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들개 같이 타조 같이

鶴山 徐 仁 2017. 4. 29. 20:40
4월 29일 (토)
들개 같이 타조 같이 (미 1:8-16)
  
 

8.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9.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10.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
11. 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12.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13.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14.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15. 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가 크게 벗어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라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8절).
어떤 사람이 맨 발에 옷도 걸치지 않고 큰소리로 서럽게 울며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닌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당연히 무슨 큰 슬픔을 당했나보다, 그래서 넋이 나갔나보다 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미가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백성들에게 그 말씀을 전하면서 결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고자세로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슬퍼하며 애통해 하며 무한한 연민으로 증거 했습니다. 사랑과 진실로 진정성 있게 전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보다 훨씬 뒤에 등장한 예레미야도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고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을 증거하며 울었습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렘 8:18). 주님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에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눅 13:34).

그렇습니다. 눈물과 애통과 사랑이 없는 책망은 그 내용이 아무리 진리고 사실이라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가는 동족의 허물과 죄악이 이방인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10절). 이방인들,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허물이나 심판을 보면 신이나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실수하고 과오를 범해 처벌을 당하면 세상 사람들은 즐거워하며 그걸 열심히 확대 재생산하여 교회를 비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힙니다. <여호와여 ...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시 30:1). 내가 처신을 바르게 하며 더욱 경건하게 살아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이 미가서를 통해 거듭 확인 할 일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왜 <들개 같이 타조 같이 애곡하고 애통하리라>고 합니까?
-미가 선지자 못지않게 늘 울며 예언했던 선지자는?
-미가 선지자가 왜 예루살렘의 아픔을 <가드에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까?

 
  
  
 

주님, 미가 선지자는 겸허했고 진솔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유다와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결코 거만하게 굴지 않고 애통하고 애곡하며, 벗은 몸으로 예언했습니다. 그만큼 힘들어 했고, 슬퍼했습니다. 들개 같이 타조 같이 애통했다는 말로써 원색적으로 울었다고 했습니다. 저희도 미가 선지자에게서 진실한 감정과 하나님 백성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을 배우고 본받게 해주시옵소서.

 
  
   
 

오직 시련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는

지금, 여러분에게 어려운 일이 있는가?
그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다보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도 감사했다.
그는 풍랑 속에서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쳤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는 그 풍랑 이후에 올 축복을 바라다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참으로 전향적인 시각이고 믿음이다.
시련 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오직 시련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는
축복을 볼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시련은 위장된 축복이다
-김의환 박사의 ‘풍랑 속에서도 감사’에서-

 
   
 
  
 


. 우리는 위장된 축복의 실체를
전향적인 시각으로 바라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었다면 우리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쯤 세상과 벗하여 주님과 원수 된 삶을
사는 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의 풍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흔드시고
우리를 일깨우심으로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병도, 고통도, 물질적인 고난도
모두 위장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드리십시오
고난 이후의 축복을 예비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시편 145: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The LORD is near to all who call on him, to all who call on him in truth.

 
    
 
  
 서울이태원교회 지성호 목사
 지혜의 삶48_이사야 53장 십자가의 지혜
  
  


4월 28일 (금)
야곱의 허물 이스라엘의 죄 (미 1:2-7)
  
 

2.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3.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4.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5.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6.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를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내며
7.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2절)이라며 심판을 선포합니다. <...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4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5절)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미가>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냐>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같은 분은 다시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성과 유일성을 강조하는 <미가> 선지자의 이름은 다분히 상징적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와 이스라엘,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에 탐닉하며 영적 행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7절)고 하셨습니다. 미가 시대는 이렇게 우상숭배를 드러내놓고 행하는 종교적 음행과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객 같은 약자들을 박대하고 착취하고 폭압하는 사회적 죄악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 변방 모레셋 출신의 미가 선지자가 누구보다 더 진지하고 더 절실하게 분노하고 고발하고 예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B.C. 721년 결국 앗수르 왕 살만에셀과 사르곤이 쳐들어와 사마리아가 폐허더미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열 지파가 온 세계로 흩어지고 사마리아는 아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기생의 값>(7절)이란 바알 신전의 창녀들이 행음하여 번 돈을 뜻하는 것으로 우상과 목상을 깨뜨리므로 그 모든 것을 다 허무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악을 응징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높이 찬양합시다.

 
  
  
 

-본문이 지적하는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꼽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어떻게 응징하시고 심판하겠다고 하십니까?
-7절이 말씀하는 <음행의 값>, <기생의 값>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주님, 미가 시대 남북 왕조의 중심이었던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는 음행의 값, 기생의 값으로 세운 산당과 목상 같은 우상들이 즐비했고, 백성들은 거기서 우상을 숭배하며 저마다 깊은 영적 간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미가 선지자를 통해 <산들이 높고 골짜기가 갈라지고 비탈이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라며 무서운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이 다 불살라> 질 것이라며 예고하셨습니다. 저희들 과거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상을 기억하며 더욱 바르게 더욱 신실하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바라며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한 결 같이 하나님에게 붙어있기를 원하신다.
어떤 이유와 구실과 동기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적인 삶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랄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랐다.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바램은 환경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바램이 아니라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바램이었고,
환경이 그들을 하나님을 바라며 살도록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고정되고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남준 목사의 ‘도움과 방패되신 하나님’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며 산다고 하는 것은
삶이 기쁨이나 슬픔이나 즐거움이나 고통이나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두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자신 속에,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과 모여 살아가는 이 세상에 이루어지고,
세상의 주권도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그런 세상을 갈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사 간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입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본 받으며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with a mighty hand and outstretched arm; His love endures forever.

 
    
 
  
 주신장로교회 황요한 목사
 십자가를 지려고 하면 오히려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갑니다(1)
  
  


'Faith - Hy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이 넘치는 가정   (0) 2017.05.01
HOW GREAT THOU ART-ANNE MURRAY +  (0) 2017.04.29
심판과 영광 외 1  (0) 2017.04.27
목마른 인생아!  (0) 2017.04.25
요나의 분노 외 3  (0) 2017.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