는 복음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인문학 큐티더 보기
프로는 잡담(雜談)부터 시작합니다
인문학 나눔

“그녀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중략)  

요컨대 이야기에 결론이 없다. 정리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에 반해, 남자들은 잡담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단계에서 

어떻게든 끝을 맺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일반론을 끌어내거나 혹은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라고 문제의 요점을 정리 한다. 

그러면 화제는 거기에서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결론이 나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론에 대하여 이론(異論)이나 반론을 제기 하면 그때부터는 

잡담이 아닌 토론이 되어 버린다(중략). 잡담은 어디까지나 잡담이지 토론이 아니다. 

결론은 어떻게 나든 상관없다. 

아무도 결론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이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다’가 중요한 포인트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하게 이야기를 정리 하려 하지 않는다.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결론을 내지 않는다. 마무리를 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끌어간다.

사이토 다카시 저(著) 장은주 역(譯)「잡담이 능력이다」 

(위즈덤하우스, 31-3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저자인 일본 메이지대학 문학부 교수 사이토 다카시는 잡담을 

무거운 사회 속에서 무거움을 가볍게 하는 하나의 능력으로 보았습니다. 

초보는 용건부터 전하고 프로는 잡담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무거운 사람이 하는 대화의 특징은 잡담과 유머가 없고 항상 선과 악을 나누는 

토론 속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잡담의 힘은 가벼움에 있습니다.  

갑옷을 벗는 무장해제에 있습니다. 

잡담은 무거운 이 세상 속에서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 줍니다. 

건강한(?) 잡담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돈독해 질 수도 있고,  

조직의 분위기가 좋아져 업무의 능률이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미국 언론보도에 의하면 동료들과 잡담을 많이 나누고 유대관계가 

좋은 직원일수록 생산성이 높다고 하였습니다.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가기는 어렵습니다. 

가벼움에서 서서히 무거움으로 가는 것이 소통법입니다. 

기독 메시지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21:6)

 

 

그림 큐티더 보기
욥기 33장 26절
고린도전서 15:10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He prays to God and finds favor with him, 

he sees God's face and shouts for joy; he is restored by God to his righteous state.

도서 큐티더 보기
천국

생각해 보면 우리의 자존심은 ‘알량한 자존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 내 한 몸 사리는 일에 열심을 내고, 

나를 돌보고 챙기는 데만 바쁩니다. 

알량한 자존심에 마구 휘둘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반응과 대우에 섭섭하고 상처를 받는다면, 

우월감과 열등감에 감정이 들쭉날쭉한다면, 

아직 자존심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존심을 지켜야 나도 살고 남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죽여야 천국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훈의 [예수께로 가는 길] 중에서-

 

주님 따라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입니다. 

그 중에서도 내 자존심입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거나 

불쾌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의 우월감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나를 지키는 자존심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 우리가 매일 같이 실천해야 하는 믿음은, 

날마다 십자가에 나의 자아는 죽고 예수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