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미 6:6-11) 외 2

鶴山 徐 仁 2017. 6. 2. 21:02
6월 2일 (금)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미 6:6-11)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9.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
10.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11.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하나님이 바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뭘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할 때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기대하실까요? 흔히 우리는 <일 년된 송아지>를 바치고,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7절)을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헌금이나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내 허물을 다 사하시고 내 영혼의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 번제물이나 제물을 기뻐하시지 않고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8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미가 시대는 송아지와 숫양과 기름은 드리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간곡히 바라시는 정의와 인자와 겸손은 철저히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얼 원하시고 바라시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느냐>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23)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산 제물이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우리의 몸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게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요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 제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 즉 내 몸으로 정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어떤 것일까요?
-바울이 말씀한 <산 제사>, <영적 예배>(롬 12:1-2)란 어떤 것일까요?
-<정의>, <인자>, <사랑>, <겸손> 등이 어째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참된 제물이 될까요?

 
  
  
 

주님, 저희들 맹목적인 예배나 제물을 드릴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사와 제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송아지나 숫양이나 강물 같이 많은 기름보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바라신다고 하셨사오니 온몸과 삶으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를 실천함으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게 참 예배요 산 제사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적 얘배임을 깊이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이 땅에 남겨진 참 생명의 흔적

WEC(국제복음선교회)의 본부가 영국의 런던에 있다.
그 본부의 지하실에 가면 수십 개가 넘는 가방들이
정리된 채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임기를 마친 뒤
귀국 길에 찾아가겠노라고 남겨둔 가방들이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님들의 가방이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남아있는 가방들
- 바로 그 가방들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위한,
자기희생, 자기 헌신의 표적이 아닐 수 없다.
그 가방의 주인들이 어느 곳에서 생을 마감했건,
그 분들이야말로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 주기에 합당한 참된 십자가의 증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남긴 가방은 단순한 가방이 아니다.
그것은 이 땅에 남겨진 참 생명의 흔적인 것이다.
-안두익 목사의 ‘어떤 삶이 행복한 삶입니까?’에서-

 
   
 
  
 


우리의 인생이란 결국 삶이란 하나의 가방으로 남게 됩니다.
지금껏 우리가 꾸려온 가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남을 살리는 일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만 다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피어납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기억됩니다.
우리는 생일을 기억하지만 실상은 죽는 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죽느냐가 그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절정입니다.

 
   
    
 

고린도후서 10: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For it is not the one who commends himself who is approved, but the one whom the Lord commends.

 
    
 
  
 FIM국제선교회 유해석 선교사
 5분칼럼(유해석선교사)
  
  



6월 1일 (목)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미 6:1-5)
  
 

1.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2.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5.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미가 선지자가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변론을 경청하라고 외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1절). <...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2절).

198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의 작품 <하나님에 대한 심판>(The Trial of God)도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고 심문하며 그분의 변론을 듣는 것으로 인간의 깊은 고뇌를 그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심판한다기보다 사실은 자신의 신앙을 심판대 위에 올려놨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때로 죽음처럼 밀려오는 절망의 먹구름 앞에서 우리는 과연 신앙적으로 어떻게 해야 옳은지를 놓고 부단히 자신을 저울질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심판은 언제나 자신의 믿음에 대한 심판이 되기 마련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오직 형편이나 사정이 괜찮을 때만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그것은 한낱 바람만 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연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돌아올지도 모를 자리에는 결코 함께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결코 궁극적인 만남의 진실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운 변론을 들어 보십시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3절). 하나님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좋다가도 사정이 조금만 나빠지면 금새 돌아서는 그런 가벼운 사랑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부단히 인간의 시험대에 세우시고 <시련의 자리에서도 결코 배반당하지 않을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어 하십니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다>(4절)고 하시며 우리가 그분의 신실한 변호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변론을 들으시며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길을 따르다 불리해지는 것 같다하여 진리와 정의, 그리고 양심을 저버리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는 힘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에서 움튼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변론의 핵심을 요약해 보십시오.
-4절에 나오는 <속량>의 의미를 적어 보십시오.
-<공의로우신 여호와>(5절)에 대해 말씀해 보십시오.

 
  
  
 

주님, 저희는 입이 백 개여도 할 말이 없사오나 하나님은 하실 말씀이 많으십니다. 오늘 법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또 자신의 속량하심과 행하신 공의로운 일들에 대해 하신 변론을 듣고 다시 한 번 자신들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저희에게 베푸신 것은 은혜 아닌 것, 축복 아닌 것이 없사오나 저희는 감사와 여호와 경외보다 늘 배은망덕과 완고한 고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했습니다. 변론하시는 여호와 앞에서 더욱 깊이 자신을 성찰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통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칭송하는 것에 대해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가?
다시 말하면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남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고, 남이 얻지 못한 승리를 얻을 때
사람들은 영광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광, 성도의 영광, 하늘의 영광이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이루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안두익 목사의 ‘어떤 삶이 행복한 삶입니까?’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일들은
세상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각오가 없이는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What, then, shall we say in response to this? 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서울이태원교회 지성호 목사
 믿음의 시간 2 (마가복음 9장)
  
  




5월 31일 (수)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겠습니까 - 창세기 26장 1~10절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오늘 이삭이 겪은 일을 보면서, 떠오르는 일이 없으십니까? 오늘 이삭과 리브가에게 일어난 사건은 바로 창세기 20장에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일과 매우 흡사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블레셋 지역의 그랄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삭은 그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 땅에 거합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 때문에 자신을 해할 것이 두려워서 이삭은 리브가를 자신의 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비멜렉은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매 사이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서 아비멜렉은 이삭을 데려다가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라고 훈계합니다. 왜냐하면 아비멜렉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한 것을 믿고, 사라를 데려다가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고 했던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벌을 받을 뻔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말합니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느니라”

아직 그랄 지역의 어떤 사람도 이삭의 아내 리브가로 인해서 죄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아비멜렉은 누구든지 이삭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왜 이삭은 이렇게 거짓말 하는 일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삭이 성장하면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필요에 따라서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창세기 20장은 이삭이 태어나기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삭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아브라함이 했던 일들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똑같은 죄를 범하는 아브라함과 이삭... 이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자녀가 보고 자란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필요에 의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녀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따라 할지를 떨리는 마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내가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아니, 당신이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아주 작은 것에 민감하게 자녀를 교육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누군가가 창으로 가슴을 푸욱 찌를 때

제가 전에 섬기던 목사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말씀이 있다.
목사는 누군가가 창으로 가슴을 푸욱 찌를 때
그때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억울하다고 변명하거나 아프고 힘들다고
그 창을 뽑아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 창을 부여잡고 십자가를 생각하며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 창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녹여내면
결국 하나님께서 문제를 풀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목사가 승리하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내 모습을 보면 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힘들어도 나도 모르게 원망이 나온다.
속이 상해서 잠 못 이루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십자가 앞에 온전히 죽지 못하고
내 욕심이, 내 뜻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안두익 목사의 ‘어떤 삶이 행복한 삶입니까’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고백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서 버리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존재방식입니다.
우리의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였는가?’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고, 스스로 은사를 가졌다 할지라도
아직도 내 안에 혈기가 죽지 않고,
내 고집과 내 주장이 살아있다면 더 엎드려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주신장로교회 황요한 목사
 반 죽은채로 인생을 사는 것은 산 송장입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