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큐티 모음

鶴山 徐 仁 2015. 2. 9. 16:14



타협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더 세상의 박해를 유발하는 것은 없다. 복음은 인간의 무거운 지와 죄책,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십자가의 필요성, 값없이 주시는 영생, 영원한 죽음의 위험 같은 달갑지 않은 교리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들은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박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고 그런 진리에 침묵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존 스토트의 [내가 사랑하는 교회에게] 중에서-

우리 안에 복음이 있으면 세상과 부딪힙니다. 복음이 우리에 죄에 대해 이야기 하기에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죄의 발가벗음이 없으면 우리는 잠시 잠깐의 기쁨에 속게 됩니다. 영생의 길로 안내하는 복음의 진리를 들어야만 우리는 다시 삽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죄의 짐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복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면 기쁨이 넘칩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요한복음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I am the bread of life.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너희가 내 것을 도둑질하였도다 - 말 3:7-12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주님은 회개하는 자에게는 정제하시고 정련하사 순도 높은 정금이 되게 하시는 불이요 깨끗하게 하시고 표백하시는 잿물이시지만 회개하지 않고 버티거나 더욱 강퍅하게 구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십니다. 그래서 계속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돌아오라>는 것은 곧 회개를 뜻합니다. 회개는 앉아서 뉘우치고 후회하고, 땅을 치는 심정적, 정서적인 반성이 아니고 벌떡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오는 결단을 가리킵니다. 탕자의 귀향이 바로 회개입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7절).

우리가 언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8절).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향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시자 그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까> 즉 회개의 구체적인 방법을 물은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십일조와 봉헌물>부터 회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원색적이고도 구체적인 표현으로 지적하셨음에도 당시의 유다 백성의 반응을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하며 되레 따지고 들었습니다. 말라기서의 전반적인 화법이 격하고 노골적이긴 하지만 유다 백성의 이 십일조와 헌물에 관한 고발은 더욱 격렬합니다. 그만큼 그들의 행위가 기만적이고 하나님에 대해 모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가 왜 중요할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를 해묵은 구약시대의 율법 조항으로 치부하며 폐기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 이전에 세상 만물과 나의 모든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실천적으로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십일조란 내 소득의 십의 십, 내 소유의 십의 십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나는 다만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임을 십의 십 중 십의 일을 떼 바치며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결단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안 바치는 행위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가 주인 행세를 하며 그 모든 소유가 제 것이라고 우기는 도둑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저주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9절).
마땅히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리므로 자기의 소유물에 대한 진정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인시켜 드려야 했음에도 말라기 시대의 유다는 전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기요 도둑질이라며 책망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던 것인데 문제는 그런 현상이 온 나라에 만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희가 저주를 받았다>고도 하십니다. 십일조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진부한 율법조항이 아닙니다. 시효 지난 아득한 구약시대의 낡은 규례가 아닙니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 원리와 정신이 유효한 우리 신앙의 기본기입니다. 십일조는 안한 만큼 복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니라 저주를 면치 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것을 도둑질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는 유다 백성을 향해 <너희가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나를 시험해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절).
원래 하나님은 시험하면 안 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 6:16). 하나님 시험은 이미 하나님 불신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이 다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서는 십일조와 관련해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시험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오죽하면 <시험하지 말라> 하신 분이 십일조 만큼은 예외적으로 <시험하여 보라>고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다 복 받기를 바라면서도,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길 기대하면서도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집 창고에 들이는 일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하나님을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 <메뚜기를 금하여 토지 소산을 지키시고 포도나무의 낙과를 막아 소출이 풍성하게 하시고 땅이 아름다워지게 하사 이방인들조차 너희를 복되다>(11-12절)하신 대로 세상 사람들까지도 다 인정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되실 겁니다. 올해는 꼭 <온전한 십일조>를 결단하셔서 당신의 삶이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워지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글쓴이 : 전기철 서울신학대학,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보스톤 조직신학 석사(S.T.M)/연세대학교 박사학위(Ph.D)
강남새사람교회 담임목사

 

 



십자가로 인한 회복


십자가 없는 신학, 십자가 없는 교회, 반성과 회개가 없는 삶에서 뛰어나와야 합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과 능력이 없는 복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 교회는 삽니다. 이 망가지고 무너져 일그러진 그리스도의 몸, 한국 교회에 다시 한 번 성령의 바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푸른 복음의 계절이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되살아나야 합니다.
-송태근의 [네가 어디 있느냐] 중에서-

십자가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가 교회와 성도의 삶속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비난과 비판을 넘어 반성과 회개를 해야 합니다. 아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새로움도 없습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십자가로부터 시작됩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Remain in me, and I will remain in you. No branch can bear fruit by itself; it must remain in the vine. Neither can you bear fruit unless you remain in me.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세상의 소금과 빛 - 마태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한 사람이 괜찮은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쉽지 않은 것처럼, 신앙인도 그렇습니다. 많은 교육과 훈련을 받고 시행착오를 거쳐 올바른 사람으로 세워져 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라 하십니다(13,14). 여기에서 세상은 교회가 아닌 가정과 사회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록 죄악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독생자까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이 있습니다(요3:16). 특히 성도의 사명은 죄악되고 부패한 세상이기에 소금과 빛과 같은 사명으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적은 양의 소금과 불빛이라도 사명을 감당하며 산다면, 적은 무리여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눅12:32). 성도의 사명은 직장에서, 가정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괜찮은데 세상에서 약한 것이 우리들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소금처럼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13).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하고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성도와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만히 두면 썩고 파리가 들끊게 됩니다. 가정도 학원도 사회도 그대로 두면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없는 곳에는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가만히 있으면 세상은 희망이 없어요. 믿는 사람들이 조용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음식은 좋은 소금으로 좋은 맛을 내듯이, 좋은 성도와 교회들이 많아짐으로 사회는 변화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오직 예수 복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내가 먼저 경건한 신앙인으로 예수 복음으로,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무장한 성도는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소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소금의 특성처럼 자신이 녹아지는 자기부인을 통해서 조용히 자기 역할을 감당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14). 세상이 정말 어두워서가 아니라, 참된 빛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성도는 산위의 동네처럼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도록 드러나게 비추어야 합니다(14-15). 이는 남에게 본이 되고 덕을 끼치고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6). 자발적인 불편함을 선택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옷입고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적용]
- 나는 세상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 점검해 봅시다.
- 소금의 기능을 정리해 보고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역할을 감당키 위해 다짐해 봅시다.
- 빛의 기능을 정리해 보고 세상에서 빛된 사명을 감당키 위해 구체적으로 다짐해 봅시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저희를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어둡고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역할을 잘 감당하길 원합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하옵소서. 좀 더 희생하고 손해보는 삶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만을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글쓴이 : 윤영대 총신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실천신학 박사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행복누리교회(서울 잠실 소재) 담임목사

 

 



약함의 자리


우리의 개인적 시험이든,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집단적으로 경험하는 시험이든, 하나님의 법정에 나아가는 우리의 상황은 욥의 그것보다 결코 낫지 못하다. 우리가 가족들의 재난을 대면하고 있든, 수많은 동료 시민들과 함께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든, 우리는 결국 욥보다 낫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 누구에게도 건강과 부와 행복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사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하는 자는 또한 그와 더불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을 가르치셨다.
-마이클 호튼의 [약함의 자리] 중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아니,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축복이 됩니다. 고난 속에 축복은 더욱 빛이 납니다. 고난 없는 삶을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고난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신앙은 고난 없이 빛이 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고난을 받을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빛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상주시기에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는 도망가지 말아야 합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슬픔에서 기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옮겨 가는 첫 단계는 당신의 상실을 직시하고 애통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당신의 고난을 더 큰 세상의 고난과 연결시키고, 당신의 상실을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 함께 고생하며 새로운 세계가 계시되기를 탄식하고 고대하는 더 큰 인류의 일부라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은 성경을 통하여 임재 하신다. 바로 그 인내와 회복의 임재가 슬픔을 기쁨으로, 애통을 춤으로 바꾸어 준다.
-헨리 나우웬의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중에서-

우리의 삶이 기쁨이 되려면 상실 자체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상실을 인정하되,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으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움직여 가는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때 우리는 상실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봅니다. 지금 당신의 인생을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있다면 당신은 상실밖에 그려진 하나님의 세계를 본 자입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눈물을 멈추라 - 렘 31:15-20
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19.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15절).
예레미야 당시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예루살렘 인근 도시인 라마가 바벨론 포로들의 집결지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여인들이 포로로 잡혀 곧 바벨론으로 후송될 아들들을 바라보며 통곡했습니다. 각각 이스라엘의 남북 왕국을 대표하는 베냐민과 에브라임 지파는 다 라헬의 후손들입니다. 따라서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며 라헬이 애곡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처절하게 울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하나님이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감추라>(16절)고 하셨습니다.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7절).
환난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끝이 있을 것이라는 것과 그 끝은 복된 평강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는 언제나 소망에 삽니다. 우리에게는 궁극적인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현실이 아무리 고되고 지금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처절해도 우리가 결코 포기하거나 체념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소망 때문입니다. 낙심되고 절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소망의 끈만 놓지 않는다면 다시 재기할 수 있습니다.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고 먼 나라로 잡혀갔던 자식들이 다 되돌아 오고 상실한 많은 것들을 다시 회복하리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불쌍히 여기리라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0절).
부모는 자식이 탕자일수록, 못나고 어리석고 엎어지고 자빠질수록 안타까워하며 불쌍히 여깁니다. 하나님도 에브라임에 대해, 즉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해 그렇게 애끓듯 슬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못나게 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하나님께는 소중한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13절). 하나님이 우리를 어머니처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한 우리의 운명은 절대 불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열악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절). <내가 그를 책망할 때마다 깊이 생각한다>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게 책망이든 징계든 깊이 생각하시며 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중하심에 다시 한 번 진심 어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날마다 순간마다 더욱 순종하며 살기를 결단하십시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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