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록의 주인공이 비양도라는 학설이 지금까지 유력하다. 이 기록에 근거해 비양도는 제주도에서 가장 어린 섬, 비양봉은 가장 어린 오름으로 불렸다. 비양봉은 서귀포시 예래동의 군산과 함께 분화 사실이 문자로 기록된 두 개 오름 중 하나다. 군산은 목종 7년(1007년) 폭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2010년 비양도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지질을 다시 조사했더니 비양도를 구성하는 화산암이 최소 2만7000년 전에 형성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김용하 지질공원 해설사의 설명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비양도는 2만7000∼3만2000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측정됩니다. 섬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것도 비양도가 천 년 전에 솟았다는 주장과 배치됩니다. 신석기시대는 최소 5000년 전입니다. 1700년대에 제작된 제주도 지도를 보면 비양도와 차귀도 사이에 섬 하나가 있습니다. ‘서산’이라는 이름까지 적혀 있지요. 지도의 표기가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이 지도가 맞다면 천 년 전에 분화한 섬은 서산일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은 바다에 잠겨 볼 수 없는 미지의 섬 말입니다.”
해안을 따라 걷다 보면 비양도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증거를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증거가 ‘송이’라는 화산쇄설물이다. 붉은 색의 작은 자갈처럼 생긴 송이는 제주도 중산간 오름에서 흔히 발견되는 화산암 알갱이다. 제주 오름 중에는 ‘붉은오름’이 몇 개 되는데, 하나같이 송이가 많은 오름이다. 송이의 붉은 색이 오름 이름에 반영된 것이다. 송이는 인체에 좋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이후 건축 재료는 물론이고 화장품 재료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함부로 채취하면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송이는 육지에서 분화한 화산이 주로 생성하는 쇄설물이다. ‘수성화산’이라고 불리는, 바다에서 솟은 화산은 좀처럼 송이를 낳지 못한다. 용암 대부분이 바다에서 식어 화산재가 되기 때문이다. 비양도가 천 년 전에 바다에서 솟았다면 해안에서 이렇게 많은 송이가 발견될 수 없다. 비양도 맑은 바다를 들여다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비양도 바다는 물결에 따라 붉게 흔들린다. 바닥에 송이가 죄 깔려 있어서이다.
10t이 넘는 거대한 화산탄도 중요한 증거 중 하나다. 화산탄은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긴 화산암 덩어리를 말한다. 지름이 64㎜가 넘는 둥근 모양의 화산쇄설물을 화산탄이라고 하는데, 화산탄이 놓인 모습을 보고 지질학자는 화산탄이 날아온 방향을 판단한다고 한다. 그런데 비양도 북서쪽 해안에서 놓인 이 10t짜리 화산탄은 동쪽 제주도가 아니라 남쪽 바다에서 날아온 것이란다. 지금 비양도의 남쪽 바다에는 바다 말고 아무것도 없다. 다만 1700년 전 지도에서 서산이라고 표시했던 섬이 있었을 따름이다.
비양도가 천 년을 묵었든, 만 년을 묵었든 여행자에게는 상관없는 일일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비양도에 들면 꼭 해안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티 없이 맑은 바다를 끼고 기이한 생김새의 바위가 경쟁하듯이 늘어서 있다. 이를테면 천연기념물 제439호로 지정된 용암 바위는 두고 두고 기억에 남는다. 별명이 있다. ‘애기 업은 돌’. 이름만 들어도 생김새가 짐작이 된다. 용암이 폭발하면서 내부에 공간이 생긴 굴뚝형 화산지형이라는데, 영락없이 아기를 업은 엄마의 모습이다. 코끼리바위도 있다. 코끼리바위는 울릉도가 유명하지만, 비양도의 코끼리바위도 제법 잘 생겼다. 비양도 북쪽 해안에는 아예 희한한 모양의 바위를 일렬로 세워놓은 수석거리가 조성돼 있다.
‘펄랑’이라는 습지에는 바닷물이 들락거린다. 물이 들어오면 잔잔한 호수처럼 비양봉을 제 물빛에 담아낸다. 습지 둘레를 따라 조성된 탐방로를 걷다 보면 다양한 습지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마침 계절이 맞아서 ‘황근’이라는 염생식물의 꽃을 볼 수 있었다. 달맞이꽃처럼 노란색이었는데, 귀한 꽃이라고 했다. 펄랑이 끝나는 지점에 압개포구가 있는 마을이 있고, 포구마을의 끝에서 한림항으로 들어가는 배가 뜬다. 뭍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바라본 비양도는 영락없는 비양봉이었다.
● 여행정보=한림항 도선대합실에서 하루 3번(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비양도 들어가는 배가 뜬다. 비양도에서는 오전 9시16분, 낮 12시 16분, 오후 3시 16분 한림항으로 가는 배가 뜬다. 배 시간은 15분 정도다. 편도 요금 어른 3000원. 비양도 선착장 근처에 비양도 맛집으로 소문난 ‘호돌이식당’이 있다. 보말죽이 특히 유명하다. .
글ㆍ사진=손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