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교훈-세월호 침몰 관련 名文(기사 證言 논평) 모음
이동욱 외
세월호 침몰과 삼풍 붕괴의 닮은 점-돈과 생명을 바꾸다!
돈벌이를 위하여 過積(과적)과 增築(증축)으로 안전을 희생시킨 점이다.
趙甲濟
"안전 없는 안보 없고 안보 없는 안전 없다. 안전과 안보를 연결시켜주는 민방위 훈련을 대충대충하면 일단 有事時 세월호 침몰 때의 선원들처럼 행동하게 된다."
필자는 언론이 암초 충돌설 쪽으로 기울고 있던 지난 4월16일 밤 세월호 침몰은 '화물 積載(적재)의 문제'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chogabje.com의 머리 기사로 썼다. 언론이 急(급)변침을 主원인으로 삼던 시기엔 '평온한 바다에서 큰 배가 急변침만으로 전복된다면 海運(해운)이 성립할 수 없다'고 썼다.
세월호 침몰은 增築(증축)과 화물 過積(과적)과 묶음 부실에 따른 船體(선체)의 불안정성이 流速(유속)이 빠른 水路(수로)에서 變針(변침)과 결합되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네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화물 문제이다. 배가 급한 각도로 우회전하자 부실-불균형하게 실렸던 화물들이 왼쪽으로 쏠리고 이탈하면서 배를 순식간에 40도나 기울게 하여 復元力(복원력)을 상실, 전복되었던 것이다.
화물 부실 문제를 제기한 후 선장, 導船士(도선사) 몇 분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언론이 잘못 짚고 있는 것을 趙 대표가 지적해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왔다. 이들은 匿名(익명)을 전제로 연안해운의 문제들을 털어놓았는데, 그 내용은 최근 언론의 續報(속보)로 밝혀진 대로이다.
화물을 과적하고 부실하게 실은 이유는 돈벌이 때문이다. 많이, 빨리 실어야 船社(선사)가 돈을 많이 번다. 이런 부정을 감독해야 할 기관이 눈감아 준 이유는 船社와 유착되었든지, 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970년 12월에 있었던 제주~부산항 노선의 남영호 침몰 사건도 過積과 風浪(풍랑)이 겹쳐서 일어났다. 320여 명이 죽었다. 1993년의 서해페리호 사건도 과적과 풍랑 속의 무리한 출항이 원인이었다. 290여 명이 죽었다. 1995년의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도 賣場(매장) 면적을 늘리려는 무리한 구조변경과 增設(증설)이 설계치 이상의 무게 압력을 기둥과 바닥에 가해 순간적으로 무너졌던 것이다. 500여 명이 죽었다. 사고 당일, 직원들이 백화점 곳곳에서 균열과 진동 등 이상 현상을 발견, 대피명령을 내려달라고 건의까지 했으나 경영진은 '돈벌이'를 우선시켰다.
세월호 침몰과 삼풍 백화점 붕괴의 공통점이 많은데, 첫째는 전복과 붕괴가 晴天霹靂(청천벽력)처럼 순간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침몰과 붕괴의 요인들이 장기간에 걸쳐 안으로 쌓이다가 어떤 계기로 한꺼번에 서로 연결되어 相乘(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폭발한 셈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돈벌이를 위하여 규정을 위반한 것이다. 돈을 위하여 안전, 즉 생명을 희생한 것이다.
시간을 아끼려고 규정을 위반하였다가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다. 서해 페리호 사건에서 선장이, 출항하면 안 되는 풍랑 조건에서 항해한 것, 1983년 대한항공 007편 점보기가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에서 관성항법장치를 끄고 비행에 나섰다가 소련 영공으로 들어가 격추되어 269명이 죽은 사건, 그리고 최근 아시아나 여객기가 엔진 고장 신호를 무시하고 비행을 강행한 사례들은 출발을 포기하거나 귀환하였어야 할 조건에서 시간을 안전보다 우선시킨 경우이다.
택시가 거리-속도 竝算制(병산제)를 실시한 이후 사고가 줄어든 이유도 안전과 돈벌이와 시간 사이의 함수 관계를 증명한다. 돈벌이와 시간절약을 안전보다 우선시키는 구조적 생리를 제거하는 것인 근원적 대책이다.
자본주의를 법치주의로 통제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하여 환경과 안전까지 희생시키는 사태를 막지 못한다. 安全(안전)이나 安保(안보)와 관련된 정부 규제는 풀 것이 아니라 더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인간 생명이나 공동체의 생존과 관련된 事案(사안)이기 때문이다. 관료들이 과도한 통제로 시장경제의 力動性(역동성)을 약화시켜선 안 되지만 돈벌이 논리에 넘어가 안전을 희생해서도 안 된다. 每事(매사) 균형을 잡는 것이 핵심이다. 배도 균형이 무너질 때 침몰한다.
그런데 가장 큰 安全사고는 침몰이나 붕괴가 아니다. 安保가 무너지는 것이다. 안전 사고로는 많아야 수백 명이 죽지만 安保 사고는 수만, 수십만, 수백만을 죽인다. 안전 없는 안보 없고 안보 없는 안전 없다. 안전과 안보를 연결시켜주는 민방위 훈련을 대충대충하면 일단 有事時(유사시) 세월호 침몰 때의 선원들처럼 행동하게 된다.
남영호, 서해페리호, 삼풍 붕괴 같은 類型(유형)의 사건이 또 일어난 이유 중 하나는 책임자 처벌이나 비판에 치중하다가 제도적 개선책이 제대로 마련되지도 지켜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人名輕視(인명경시)의 慣行(관행)이 바뀌지 않으면 재발한다. 이에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 세월호 침몰도 모든 책임을 船長(선장)과 社主(사주) 두 사람에게만 씌우고 "우리는 결백하다"는 식으로 손을 털면 이 비극의 교훈은 잊혀질 것이다. 선동 보도가 나쁜 것은 인간의 理性(이성)뿐 아니라 기억력을 감퇴시키기 때문이다. 감성적 흥분은 빨리 잊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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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은, 26일, 인천 항운노조 소속 관계자의 말을 인용, <세월호는 불법적으로 여객선 갑판에 60여 개의 컨테이너를 적재했다>고 주장하였다. 차량·화물 적재방법에 따르면 화물은 선박 화물칸을 제외한 갑판이나 통로에는 안전관리를 위해 積載를 전면 금지하고 있는데 세월호는 갑판에 컨테이너를 실었고, 화물을 단단히 묶는 固縛(고박)작업마저 부실하게 하여 침몰의 한 원인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세월호는 국제규격(ISO)에 맞지 않는 8ft(2.4384m)와 10ft(6.096m)의 컨테이너를 선적했다. 인천항에서는 20ft와 40ft짜리가 사용된다. 최근까지 컨테이너 고박작업 등을 했던 B(39)씨는 “소형 컨테이너는 운반 차량에 싣기 좋아 제주도로 들어가는 화물에만 쓰이는 특수한 형태”라며 “정해진 규격의 컨테이너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대로 고정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제규격의 컨테이너는 일반적으로 6군데의 고박을 해야 하지만 세월호의 컨테이너는 정식 규격이 아니기 때문에 4군데만 고박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세월호의 컨테이너 고박작업을 했던 C(47)씨는 “바닥에 컨테이너를 고정하는 장비는 어느 정도 있었지만 이를 2단으로 쌓을 때 묶을 쇠사슬은 없었다. 이에 임시방편으로 천으로 만든 밧줄 등으로 묶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고 한다.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관계자도 “청해진해운이 돈벌이가 되는 화물에 치중하면서 도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를 이용한 바 있는 한 화물차 운전자는 “보통 화물차량을 통째로 싣는 데 중량을 잰다거나 하는 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뉴스1은, 사고 당일 세월호에는 승용차 124대와 1t(적재 가능 중량 기준) 화물차량 22대, 2.5t 이상 화물차량 34대 등 차량 180대와 화물 1157t 등 총 3608t의 화물과 차량이 적재됐는데 출항보고서에는 없었던 컨테이너가 CCTV 화면에 포착됐고, 차량은 한도보다 30대를 초과한 것이 밝혀졌다고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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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精髓(정수)를 보여준 뉴욕타임스 심층취재] 그 순간 세월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세월호의 마지막 순간과 관련된 증언이 승무원과 생존자, 그리고 40여 분 간의 긴급 구난 통신 내용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번역/金泌材
차가운 바다 속에 잠긴 세월호 관련 이미지 가운데 오렌지 색깔의 구명조끼를 몸에 두른 이준석 선장의 모습을 보고 분노하지 않은 한국인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수백여 명의 승객을 여객선 내부에 두고, 반쯤 가라앉은 배에서 구조 보트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해양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이준석(69세) 선장은 수많은 승객들을 내버려 둔 채 배를 포기한 이유에 대해 여태껏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세월호의 마지막 순간과 관련된 증언이 승무원과 생존자, 그리고 40여 분 간의 긴급 구난 통신 내용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당시 선장과 승무원들은 船內(선내) 방송 시스템 고장 등을 포함한 기계고장, 이에 따른 힘겨운 선택(tough choices), 의문스런 결정(questionable decisions)의 문제에 부딪혀 혼돈(chaos)스런 상황이 급속히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 요인들(factors)은 여객선 침몰, 그리고 향후 수백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희생자를 낳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다. 당시 교통관제센터는 여객선이 구조요청을 보낸 지 약 30분 만에 “해경 도착 15분 전”이라며 “승객들에게 구명동의를 착용토록 하라”는 내용을 전달했다.
이에 앞서 여객선의 승무원들은 승객들에게 현재 있는 곳에서 움직이지 말고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을 했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교통관제센터는 “방송이 안 되더라도 최대한 나가셔서 승객들에게 구명동의 및 두껍게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조치 바란다”교 통신했다. 이에 세월호는 “본선이 승객들을 탈출시키면 구조가 바로 되겠느냐”고 물었다. 관제센터는 “라이프링이라도 착용시키고 띄우라. 빨리!”라고 지시했다.
몇 분이 흐른 뒤, 교통관제센터는 “우리(관제센터)는 그쪽 상황을 모른다. 선장이 최종 판단을 하고, 승객을 탈출 시킬지를 빨리 결정하라”고 했다.
선내(船內) 다른 곳에서 근무 중이었던 선원(communication officer)은 艦橋(bridge)로부터 승객들로 하여금 배를 포기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艦橋에 있던 한 선원은 선장이 배를 버리고 대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사항을 방송 메시지로 듣지는 못했다고 했다. 생존자들도 선장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세월호는 지난 화요일(15일) 밤 9시 인천에서 출항해 제주도로 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여객선의 항해는 여타 배들과 다를 바 없었다. 세월호는 길이 460피트, 5층 선체(船體) 구조로 264마일의 루트를, 화물을 적재한 채 일주일에 두 번씩 남해안을 운항했다. 침몰 당시 세월호의 승객은 476명으로 최대 승선인원(921명)의 60% 가량을 태우고 있었다.
대부분의 승객은 대학입시를 1년 앞두고 마지막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고교 2학년 학생들이이었다. 배는 또 124대의 자동차, 56대의 트럭, 105개의 컨테이너 등을 滿載하고 있었다.
학생 중 일부는 갑판에 모여 밤하늘의 불꽃놀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갑판 아래 머물던 학생들은 배안을 돌아다니거나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비디오 게임 등을 즐기고 있었다.
세월호의 최상층에 위치한 조타실에서는 승무원들이 3교대로 근무 중이었다.
배는 안개로 인해 예정보다 늦은 시각에 출발(4월15일)했다. 조타수 오용석(58) 씨는 두 번째 교대자로 동료의 지시에 따라 키를 잡고 있었다. 오 씨는 사건 발생 후 수 차례에 걸쳐 언론과 인터뷰한 인물로 출항당시 바다가 잠잠하고 조용한 밤이었다고 밝혔다. 선장은 항해 상황 점검을 위해 몇 차례 艦橋을 들르곤 했다 한다.
吳 씨는 세 번째 교대자에게 키를 넘기면서, 함선 내 자동차와 화물이 제대로 결박 됐는지에 대해 재확인(double-check) 할 것을 주지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는 동료들에게 일부 자동차와 화물의 결박이 느슨해져 자신이 이를 결박했다고 말해주었다. 이 때만 해도 아무 일 없었다. 이후 吳 씨는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 깊은 잠에 빠졌다.
승무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박한결(26) 씨의 지휘 하에 아침 7시30분 마지막 교대가 시작됐다. 박 씨는 입사 4개월의 신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교대 시간은 항해 중 가장 어려운 구간(註: 맹골수로)을 통과하는 시간과 겹쳤다. 그녀는 유속도 빠르고 예측 불가능한 해류, 그리고 해난 사고가 많이 발생했던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吳 씨는 “(맹골수로를 통과하다) 강한 조류와 맞닥뜨리면, 배가 전복되기도 한다”며 “이곳에서는 키를 잡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박한결 씨는 이처럼 악명 높은 해로(海路)를, 조타수에게 키를 잡게 하고 지시를 내리며 처음 항해한 것이다.
이 때문에 검찰은 그녀가 맹골수로를 통과할 정도로 숙련된 인물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세월호 침몰 사건 발생 후 선장 등 관련자 3명, 그리고 기관사를 구속했다.
전문가들은 사건 발생 당시 세월호가 선체(船體)의 급격한 회전을 시도했는지의 여부, 그리고 화물의 결박이 풀렸는지의 여부를 조사했으며, 이것이 사고의 원인이 됐는지를 조사했다고 밝혔다. 사건 발생 당시 조타기를 직접 돌렸던 조준기 씨는 “내 자신도 실수를 했지만 배가 너무 많이 기울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검찰은 전문가들이 박한결 씨와 조준기 씨 사이에 어떤 ‘불일치점’(discrepancies)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吳 씨는 아침 8시48분(4월16일) 배가 심하게 기울어 잠에서 깼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그는 맨발로 복도를 나와 즉시 함교로 향했다. 그가 맨 처음 얼굴을 맞닥뜨린 인물은 이준석 선장이었다.
이준석 선장은 당시 함내 숙소에 있었다. 그는 배가 한쪽으로 서서히 기울자 가까스로 자신의 숙소를 빠져나온 뒤, 艦橋의 출입구 손잡이를 잡았다. 李 선장은 艦橋로 들어가 세월호를 정상화 시키려 했다.
李 선장이 艦橋로 들어간 후 오 씨도 그를 따라 艦橋로 진입했다. 곧이어 세월호의 모든 항해사와 조타수가 함교로 모였다. 이준석 선장은 함교 중앙의 지도 테이블 옆의 기둥을 잡고서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吳 씨는 선장이 “배가 이미 심하게 기울고 있으니, 모두 잡을 수 있는 것을 잡고 버티라”고 말했다며 “당시 상황은 정말 심각한 게 분명했다”고 회상했다.
전문가들은 발생 가능한 여러 사고의 원인으로 승무원의 실수, 예상치 못한 조류, 선박의 평형 유지 실패, 적재 화물의 결박 부실 또는 불안정, 선실 증축에 따른 세월호(선령 20년)의 선박 평형유지 손상 가능성, 안전 수칙 태만 등에 무게를 두고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
16일 오전 8시55분, 세월호는 선체가 기울어지고 운항불능 상태가 됐다. 여객선 침몰 직전 세월호와 해상교통관제센터의 교신 내용에 따르면 당시 함교에 있던 승무원(原文은 someone)은 해상교통관제센터에 “빨리 와 달라‘면서 조난신고를 했다.
李 선장은 선체를 정상화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밸러스트(ballast) 모터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朴 씨가 말했다고 오 씨는 증언했다.
오전 9시5분, 세월호는 해상교통관제센터에 “해경 구조는 어떻게 되느냐?”는 다급한 메시지를 보냈다. 관제센터는 사고 해역 주변의 선박들에 세월호 구조에 나설 것을 요청했다.
船內 3층에 있던 승무원 강해성 씨는 방송실에 있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상황 파악에 나섰다. 배는 30도 가량 기울었고 칼이 선반에서 떨어졌다. 姜 씨는 승객들에게 그대로 있으라, 급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방송했다.
그는 “메뉴얼을 볼 시간이 없었지만 승객들을 우선 안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준석 선장은 긴급 대피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지난 금요일 증언했다. 선장은 승객들이 강한 조류와 추운 바닷물 속에서 위험에 빠질 것을 두려워했다. 吳 씨는 애초 이 선장이 선박의 라이프래프트(구명뗏목)를 띄우려 했다고 증언했다. 승무원도 이를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오전 9시18분, 세월호는 배가 50도 이상 기울고 있다고 보고했다. “탈출이 불가능하다”, 세월호 함교의 누군가(someone)가 무선통신으로 긴급발신을 했다.
姜 씨는 본인의 핸드폰으로 해경에 전화를 건 뒤, 함내 방송을 통해 구조대가 오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라고 승객들에게 알렸다.
오전 9시23분, 함교는 또 다른 비보를 알렸다: “배가 가라앉기 직전이다”
배는 계속해서 기울어졌고, 내부는 물이 찼다. 강 씨와 그의 동료들은 일부 승객들이 4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의자 등을 쌓아올렸다.
姜 씨는 “모든 사람들이 살려고 발버둥을 쳐서 아수라장 같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吳 씨는 李 선장이 함교에서 나오면서 탈출 명령을 내리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吳 씨는 이 같은 명령을 방송으로 듣지는 못했다고 했다. 姜 씨도 그런 명령(탈출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검찰은 사고 당시 탈출명령이 승객들에게 전달됐는지의 여부를 여전히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오전 9시38분, 세월호는 연안해상교통관제센터와 마지막 교신을 통해 배가 60도 기울었다고 통보했다. “좌현 쪽으로 탈출할 사람만 탈출 시도하고 있다”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교신이 끊겼다.
이후 세월호 승무원 모두 함교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항해팀을 포함해 전체 승무원의 3분의 2가 넘는 29명의 승무원들이 생존했다. 그러나 승객은 전체의 3분의1에 해당하는 174명만이 생존했다. 지난 월요일 61명의 사람들이 사망하고 241명이 여전히 실종상태인 것으로 확인됐다.
吳 씨는 李 선장이 조타실을 나와 밑으로 내려갔고, 선박 좌현의 문(door)과 부딪히는 것을 보았다. 조타수는 선장이 배를 탈출했는지, 아니면 배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쳐 넘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구조 후 TV 이미지를 통해서야 李 선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장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고,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받고 있었다. 선장은 이외에도 재난상황에서 승객을 버리고 떠나 유기치사 등의 혐의가 적용됐다.
번역/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필자: 최상훈, 커크 셈플(kirk Semple), 이수현 기자
원제: Errors Mounted as Chaos Ruled Capsizing Ferry
출처: 뉴욕타임즈 홈페이지, 2014년 4월20일자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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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선장을 6시간 면담한 강정민 변호사의 기록
선장은 옷을 갈아 입던 중이었는지 트렁크 팬티 차림이었고, 오다가 기울어지는 복도에 미끄러져 엉덩이와 갈비뼈를 부딪쳤고 엉금엉금 기어서 조타실로 들어왔다. 조타실에 들어온 선장은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상황을 파악하며 1등항해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조갑제닷컴(金泌材)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선장 이준석 씨 등 승무원 15명은 현재 인터뷰가 불가능한 상태다. 그런데 세월호 선장과, 사고 당시 선장 역할을 대신했던 3등 항해사, 키를 잡았던 조타수 등 3명의 승무원을 사고 발생 후인 지난 달 21일 6시간 동안 만난 법조인이 있다.
바로 강정민(법무법인 영진) 변호사이다. 강 변호사는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이 선임한 변호사는 아니다. 그는 8일 <조갑제닷컴>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3명의 세월호 승무원들을 만난 이유를 “사고원인이 궁금해서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강 변호사는 “천안함 때처럼 이번 사건도 사건의 원인과 관련해 국민들의 의혹이 많았다. 국론이 양분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고, 사건 실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해서 얘기를 들어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선장과 승무원들을 만나고 나서 느낀 점은 이번 사고에 어떤 黑幕(흑막)도 없었다는 점”이라며 “이미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선박의 구조적 결함’과 ‘관리 소홀’ 등이 문제였다. 그래서 이들 문제 외에 사고 발생에 다른 원인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강 변호사는 지난 달 21일 승무원들을 접견한 뒤, 이들을 다시금 만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그래서 향후 '사건을 담당할 예정이냐'고 묻자 “그 쪽(세월호 승무원 측)에서 요청이 있는 것도 아니고 리스크도 큰 사안이라, 현재로서는 담당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답변했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주>아래 글은 강정민 변호사가 이준석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을 접견한 후 정리한 글이다. 강 변호사는 인터뷰를 자신이 쓴 글로 대신하겠다며 <조갑제닷컴>에 아래 글을 전달했다.
세월호 피의자들을 접견하고
변호사 강정민
아직도 세월호 내에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아련하기만 하다. 사고 발생 이후 수일이 지났지만 도대체 왜 사고가 났는지 알 길이 없다. 잠수함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느니 우럭잡이배를 피하다가 사고가 난 것이라느니 구조요청 한 시간 전부터 문제가 있었음에도 부구하고 관련 기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등 온갖 억측이 무성하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나날이 지쳐가고 정부에 대한 불신은 증폭되고 있다.
언제까지 수사기관의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과연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가서 만나보자. 만나서 물어보자. 이에 접견을 신청하였다.
접견은 당시 항해를 지휘하고 있던 삼등 항해사 박한결, 조타수 조준기, 선장 이준석 순으로 진행되었다. 궁금한 내용이 해소될 때까지 문답을 이어가다 보니 6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접견을 통해 확인된 사실 중에 국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을 피의자들의 방어활동 및 수사기관의 수사활동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오갖 억측으로 인해 국가가 혼란스러워지고 국론이 분열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① 잠수함이나 우럭배 같이 운항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은 일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의 일치된 진술이었고 그들의 입과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② 135도에서 145도로 변침하는 지점까지는 순조로운 항해가 계속되고 있었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까다로운 맹골수로를 거의 벗어나 시정이 트이고 확보되는 지점에 도착하였고 이제 3시간 정도만 전진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선장은 비로소 마음을 놓고 옷을 갈아 입고 소지품을 가지러 선장실로 갔다. 10도 변침은 항해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③ 10도 변침지점에서 3등 항해사 박한결은 평소 지도받은 대로 5도씩 나누어 2단계 변침을 진행하였다. 1단계 5도 변침은 이상 무, 이어 2단계 5도변침을 지시하였고 조타수 조준기가 키를 돌렸다. 그런데, 배가 기우뚱하는 느낌이 있었다. 이상을 느낀 조타수가 반대 방향으로 15도 정도 키를 회전시켰다. 그 순간이었다. 배가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듯이 돌면서 배가 좌측으로 기울었다. 원심력 때문이었다. 배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느낌상 30도 정도 기운 듯 했다. 박한결은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버티며 상황을 살폈다.
④ 5층 선수에 있던 선장과 항해사들 조타수들이 조타실로 급히 뛰어왔다. 선장은 옷을 갈아 입던 중이었는지 트렁크 팬티 차림이었고, 오다가 기울어지는 복도에 미끄러져 엉덩이와 갈비뼈를 부딪쳤고 엉금엉금 기어서 조타실로 들어왔다. 조타실에 들어온 선장은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상황을 파악하며 1등항해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구조요청을 하라는 것이었다. 배는 좌측으로 기울어진 상태. 조타실에 있는 두 개의 교신기중 오른쪽에 있는 것은 경사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왼쪽에 있는 교신기로 구조를 요청했다. 그 시각이 8시 55분이다. 오른쪽 교신기는 진도 VTS에, 왼쪽 교신기는 제주 VTS에 주파수가 맞추어져 있었다.
⑤ 구조요청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선장은 휠링 탱크를 작동시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선장은 기관장에게 엔진을 정지시키라고 명령했다. 엔진이 계속 움직일 경우 배가 뱅뱅 돌게 되어 문제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기관장은 아침 7시경 조타실에 올라와 그날 일정 등을 이야기하느라 조타실에 있었다. 기관장은 즉시 기관실에 연락하여 엔진을 정지시켰고 기관실 선원들에게 갑판으로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기관실은 배의 가장 밑바닥에 있어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야 한다. 선장은 승객들에게 안내방송을 하라고 지시했다. 우왕좌왕하다 더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라이프 자켓을 착용하고 대기하라는 내용이었다. 전원이 불안정하고 배가 기우뚱한 상태라 방송이 잘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조타실과 객실이 구조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통로가 기울어져 있어 가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객실로 가기 위해서는 복도를 거쳐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⑥ 진도 VTS와 교신이 되고 구조선 파견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다. 물살이 세고 수온이 낮은 상황이라 구조선들이 도착하기 전에 물에 뛰어 들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 물살에 쓸려 떠내려갈 가능성이 크고 그럴 경우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구조가 더 힘들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구조선이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퇴선명령을 할 수는 없었다.
⑦ 드디어 구조선들이 시야에 들어 왔고 선장은 퇴선명령을 내렸다. 조타실에 있던 선원들도 바다쪽으로 내려갔다. 부상을 당한 선장은 혼자 힘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누군가 창문 햇볕 가리개를 잡고 내려오라고 해서 그것을 늘어뜨려 잡고 내려갔다.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다리를 다쳤다. 내려와보니 저쪽에서 구조대와 어선들이 승객들의 탈출을 돕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선장과 객실쪽과 떨어져 있는 선원들이 구조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어려웠고 그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오히려 구조활동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구조선에 따라오르라는 구조대원들의 말에 구조선에 올라탔다.
⑧ 구조선이 팽목항에 도착했다. 팬티 바람에 부상을 입은 선장은 우선 담요로 아랫도리를 둘렀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핸드폰과 지갑은 선장실에 두고 나온 상태였다. 돈을 말렸다는 말이 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박한결과 조준서는 체육관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승객들이 탈출하지 못한 채 배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것이 접견을 통해 확인한 내용이다. 첫 번째 쟁점은 사고 발생원인을 규명하는 문제이다. 사고가 조타미숙으로 발생했는지 선박의 구조적 결함으로 인한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두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을 거이다. 이 경우 주요한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이것은 선체를 인양한 뒤에 키의 상태 등을 확인하면 판명이 가능하다고 한다.
두 번째 쟁점은 주어진 상황에서 승무원들이 승객 구조의무와 비상대처를 제대로 하였는가의 여부이다. 여기서 가장 큰 비극이 있었다. 선장은 일등 항해사에게 라이프 자켓을 입고 탈출을 대기하라는 취지의 방송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언제든 탈출명령이 내려지면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곳에서 대기하라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대부분인 승객들은 방에서 차분히 대기하라는 취지로 알아들은 것 같다.
두 번째 비극은 구조대의 구조 태세였다. 구조대는 바다로 뛰어드는사람들이나 탈출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구조하는 작업에 매달렸을 뿐 선실에 갇힌 승객들을 구조하지는 못했다. 선실에 늘어뜨릴 로프도 준비하지 않았고 그럴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배는 예상보다 빨리 뒤집어져 버렸다.
확인한 사실에 의하면 세월호의 침몰에는 그 어떤 외부적인 원인은 없었다. 음모도 없었다. 사고는 별다른 사전징후 없이 갑자기 일어났고 침몰 속도는 너무 빨랐다. 어떠한 외부적 요소도 없었다는 일치된 진술을 접하고 천안함 사건 때 초래된 국론 분열 사태는 없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리고 사건은 단순해졌다. 제주 VTS에 구조를 요청한 8시55분부터 구조대가 도착한 9시30분까지가 규명되어야 한다.
박한결은 사고 발생 직후부터 팽목항에 도착할 때까지 쇼크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 전까지의 명료한 기억에 비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반면 이준석 선장이나 조준기 조타수는 사고 이후 상황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월호 사건이 너무나 소중한 대한민국의 인재들을 앗아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억장이 무너지고 하늘이 원망스러울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바친다.
'마지막 탈출자' 김성묵 씨의 생생한 증언
"홀 바닥에 물이 차기 전에 뽀얀 안개처럼 뭔가가 피어올랐어요. 그런데 다시 한 명 구조하고 다시 보니까 물이 차기 시작하더라고요."
조갑제닷컴
지난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할 때 마지막까지 배에서 학생들 구조활동을 했던 김성묵 씨는 탈출한 직후인 낮 12시25분 YTN과 인터뷰하면서 "지금 뉴스에선 사망자가 한 명이라고 하는데 내가 본 것만 해도 얼추 서른 명은 빠져 나오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같은 시각에 정부 발표는 구조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식으로 설명, 그런 긴박감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김성묵 씨를 전화로 인터뷰하던 YTN 긴급 속보 진행자가 정부 측 발표가 너무 한가한 듯하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큰 사고가 나면 미국 대통령도 CIA 보고서보다는 CNN 뉴스를 본다는 말이 있다.
김성묵 씨의 발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배가 기우뚱 기우뚱 하면서 항해하였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급히 기울었다. 배 안에 있는 화물, 크레인 같은 것이 쓰러지면서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곧 안내 방송이 나왔는데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이동을 막은 것이다. 선체가 기우니 학생들이 소리 지르고 야단이었지만 방송은 안에서 대기하면 안전하다고 했다. 움직이면 더 위험하다고 했다. 선체가 기우니 홀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왼쪽) 바닥으로 떨어져 있다가 언덕을 넘듯이 출입구(오른쪽 난간)로 기어올라야 하는데 너무 경사가 급했다. 내가 소화기 호스를 내려서 몇 명을 끌어올렸으나 워낙 많았다. 그러다가 물이 빨리 차들어왔다. 내가 있던 난간쪽의 유일한 입구로 사람들이 몰렸다. 유리창을 깨야 나올 수 있는데 그럴 수단이 없었다. 식당 아주머니로 보이는 이들은 옥상으로 올라가 헬기를 타고 탈출했다. 나는 학생들을 갑판으로 올려 헬기로 탈출시키는 일을 돕다가 전복되기 전 마지막으로 탈출했다. "
김성묵 씨의 이 증언은 가장 먼저 참상의 규모를 전한 셈이다. 김씨는 목소리가 차분하고 침착하게 말하였다. 세월호에 실렸던 화물이 쓰러지면서 쿵 하는 소리가 나면서 배가 급하게 기울었다고 한 증언도 정확한 관찰이었다. 특히 사고 전 세월호가 기우뚱 거리면서 항해하였다는 이야기는 이 배가 화물 과적 등으로 안정성을 상실한 채 움직이고 있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여러 번 "아이들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김성묵 씨는 다음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도 나왔다. 이 전화 對談을 정리한 내용이 위키트리에 실려 있다. 가장 생생한 현장 목격기일 것이다.
*wikitree
'세월호 침몰 사건'의 마지막 탈출자가 배를 벗어나기 직전 상황을 전했습니다. 사업차 제주도로 향하던 생존자 김성묵 씨는 17일 오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제가 탈출 직전, 4층) 홀에 아이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아이들 다 못 구했습니다"라며 흐느꼈습니다. 이어 "홀에 있던 아이들이 난간 잡을 데도 없고 (배가) 벌써 기울어져 있는 상태라 바닥을 붙잡고 올라와야 되는데 거기가 미끄러져서 잡을 수가 없는 상태였고요"라며 "그래서 소화기 줄을 호스를 이용해서 끌어당기는데. 몇명 못 구했는데 너무 90도 가량 기울어지다 보니까 아이들 힘이 부족해서인지 잡고 있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 씨에 따르면 배가 완전히 침수되기 직전, 자신이 있었던 4층 홀에는 학생 3~40명이 남아 있었고, 이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기울어진 경사를 올라야 하는 상황이라 바다로 뛰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김 씨는 "그 아이들 쳐다보고도 구할 수가 없어서"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월호' 마지막 탈출자 김성묵 씨 인터뷰 全文입니다.
사업차 제주도를 가고 있던 생존자 김성묵 씨 지금 연결이 돼 있습니다. 김성묵 씨 나와 계십니까?
◆ 김성묵> 네.
◇ 김현정>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 김성묵> 예.
◇ 김현정> 사고가 나던 순간 어디쯤에 계셨어요?
◆ 김성묵> 선실에 있었습니다.
◇ 김현정> 그러니까 지금 선수, 선미 이렇게 나누어지는데 어느 부분의 선실입니까?
◆ 김성묵> 선미 쪽입니다.
◇ 김현정> 선미 쪽에. 그러면 사고가 났구나 하는 건 어떻게 인지하셨나요?
◆ 김성묵> 일단 기울어졌었는데 기울어지는 각도가 예사롭지 않았었습니다.
◇ 김현정> 그럼 갑자기 선실에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확 기울어진 거예요?
◆ 김성묵> 예, 처음 기울어진 건 서 있기 힘들 정도로.
◇ 김현정> 서 있기가 힘들 정도로?
◆ 김성묵> 자판기가 넘어지는 순간이었거든요.
◇ 김현정> 그 정도로 기울어져서. . . 한 60도가 될까요, 각도로 따지자면?
◆ 김성묵> 스마트폰으로 각도를 재봤었는데 45도 정도가 나오더라고요.
◇ 김현정> 45도 정도가 얼마 동안에 기울어진 겁니까?
◆ 김성묵> 몇 초 사이였습니다.
◇ 김현정> 몇 초요?
◆ 김성묵> 그 꼭 배가 크게 회전하는 듯이 차를 타면 크게 회전했을 때 갑작스럽게 회전했을 때 한쪽으로 쏠리잖아요. 그런 순간처럼 한 번에 확 한쪽으로 쓱 올라가면서.
◇ 김현정> 앞과 뒤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옆이, 좌현이 올라간 거죠, 상태가? 그러면서 마치 미끄럼을 타듯이, 45도 미끄럼을 타듯이 내려온 겁니다. 안내방송이 나왔다고 얘기가 나오는데 언제쯤에 나온 거죠, 안내 방송은?
◆ 김성묵> 안내 방송은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막 소리지르고 그러는 와중에 한 1분 정도가 걸린 것 같아요, 느낌상이지만.
◇ 김현정> 그럼 안내 방송은 바로 나왔단 말이네요, 그래도 사고가 나자마자?
◆ 김성묵> 그렇죠.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방송이 계속 반복돼서 나왔었습니다.
◇ 김현정> 반복해서 '움직이지 말아라. 가만히 있어라' 왜라고 설명이 혹시 나왔습니까?
◆ 김성묵> 그런 건 없었습니다. 위험하니까 그냥 움직이지 마시라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 김현정> 그러면 실제로 다들 가만있었습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 김성묵> 처음에는 거진 다 가만히 있으셨었고요. 저 역시도 가만히 있다가 아닌가 싶어서 다시 난간 쪽으로 나왔거든요.
◇ 김현정> 그러니까 이게 지금 배가 1층, 2층,3층 4층,5층이 있는데 맨 밑은 화물, 거기는 물 속에 잠긴 거고 사실 그 위쪽에 사람들이 묵는 객실은 다 바깥쪽 테라스가 있는 거죠?
◆ 김성묵> 3, 4층에 몰려 있었습니다.
◇ 김현정> 그쪽 바깥으로 나와보셨어요?
◆ 김성묵> 홀에는 못 들어갔고요. 기울어진 상태라서 홀로 들어가면 붙잡을 데도 없고 버틸 데가 없어서 난간 쪽으로 나와서 서 있었는데 조금 이따가 선원으로 보이시는 분들이 옥상으로 올라가시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헬기가 왔습니다, 구조 헬기가.
◇ 김현정> 그걸 따라가셨어요? 선원으로 보이는 분들이 가는 그곳을 따라가셨어요?
◆ 김성묵> 아니요,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안에 사람들 옮겨주느라 그때 헬기가 도착하자마자 헬기 구급요원이랑 눈이 마주쳐서 안에 분들 다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옮겨드렸습니다.
◇ 김현정> 그러면 제가 그 배의 그림이 정확히 안 그려져서 그러는데 3층과 4층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김성묵 씨께서는 선실에 있다가 배가 기울어지고 난 다음에 문을 열고 4층의 난간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난간을 잡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문이 닫힌 선실 안에 많이 있었다는 얘기인 거죠?
◆ 김성묵> 그렇죠. 5층 쪽에서 119 구급대원들이 구조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4층에 있던 아이들을 5층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구급대원들이랑 같이.
◇ 김현정> 4층 난간에 있다가 구급대원이 5층으로 오는 걸 보고 5층으로. 갑판쪽을 향해서 아이들 올라가는 걸 도와주셨어요?
◆ 김성묵> 옮기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까 빠르게 안 돼서 하나씩 하나씩 올려보냈습니다.
◇ 김현정> 그렇군요. 그러다가 언제쯤 그러면 탈출하신 건가요?
◆ 김성묵> 저는 배가 침수되기 바로 직전까지 있었습니다.
◆ 김성묵> 완전히 침수되기 바로 직전까지 계셨어요?
◆ 김성묵> 네, 마지막에 나왔습니다.
◇ 김현정> 사람들 구하다가?
◆ 김성묵> 네. . .
◇ 김현정> 그러면 마지막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는 이야기인데요, 지금.
◆ 김성묵> 홀에 아이들이 많이 있었어요. 바닷물. . . 그 아이들 다 못 구했습니다. . . (눈물)
◇ 김현정> 그러니까 그 4층 선실 안에, 내부에 마지막 좌초 전복돼서 완전히 가라앉는 그 순간까지 아이들이 많이 남아 있었어요?
◆ 김성묵> 네, 있었습니다. 홀에 있던 아이들이 난간 잡을 데도 없고 벌써 기울어져 있는 상태라 바닥을 붙잡고 올라와야 되는데 거기가 미끄러져서 잡을 수가 없는 상태였고요.
◇ 김현정> 홀에, 넓은 홀에 있는 아이들은 뭔가를 잡고 올라올 수가 없는, 미끄럼에서 뭔가 잡고 올라올 수가 없는...
◆ 김성묵> 그래서 소화기 줄을 호스를 이용해서 끌어당기는데. . . 몇 명 못 구했는데 너무 90도 가량 기울어지다 보니까 아이들 힘이 부족해서인지 잡고 있지 못했습니다.
◇ 김현정> 4층 홀에 그러니까 그때 몇 명쯤이나 있었던 것으로 대략 기억을 하세요?
◆ 김성묵> 한 3, 40명 정도로 생각됩니다. 제가 제 눈에 보이는 아이들만.
◇ 김현정> 눈에 보이는 아이들만. 홀에 있었던 아이들만 한 3, 40명 정도를 남겨둔 채. . .
◆ 김성묵> 선수 쪽으로 큰 방이 두 개가 있었거든요. 그 방 안까지는 제가 확인할 수 없었고요. 그쪽에서도 나올 데가 없어서 계속 손 흔들고 그랬는데.
◇ 김현정> 그렇군요.
◆ 김성묵> 제가 구조하던 입구 문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인원이 한정돼 있었어요. 바닷물이 너무 빨리 올라차니까.
◇ 김현정> 너무 빨리 올랐다는 건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속도로 그렇게 물이 차오르던가요?
◆ 김성묵>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 김현정> 순식간에?
◆ 김성묵> 홀 바닥에 물이 차기 전에 뽀얀 안개처럼 뭔가가 피어올랐어요. 그런데 다시 한 명 구조하고 다시 보니까 물이 차기 시작하더라고요.
◇ 김현정> 한 명 구조했는데?
◆ 김성묵> 네,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나서는 정말 금세었어요.
◇ 김현정> 선실에 있던 사람들은 구명조끼는 안 가지고 있었나요? 안 입었나요, 사고난 후에?
◆ 김성묵> 입었습니다. 입고 있었습니다.
◇ 김현정> 다 입고는 있었는데 바다로 뛰어들 수가 없었군요?
◆ 김성묵> 그렇죠. 바다는 반대쪽으로 물이 스며드는 상황이었고요. 우리는 물이 스며드는 반대쪽 언덕으로, 그러니까.
◇ 김현정> 언덕을 올라와야 하는데.
◆ 김성묵> 네, 올라와야 하는 상황이었고요.
◇ 김현정> 그래야 하는데 올라올 수가 없는 상황. 이게 지금 4층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3층에서도 똑같은 일이 또 벌어졌겠군요, 그러면?
◆ 김성묵> 그렇죠, 3층하고 4층 사이에 홀이라는 공간이 매점이 있고 오락실이 있고 하는 공간이.
◇ 김현정> 그러니까, 광장 같은 곳이에요.
◆ 김성묵> 광장 같은, 4층까지 뻥 뚫려 있는 곳입니다.
◇ 김현정> 3층과 4층이 연결되는 홀이, 넓은 홀이 있었어요. 그렇군요. 그곳에 아이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이 시간이 자유시간이었으니까 .
◆ 김성묵> 빠져나오지 못했던 아이들이 그곳에 몰려 있었던 것 같고요. 큰 방 안에 더 인원이 많이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 김현정> 내부구조를 보면, 선수에 그러니까 뱃머리에 큰 방이 두 개가 있었고 넓은 홀이 광장이 있었고 그리고 객실이 있었다는 얘기예요?
◆ 김성묵> 그렇죠.
◇ 김현정> 홀에도 아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좌현으로 순식간에 기울어지면서 잡고 올라올 것이 없어서 못 나온 아이들이 많았고 김성묵씨가 눈으로 확인은 못하셨지만 그 두 개의 큰 방에도 아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 객실에도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네요?
◆ 김성묵>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구조한 것은 4층밖에 없어서.
◇ 김현정> 그렇죠. 눈으로 확인한 건. . .
◆ 김성묵> 3층 인원들은 3층 인원들대로 빠져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김현정> 그리고 나서는 어떻게, 뭘로 구조되셨어요?
◆ 김성묵> 저도 끝까지 있다 보니까 배로 구조됐습니다. 어선에.
◇ 김현정> 구조가 되고 나서 그러니까 얼마 만에 지금 완전히 잠긴 겁니까, 배가?
◆ 김성묵> 좌초가 된 상태에서 구조가 됐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 김현정> 그러니까 구조선으로 우리 김성묵 씨께서 옮겨타자마자 배는 완전히 가라앉은 건가요?
◆ 김성묵> 네.
◇ 김현정> 그 안내방송이 가만히 있어라, 위험한 순간이니까 가만히 있어라라는 안내방송 후에 후속방송은 더이상 안나온 건가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됐는데?
◆ 김성묵> 네. 그 방송 말고는 들어온 게 없습니다.
◇ 김현정>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면 안 되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했더라도 그다음에는 뭔가 빨리 탈출을 해라라든지 뭔가가 좀 있었어야 되지 않나라는 생각도 저는 드는데 어떻습니까?
◆ 김성묵> 저도 그런 생각이, 그게 안타까운 겁니다. 왜 구명조끼도 누가 입으라고 해서 입은 게 아니라 아이들끼리 나눠 가진 거예요.
◇ 김현정> 안내방송에서 구명조끼 입으라라는 게 나온 게 아니었어요?
◆ 김성묵> 저는 못 들었습니다.
◇ 김현정> 배 안에 갇혀 있을 아이들 생각하니까 참 마음이 너무 많이 아픈데요.
◆ 김성묵> 예, 그 아이들 쳐다보고도 구할 수가 없어서. . (눈물).
◇ 김현정>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한 명이라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해 주신 것을 제가 감사드리고요. 선생님이 하실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신 것 같습니다. 몸조리 잘하시고요.
◆ 김성묵> 네, 감사합니다.
◇ 김현정> 한 명의 생존자라도 더 나오기를 같이 한번 우리가 기도해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성묵> 네.
◇ 김현정> 실종자가 대부분 선실 안에서 났습니다. 그런데 선실 안에 계시던 분이세요. 생존자 김성묵 씨 만나봤습니다.
조선일보 1면 톱의 무리한 海警 비난
선장 책임을 해경에 전가. 세월號와 海警이 탈출결정을 서로 미뤘다고 했으나, 선박 안전법 제31조는 <누구든지 선박의 안전을 위한 선장의 전문적인 판단을 방해하거나 간섭 하여서는 아니 된다>.
趙甲濟
센터 측에서 "인명 탈출은… 선장님이 직접 판단하셔서… 우리가 그쪽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은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충고이다. 이를 '책임 회피' 폭탄 돌리기'라고 몰고간 조선일보는 無知에 惡意를 더한 셈이다. 오늘자 조선일보 1면 머리 기사 제목은 가로 全面(전면)에 걸쳐서 <세월號 "탈출할까요" 海警 "선장이 판단하라" 서로 미뤘다>이다. 本文(본문)의 핵심 기사는 이렇다.
<승객 476명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 직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세월호는 탑승객의 탈출 여부를 해경(海警) 관할의 진도해상교통센터(VTS)에 묻고, 진도VTS는 "선장이 최종 판단해서 탈출시킬지 결정하라"고 답했다. 세월호와 진도VTS는 사고 당시 31분간 교신을 했지만 서로 승객 탈출 결정을 떠넘긴 것이다. 그 사이 구명조끼까지 갖춰 입은 탑승객들은 "대기하라"는 말만 믿고 선실에서 기다리다 탈출 기회를 잃었다. 위급 상황에서 사고 선박과 VTS 간 '폭탄 돌리기'로 참사를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양측이 교신을 하는 동안 사고 상황을 전하는 데에만 시간을 소진하고, 정작 중요한 결정인 '승객들을 배에서 탈출시키라'는 결정은 하지 않았다. 진도VTS는 위급함을 알리는 세월호에 대해 "인명 탈출은… 선장님이 직접 판단하셔서… 우리가 그쪽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이 시각은 세월호가 "(배가) 50도 이상 좌현으로 기울어져 사람이 좌우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진도VTS에 이미 알린 상황이었지만, 진도VTS는 '상황을 잘 몰라서'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기사는 船長(선장)의 법적 권한에 대한 無知(무지)에 근거, 사고 책임의 상당 부분을 海警에 떠넘긴 誤報(오보)이다. 선박 안전법 제31조는 <누구든지 선박의 안전을 위한 선장의 전문적인 판단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여서는 아니 된다>이다. 이 법은 벌칙으로, <제31조의 규정을 위반하여 선장의 전문적인 판단을 방해하거나 간섭한 자에겐 2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린다>고 했다.
'누구든지' 안엔 해경도 포함된다. 선박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는 선장이 가장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으므로 '전문적인 판단'을 내릴 권한을 독점적으로 부여한 것이다. 해경 관할의 교통센터가 세월호를 보지도 않고 무슨 능력으로, 무슨 권한으로 선장을 젖히고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나?
센터 측에서 "세월호 인명탈출은... 선장님이 직접 판단하셔서 인명 탈출 시키세요. 저희가 그쪽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선장님께서 최종 판단을 하셔서 승객 탈출시킬지 빨리 결정을 내리십시오"라고 말한 것은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충고이다. 이를 '책임 회피' 폭탄 돌리기'라고 몰고간 조선일보는 無知에 惡意(악의)를 더한 셈이다.
만약 센터 측이 세월호 선장을 무시하고 탈출 명령을 내려 사망자가 생겼다면 선장과 언론은 해경의 越權(월권)을 규탄하였을 것이다. <세월號 "탈출할까요" 海警 "선장이 판단하라" 서로 미뤘다>란 제목 자체가 너무 감정적이고, 단정적이다. 요사이 언론은, 오랜만의 海難(해난) 사고라서 그런지 해양과 海運(해운)에 대한 초보적 이해가 안 된 상태에서 너무 심하게 정부만 비난한다는 인상을 준다.
세월호 사고는 선장과 船社(선사)가 1차 책임자. 감독기관이 2차 책임자이다. 언론은 해경과 같은 구조기관까지 무리하게, 가혹하게 비판한다. 人命(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였고, 지금은 위험한 잠수작업을 펼치고 있는 海警이 오늘자 조선일보를 읽고 어떤 감정을 갖게 될지도 생각하면서 글을 써야 할 것이다. 그나마 사고 원인에 대한 보도는 한국일보나 공중파 방송이 잘 하고 있다.
*교신 내용 일부
▲09:24
- 진도VTS : 방송이 안되더라도 최대한 나가셔서 승객들에게 구명동의 및 두껍게 옷을 입을수 있도록 조치바랍니다.
- 세월호 : 본선이 승객들을 탈출시키면 구조가 바로 되겠습니까?
- 진도VTS : 라이프링이라도 착용시키고 띄우십시오. 빨리!
▲09:25
- 진도VTS : 세월호 인명탈출은... 선장님이 직접 판단 하셔서 인명 탈출 시키세요. 저희가 그쪽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선장님께서 최종 판단을 하셔서 승객 탈출 시킬지 빨리 결정을 내리십시오.
▲09:26
- 세월호 : 그게 아니고 지금 탈출하면은 바로 구조할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 진도VTS : 경비정이 10분 이내 도착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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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판국에 MBN과 한국일보가 배출한 악의적인 선동을 보면서
靑山流水(회원)
마음이 우울하고 일손이 안 잡혀 강가로 산책하였다. 마침 오리 한 마리가 물 표면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한 번 슬쩍 보더니 경계를 풀고 다시 강물 속에 고개를 넣었다가 뺐다가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먹이를 찾는 모양이었다.
“왜 손을 놓고 있나! 주변에 있는 군함들을 불러서 쓰러진 배를 밀어붙이란 말이야! 그러면 배가 똑바로 설 것이 아니냐!” TV화면에서 중년의 남자가 소리쳤다. 진도 바다 앞에 줄지어 서 있는 경찰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 외침을 듣고만 있었다. 영화처럼 일사천리로 일이 착착 진행된다면 얼마나 시원할까. 아침에 보았던 TV보도가 저녁 생방송 뉴스 시간에 거의 비슷하게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또 답답하다. 단원고등학교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내가 이렇게 답답한데 유가족은 어떠할까.
현장에 출동한 구조대원들은 진도 체육관에서 눈물 흘리는 가족들의 심정을 받들고 있을 것이다. 오리가 겉으로는 여유롭게 보여도 보이지 않는 물속의 발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듯이, 겉으로 진척이 느리게 보이는 상황 속에서 대원들은 생존자를 어떻게든 구출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대원들도 무슨 긍정적인 성과가 있어야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수면으로 나온 부분에 구멍을 뚫어 들어가면 안 되겠냐는 앵커의 질문에 해양전문가가 말했다. 위에 구멍을 뚫으면 그나마 남아있던 에어포켓의 공기가 확 빠져나올 수 있으며 갑자기 배가 가라않을 수 있으며 위에 구멍을 뚫는다 해도 실종자들이 모여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까지 가려면 100여 미터를 내려가야 하는데… 가능한 방법이 아니다…
100여 미터? 그 길이가 실감이 나지 않아 축구장을 검색해보니 축구장 이쪽 골대에서 저쪽 골대까지가 약 100미터이다. 세월호는 146미터이니 축구장 길이의 1.5배 가량이다. 차량 180대를 실을 수 있단다. 도시 거리의 한 블록 거리는 족히 되는 길이이다. 이런 규모의 배를 들이받으면 일사천리로 180도 회전하여 다시 원위치를 회복할 수 있을까? 이걸 안 한다고 구조대원을 비난하는 것은 이성없는 감정일 뿐인 것 같다.
강가를 걷는데 또 답답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절제와 규율로 무장된 정신을 상징하는 제복을 입은 선장과 항해사는 어디에 있는가? 빳빳하게 다림질된 제복은 좌뇌의 활동을 민첩하게 하겠다는 정신자세의 표현이기도 하다. 선장과 항해사가 제일 먼저 구조되는 대열에 있었다는데 구조되는 상황에서 제복을 입은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안 보였다!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데 선장부터 온통 일용직 노동자들처럼 츄리닝에 잠바 걸친 인간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는 상상이 자꾸 스친다. 최초에 배가 균형을 잃어갈 때 해양청에 신고할 시점에 곧바로 구명자켓을 입게 하고 구명보트를 내리고 선장부터 승무원들까지 모두 일심 단결하여 질서유지에 만전을 기했더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살릴 수 있었다. 구명보트도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착잡하고 참담해진다. 그런데 그 선장은 제일 먼저 구조되는 대열에 있었으며 병원에 앉아서 젖은 지폐를 말리고 있었다는 소식도 있었으니 생각날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 지폐 쪼가리 몇 장이 눈에 밟힐 수 있는가. 제복도 없고, 민첩하게 깨어있는 이성도 없었다.
청와대 참모진은 국무총리도 물병세례를 받는 상황에서 봉변을 당할 수 있으므로 대통령의 현장방문을 반대했다고 한다. (아마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악의 욕설을, 박 대통령은 감수했다.) 그럼에도 최고지도자의 방문은 언제나 주의를 환기시키는 힘이 있으므로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의 현장을 방문한 것은 기본도리를 한 것이라고 본다.
미국에서 한국 교포 조승희가 미국 대학생들 30여 명을 쏘아 죽인 비극이 있었다. 그때 사망한 미국 대학생들의 유가족들은 심지서 조승희에게도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다. 비극, 그 자체는 되돌릴 수 없지만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 아름다운 선택을 할 수 있느냐, 는 차분하게 정제된 우뇌, 이성의 작용일진대 그때 그들은 아픈 감성은 감성대로 아픈 그대로 감내하면서 그 감성을 조절하는 이성을 고상하게 유지했다. 일류시민의 교양이고 품격이었다.
사고의 상황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기에 충분히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입장에 있건만 유가족들에게 불신감을 부추기고 이성이 더욱 마비되게 하는 것은 쓰레기 행동이다. 그런 행동을 목격했을 때 골이 아파왔다. 문제해결에도 상처의 치유에도 추호도 도움이 안 되는 처신이다. MBN과 한국일보에서였다.
마치 배안에 생존해있는 학생인 것처럼 그리고 구조대원들이 일부러 방관하고 있는 것처럼 SNS에 거짓말을 올리고 “퍼 날라 주세요”라고 혼란을 획책하는 무리들은 유가족들에게 처절하게 왜곡된 희망을 안겨주고 또 고마워해야 할 구조대원들에게 적개심을 표현하게 한다. 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니? 빨리 들어가 임마! 이런 식의 말을 들을 때 구조대원들은 그만큼 사기가 꺾일 것이고 일의 능률이 떨어지게 할 뿐이다.
인터넷은 익명성의 공간이므로 방종이 난무할 수 있는 경향을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인정한다고 치자. 그런데 버젓이 이름과 간판을 내걸고 그런 짓을 한다면 세월호 선장과 같은 재판대에 올려야 할 정도로 무책임하다.
자칭 잠수전문 거짓말 정신병자에게 낚인 MBN은 언론사의 자격이 있는가. "(실종자와) 실제 통화된 분도 있고, 잠수부 중에 배 갑판 하나, 벽 하나를 두고 대화를 시도해 대화가 된 분도 있습니다. (정부 당국자가) 나와 있던 사람들(민간 잠수부)에게 한다는 소리가 '시간만 대충 때우고 가라'고 했답니다."-이런 선동은 유가족들에게는 정부에 대한 격렬한 불신의 감정을, 일반 시민들에게는 정부에 대한 경멸을 엄청나게 증폭시켰다.
통화를 한다면 유가족들에게 제일 먼저 할 텐데 유가족들도 하지 못한 통화를 누가 어떻게 통화를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벽 하나를 두고 대화가 되었다? MBN은 이게 진실이라고 믿었는가? 바다 속에서 그 거대한 배의 두툼한 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가 가능할까? MBN 기자는 그 바다 속에 들어가 보기라도 했는가? 거짓이었다고 사과했지만 정부를 불신하고 경멸하게 하는 감정의 앙금은 둥둥 떠다니게 하는 오물을 배출하는 짓이었다.
그 다음, 한국일보 4월 18일자, 서화숙 칼럼이다. 지난 1년간 한 번도 읽지 않은 신문이지만 포털에서 우연히 제목이 노출되어 있어 클릭해서 읽었는데, “…근해에 있는 미군이 헬기 2대를 가져와서 구조에 나선다는 것을 막기까지 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러면서 국민을 지켜줄 시스템이 없다고 정부를 질타했다.
미군이 헬기를 가져오겠다고 한 내용, 그것을 막았다는 내용을 어떻게 알았는가? 첫째, 그게 사실인가? 둘째, 그 사실을 누구로부터 들었는가? 셋째, 막았다면 왜 막았겠는가? 그 시점에서 헬기가 와도 소용이 될 상황이 아니었다면 올 필요가 없는 게 아닌가?
지금 사고 해역 근처에 미군 헬기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항공모함이 와 있는데, 그 항공모함이 구조활동에 무슨 도움이 되기는 하는가? 전혀 안 되고 있다. 미군 항공모함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후좌우 상황을 냉철하게 살피고 무의미한 것은 배제해야 하건만 서화숙 칼럼니스트는 다른 어느 언론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특종처럼 ‘미군 헬기 거절’을 슬쩍 던져놓은 다음, ‘이쯤에서 대한민국을 책임질 능력이 없다고 물러서는 게 희생을 막는 길’이라고 비약하는 결론으로 대통령을 공격했다.
청와대와 당국은 MBN 방송과 서화숙 칼럼의 경위를 검토하고 거짓을 유포하는 방종의 개입이 있었다면 합당한 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방종을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국정원 댓글 몇 개를 새발의 적혈구라고 한다면 새발의 규모에 해당한다고 하는 포털 사이트 중에서 네이트에 해괴한 기사가 떠 있었다. 갑자기 jtbc의 손석희 앵커를 찬양하는 기사가 연예 코너의 꼭대기 근처에 어제와 오늘 올라 있는 것이다. 유가족과 인터뷰 하는 도중에 사망자를 추가발견했다는 자막이 올라오자 그 자막을 내리라고 했다는데, 손석희 배려심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기사감이 되는 것이라고 쓴 기자나, 그 기사를 대문 꼭대기층에 올려놓는 네이트나, 그 기사에 손석희를 칭송하는 댓글을 줄줄이 다는 네티즌들의 수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지금 이 판국에 그게 무슨 대단한 배려심이기에 기사감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그토록 돋보이는 수준이라면 다른 방송국 앵커들에게는 그처럼 사소한 배려심조차 없는 족속들이란 말인가.
단원고 탁구부 학생들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우승하고도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고 슬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슬퍼하면서 가야할 길이 너무나 멀다. 찾지 못한 실종자가 269명이 남아 있다. 배 안에 생존자가 있을까? 배를 인양하고 사망자가 줄줄이 나올 때 진도 체육관은 어떤 참담한 고통으로 눈물바다가 되어 버릴 것이며, 단원고는 어찌될 것이며, 이 까마득한 상처가 어느 때에 치유될 수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진다. 강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분홍빛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생기가 넘쳤다. 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잠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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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법
제2장 선장의 직무와 권한
제6조(지휘명령권) 선장은 해원을 지휘·감독하며, 선내에 있는 사람에게 선장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명령을 할 수 있다.
제7조(출항 전의 검사의무) 선장은 출항 전에 선박이 항해에 견딜 수 있는지와 화물이 실려 있는 상태 및 항해에 적합한 장비, 인원, 식료품, 연료 등이 갖추어져 있는지를 검사하여야 한다.
제8조(항로에 의한 항해) 선장은 항해의 준비가 끝나면 지체 없이 출항하여야 하며, 부득이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리 정하여진 항로를 따라 도착항까지 항해하여야 한다.
제9조(선장의 직접 지휘) 선장은 선박이 항구를 출입할 때나 좁은 수로를 지나갈 때 또는 그 밖에 선박에 위험이 생길 우려가 있을 때에는 선박의 조종을 직접 지휘하여야 한다. 다만, 제60조제3항에 따라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1등항해사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직원에게 선박의 조종을 지휘하게 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시행일] 제9조 단서 해사노동협약이 대한민국에서 발효되는 날
제10조(재선의무) 선장은 화물을 싣거나 여객이 타기 시작할 때부터 화물을 모두 부리거나 여객이 다 내릴 때까지 선박을 떠나서는 아니 된다. 다만, 기상 이상 등 특히 선박을 떠나서는 아니 되는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장이 자신의 직무를 대행할 사람을 직원 중에서 지정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11조(선박 위험 시의 조치) 선장은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에는 인명, 선박 및 화물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하여야 한다.
제12조(선박 충돌 시의 조치) 선박이 서로 충돌하였을 때에는 각 선박의 선장은 서로 인명과 선박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하여야 하며 선박의 명칭·소유자·선적항·출항항 및 도착항을 상대방에게 통보하여야 한다. 다만, 자기가 지휘하는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13조(조난 선박 등의 구조) 선장은 다른 선박 또는 항공기의 조난을 알았을 때에는 인명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하여야 한다. 다만, 자기가 지휘하는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등 해양수산부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개정 2013.3.23. >
(이하 생략)
이런 KBS는 절대로 시청료를 올려주면 안 된다
“구할 수 있는데 못구했으니 정부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뜯어가는 시청료도 당장 없애야 한다.
청산유수(회원)
5월 10일 8시에 MBC뉴스를 시청했다. 시청하다가 매우 충격을 받았다. 내 귀를 의심했다. MBC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기사 내용을 확인했다. 기사 내용은 이렇다. 아래 기사를 정독하기를 바란다.
………
◀(MBC) 앵커 ▶
북한 김정은이 공군 지휘관들이 직접 비행기술을 겨루는 대회를 처음으로 열고 참관했습니다. 행사를 직접 기획했다는데, 군에 대한 장악력을 과시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임경아 기자입니다.
◀ 리포트 ▶
김정은과 수행단이 앉아 있는 단상 앞 활주로에서 전투기들이 화염을 뿜으며 날아 오릅니다. 김 위원장은 만족스럽다는듯 밝은 표정으로 지켜봅니다.
장군 직급인 상장 등 공군 지휘관들이 비행기술을 직접 겨루는 대회는 북한군 창건 이래 처음입니다.
◀ 조선중앙TV ▶
"친히 경기대회의 명칭도 달아주셨으며, 대회 조직과 준비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몸소 풀어주셨습니다."
기습 침투용인 MI 2 헬기, 또 과거 주력기인 미그- 19로 추정되는 기종들과 북한의 최신예 전투기 미그- 29가 출격했습니다.
김정은이 군 장악력을 과시하고 내부적으로 충성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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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이 사항을 느꼈는가? 김정은의 호칭이 빠졌다. 그냥 ‘김정은’이라고만 했다.
대한민국의 주요 매체 앵커와 기자들은 김정일 뒤에 ‘국방위원장’이라는 호칭을 꼬박꼬박 붙여서 깍듯한 예의를 차려왔고, 김정은 뒤에도 그 직책을 붙여서 표현함으로써 존경심을 표현해왔다. 북한 언론은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쌍욕을 해대는데, 대한민국 앵커와 기자들은 꼬박꼬박 김정은 뒤에 ‘국방위원회 제 제 1위원장’이라고 기나긴 호칭을 덧붙여왔다. 그런데 MBC앵커가 ‘김정은’이라고만 하는 거였다. 그래서 충격을 받았다. 신선한 충격을.
여기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언론인들의 정신이 얼마나 썩었는지를 단적으로 상징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공영방송이며 국민들로부터 시청료를 뜯어가고 있으며, 또 호시탐탐 시청료를 올리려는 야심을 표현하면서 더 좋은 방송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해온 KBS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9시에 KBS뉴스를 시청했다.
KBS는 세월호 침몰사고를 보도하면서 추모행렬를 취재했고, 이런 인터뷰를 내보냈다. “구할 수 있는데 못구했으니 정부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사실인가? 정말 구할 수 있는데 구하지 않은 게 사실인가?
KBS는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는가? 진도 해역의 수온은 10도 가량이다. KBS기자는 목욕탕에서 가서 10도 가량의 냉탕에 들어가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실험을 해보기라도 했는가? 분명 생존자는 배가 기울다가 순식간에 엎어지듯 넘어졌다고 증언했는데 그 상황에 출동한 전라남도 목포 해경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생명을 구하지 않았다는 게 사실인가? 내가 세월호 사고 피해 가족이고, 그런 말을 들으면 처절하게 격정적인 흥분을 하게 될 것 같다.
KBS는 앵커나 기자 자신이 “구할 수 있는데 못 구했다’”고 하지 않았다. 아주 야비하게 추모객 중에서 인터뷰를 따서 내 보냈다. 아마 여러 인터뷰가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최초 목포 해경부터 지금도 목숨을 걸고 잠수하고 있는 구조요원들을 게을러 터진,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아주 비겁한 인간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KBS는 그저 정부를 까기 위해 가장 극단적으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을 하는 무리들의 선동에 휩쓸린 어느 지나가는 추모객의 인터뷰를 그렇게 내보낸 것이다. 만일, 법적인 책임같은 문제가 제기된다면 KBS앵커와 기자는 교묘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인들은 상당한 방종의 특권을 누리고 있으며, 어떤 개소리를 짖어대도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선동세력들이 즐비하며, 그 사실확인이 되지 않은 말은 지나가는 시민이 한 것이므로.
대한민국 정부에 그렇게 결정타를 날린 KBS는 대한민국을 겨냥하는 북한 전투기를 소개하면서 이따위로 떠들었다…..
.....
(KBS)
북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부인 리설주와 함께 공군 지휘관들의 전투비행기술 경기대회에 참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오늘 보도했습니다.
북한군 창군 이래 처음 열린 이번 경기대회는 서부지구 작전비행장에서 진행됐습니다.
통신은 조선인민군 비행지휘관들의 전투비행술경기대회-2014'라는 명칭도 김 제1위원장이 직접 달았다고 전했습니다.
여기엔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과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 리병철 공군사령관 등이 수행했고, 김기남, 최룡해 당 비서와 김 제1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등이 함께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
KBS는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북한의 전투기 상황을 알리면서 꼬박꼬박 ‘국방위 제 1위원장’, ‘제 1위원장’이라고 예의를 차렸다. KBS앵커와 기자들은 월급을 누구로부터 받는가? 앞으로는 김정은 ‘국방위 제 1위원장’에게 달라고 해라.
시청료는 절대로 올려서는 안 될 것이며, 지금 뜯어가는 시청료도 당장 없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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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적는 記事文은 감정을 적는 文學이 아니다!
해경을 '얼치기'라고 표현한 기자가 '얼치기'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 정통 언론을 자처하는 신문까지도 제목은 詩같고, 내용은 수필 같은 경우가 많다.
趙甲濟
<[세월호 참사] "내 새끼, 사고난 날에 죽었을 리 없어요… 3일은 더 살았을 텐데" 사망 일시 적으며 또한번 통곡한 유족들.>
조선닷컴은 오늘 이런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지난 1일 오후 6시 경기 안산 제일장례식장 김민철(17·가명·단원고 2학년)군의 빈소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한 말이라고 한다.
< "우리 민철이가 그날 바로 죽었을 리 없어요. '에어 포켓'이 있었으면 3일은 더 살았을 텐데…. 19일로 적어요." 듣고 있던 김군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민철이의 시신을 수습한 29일로 합시다.">
이 기사에 댓글이 많이 붙었는데 선정적 보도라고 비판하는 내용이 主(주)였다.
*석치: 이런 기사까지 올려서 국민감성을 자극하는 그 얄팍한 심사는 무엇일까? 기자의 함량미달 자질 문제일까 아니면 의도된 목적이 있어서일까?
*정병선: 스트레이트 기사는 팩트(fact)에 입각하여 사실보도만 하면 된다. 기자의 감상을 전하려면 칼럼을 쓰라.
*홍준혁: 언론은 너무 끝없이 감성적으로만 나간다. 드라마도 아니고 좀 냉철한 언론이 되라, 사실 너무 지나치면 국민들이 짜증이 난다. 언제까지 이것에 매달릴 것인가, 그리 기사가 없나.
*이태주: 에어포켓의 존재로 며칠 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언론에 소개된 나이지리아 예인선 사례는 수온이 25도 정도 되는 지역의 이야기이다. 수온 11도로는 에어포켓이 10개, 20개가 형성된다 하더라도 30분을 견디지 못한다. 차가운 사우나 냉탕이 19도이다. 16도만 되어도 아예 탕에 못들어간다. 구조전문가들의 말보다는 얼치기 기자와 언론이 유족들에게 환상을 주어 구조활동에 혼선만 초래했다.
요사이 언론은 세월호 보도에서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반론권을 주지 않는다. 기자는, 세월호 선장, 선원, 해경, 속칭 구원파를 집중 비판하는 것만큼 이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 그래야 사건의 전체상이 드러난다. 한국인은 어떤 인물을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하면 아예 귀를 막는 습성이 있는데 언론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 기자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람이 있으면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말하는 사람도 찾아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정은 이야기는 욕이라도 충실히 전해주는 언론인데, 선장(혹은 선장의 변호인)의 이야기도 들어는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보도와 논평이 뒤섞여버렸다. 사실보도를 하면서 기자의 감정과 주관이 들어간다. 어느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한 뒤 '이는 억지 주장'이라고 평을 한다. '억지 주장'인지 아닌지는 독자나 시청자가 판단한다. 기자는 충실하게 사실 전달만 하면 된다. 독자나 시청자를 대신하여 판단하고 흥분해선 안 된다. 사실 전달에 소홀한 기자일수록 흥분한다.
*속칭 구원파 비난 보도의 경우 폭로자들의 이야기를 사실인양 전달한다. 그들이 20여년 전 했던 폭로가 거짓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은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기자가 독자적 검증이나 반론권 보장 없이 폭로전문가의 일방적 주장을 전달하는 것은 선동꾼의 심부름꾼이 되어 독자나 시청자를 속이고 자신의 신용을 추락시키는 自害(자해)행위이다. 사실관계의 구체적 확인 없이 특정 종교세력 전체를 세월호 침몰과 연결시키려는 보도는 위험하다.
*언론보도는 사실을 적는 記事文(기사문)이지 감정을 적는 文學(문학)이 아니다. 최근 정통 언론을 자처하는 신문까지도 제목은 詩(시)같고, 내용은 수필 같은 경우가 많다. 이런 보도가 계속되면 독자들은 세월호 침몰에서 이성적 교훈을 얻을 수 없고, 허탈감이나 분노만 생긴다.
*한국 언론은 自省(자성)이 없다. 연안 여객선들이 세월호처럼 위험한 항해를 계속하는 데도 왜 담당 기자들은 기사를 쓰지 않았던가? 언론사나 언론단체가 해양수산부 인천항 제주항 출입기자들에 대한 자체 조사를 하여 반성해야 할 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해경의 구조활동에 대한 지나친 비판은 현실을 무시한 것이다. 조용한 바다에서 큰 배가 순식간에 45도로 넘어가 기울면서 뒤집어지는 상황에서, 더구나 선장과 선원들이 배를 버려 船內(선내)의 지휘-연락체제가 마비된 상황에서 해경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제한되어 있었다. 언론은 이런 제약 조건을 무시하고 왜 100%를 달성하지 않았느냐고 해경을 욕한다. 언론의 요구조건이 조직과 인간의 능력 안인지 밖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조건을 떠난 비방은 非인간적 결과를 부른다. 해경을 '얼치기'라고 표현한 기자가 '얼치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해경엔 완벽성을 요구하는 언론의 기사 내용은 지극히 부정확하다. 이렇게 되면 언론 보도는 自虐(자학)과 自嘲(자조)에 머물 뿐 건설적 교훈을 남길 수 없다.
-오늘 조선일보 金大中(김대중) 고문이 쓴 칼럼대로 '국민적 분노를 국민적 훈련으로' 승화시키려면 언론이 냉정을 찾아야 한다. 더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일이,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고 그들의 희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길이다. 세월호 침몰은 한국 언론의 침몰을 부르고 있다. 지금이 탈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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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성을 거부하면서 상대방에겐 완벽성을 요구하는 言論‘
산소통을 메고 들어간다’는 황당한 誤報를 거듭하는 기자들의 오만과 無知가 ‘진실된 교훈’을 압살하고 있다.
李東昱
正確하지 못하면 正直하지 못하고, 正直하지 못하면 용감할 수 없다. 용감하지 못하면 다가올 비극을 헤쳐 나갈 수 없다.
1. ‘산소통’ 메고 잠수하면 죽을 수도 있다
바다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연일 현장 보도가 신문과 방송을 압도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들도 검증없이 보도되고 이로 인한 질타도 뜨겁다. 헌데, 유독 바다에 대해 우리는 무식하고 여전히 그 무식한 태도를 수정하지 않는 듯하다. 그 중 가장 거슬리는 표기가 ‘산소통 메고 들어가는 잠수부’라는 표현이다. 1등 신문이라는 <조선일보>도 예외가 아니다.
‘산소통’은 ‘Oxygen Tank’로 의료계나 산업현장에서 용접용으로 사용하는 실린더를 말한다. 다이버들이 ‘산소통’을 메고 들어가면 산소 중독으로 경련을 일으키다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실제로 다이버들은 ‘산소통’이 아니라 ‘공기통’을 메고 들어간다. ‘공기통’은 ‘Air Tank’로 압축된 공기를 담은 실린더를 의미한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는 78.5%의 질소와 20.95%의 산소 그리고 0.55%의 아르곤과 같은 활성기체로 이루어져 있다. 量으로 따져도 ‘질소통’에 가깝지 ‘산소통’은 아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아무도 수정하려 하지 않는다. 경제성장과 함께 레저 인구도 급성장해 우리나라의 스쿠버 다이빙 인구가 대략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2만 명이 넘는 기자들 가운데 스쿠버 다이빙을 해본 기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스쿠버 다이빙과 관련한 지식 정보는 상식의 세계에 속할 것이다. 최소한 ‘산소통’과 ‘공기통’을 구별해 표기할 수 있을 텐데도 이런 誤記(오기)는 고쳐질 줄 모른다.
바다와 관련된 지식의 부족함은 서식지와 생김새가 다른 ‘숭어’와 ‘송어’의 혼란에서도 드러난다. ‘슈베르트의 숭어’를 지금도 버젓이 음악교과서에 싣고 있으며, 잘못 되었다는 지적이 여러 해 전에 있었음에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三面(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국토에서 살아온 우리의 不正確(부정확)한 不誠實(불성실)이 부끄럽다.
2010년 3월26일 천안함이 폭침되었을 때 우리 국민은 거센 조류 앞에서 시신과 함체의 인양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학습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 4년 뒤 우리가 겪는 이 불행에서 그때의 학습효과는 얼마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일까.
필자도 다이빙을 즐긴다. 1979년에 첫 다이빙을 한 이후 지금껏 여유가 되면 다이빙을 즐기며 횟수로도 200회 이상이니 아마추어로서는 제법 괜찮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구조 다이버 자격증과 마스터 자격증도 갖고 있다. 深海(심해)잠수는 65m까지 기록했고 수중탐사로 수심 45m 아래의 북한이 판 땅굴로 의심되는 곳을 탐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2노트 이상 되는 潮流(조류)는 마스터 할애비라도 불가항력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거슬러 갈 수 없다. 필자는 수심 30m 부근의 視界(시계)가 20cm도 안 나오는 뻘탕 속에서 강한 下降(하강) 조류를 만나 표류하게 된 사고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길게는 한 시간 반 이상 표류하다 지나가는 여객선에 의해 겨우 구조된 경험도 있다. 그때가 2노트였는데 하물며 6~8노트의 조류에서랴. 이 정도의 조류는 마치 대형 트레일러를 날려버리는 허리케인 앞에 내동댕이쳐진 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언론들은 빨리 구조하지 않는다고 성화다. 정작 현장에서 목숨을 내 놓고 구조 작업을 수행하는 전문가들은 말이 없다. 그들을 대신해서 말해줄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이빙을 좀 안다는 필자는 작금의 언론행태가 밉다.
2. 말과 글이 땀과 기술을 압도하는 과정
급류에 발 한번 담궈보지 못한 자들이 정부를 탓하고 현장의 전문가를 비난하며 완벽하지 못한 제도와 절차를 헤집는다. 이 틈에 전문가를 자처하는 가짜들이 설친다. 설치는 자들은 한결같이 ‘名分(명분)’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있다. ‘名分’은 陣營(진영) 논리를 낳는다. 名分이 같으면 언론도 엄격하게 검증하지 않는다.
홍XX라는 여성이 MBN에 등장해 ‘민간 잠수부’라며 떠벌릴 때 웬만한 다이버들은 한 눈에 ‘저건 가짜’라고 알아차렸을 것이다. 유흥가 주변에서나 볼만한 체구로는 잠수장비를 제대로 운반도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민물이 아닌 바다에서라면 부력을 상쇄시킬 鈉(납) 벨트만도 8Kg 이상을 허리에 둘러야 한다. 특히 수온이 낮은 서해바다에서는 신체를 물과 완전 분리시키는 드라이 수트(Dry suit)를 착용해야 하니 벨트는 그 보다 훨씬 무거워진다. 공기통까지 포함하면 40~50kg의 중량을 견길 수 있어야 한다.
저런 몸매로는 관광지에서 레저 다이빙이나 스노클링 몇 번 해 본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한 눈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거센 조류에 맞서며 수중 30m 부근에서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르는 사람을 구하기엔 知力(지력)은 고사하고 體力(체력)으로도 역부족임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의심나면 다이빙 경력부터 물어보거나 확인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방송인들은 이 절차를 생략했다.
이XX라는 사람도 그날 오후 MBN에 등장해서 현장의 구조작업을 비판하며 ‘다이빙 벨’을 쓰면 된다고 주장했다. 천안함 폭침을 부정하던 이 사람의 주장이 이미 황당한 내용이었음이 밝혀진 지도 4년이 다 돼 가는데, 방송과 언론들은 진영논리에 휩싸인 채 李 씨의 낚시밥을 또다시 덥석 물고 말았다. 하지만 ‘다이빙 벨’은 급류에서 무용지물임이 서서히 밝혀졌다. 뒤늦게 방송과 언론들도 발을 빼는 중이다.
아마추어들이 전문가를 압도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말과 글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땀과 기술로 먹고사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세상이 됐다. 이들은 말과 글로 명분을 만들어 칼로 삼는다. 칼자루를 쥔 쪽은 사생결단하고 상대를 공격하면서 ‘완벽하지 못함’에 대해 단죄하려 든다. 거짓이 사실을 압도한다. 명분으로 무장한 진영논리가 거짓세력을 권력화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士林 당파가 무색하다.
3. 거짓과 無知의 암흑속으로 침몰시키려는 세력들
왜 우리는 정확성에 대해 둔감한 국민이 되었을까? 왜 우리는 정확성을 거부하면서도 상대에게는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일까? 언제부터 이런 증상을 앓기 시작한 것일까? 수 천년 이어져 온 ‘주먹구구의 문화’를 타파한 것이 5·16 군사혁명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는 급속히 ‘명분’과 ‘체면’을 앞세우는 조선조 유교사회로 침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사리분별을 따지면 ‘과격하다’, ‘싸움꾼 같다’란 손가락질이 드세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진영논리가 판을 친다.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변론을 이어가면 어느새 ‘일리 있다’며 편드는 패거리가 등장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패싸움으로 변모한다. 패싸움은 항상 이 나라의 정치권 어느 언저리와 맞 닿아있고, 그 양태는 조선조 黨派(당파)싸움의 모양새를 띤다.
절대로 사실이 거짓을 이기지 못하는 사회가 됐다. 명분만 있으면 그 어떤 거짓말도 세력을 형성해서 살아남는다. ‘명분’은 선비가 重視(중시)여기는 ‘예의’와 ‘체면’의 방패가 된다. ‘명분’을 보호막으로 삼는 ‘예의’와 ‘체면’만 갖춰지면 ‘인맥’과 ‘신분’도 유지된다. 선비가 중시여기는 ‘예의’와 ‘체면’이 전문가들이 중시 여기는 ‘사실’과 ‘정직’을 압살한다.
사실을 기록한 역사를 뒤틀고도 여전히 學界(학계)에서 군림하는 학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誤報를 밥 먹듯 하고도 살아남는 언론, 헌법의 해석을 제멋대로 해도 身分戰線(신분전선)에 이상 없는 검찰과 사법부도 한 통속이다. 민생법안을 장식품 정도로 치부한 채 궤변으로 날을 지새우는 정치권이 그들의 대표주자이다. 이들 모두는 말과 글로 밥벌이를 하는 지식층으로서 조선조 선비들의 DNA를 불려 받았다. 그들이 우리 사회를 거짓과 無知(무지)의 암흑속으로 침몰시키려 하고 있다.
4. 거짓과 無知의 암흑을 깨부숴야 한다
다시 세월호 참사로 눈을 돌려 보자. 정작 세상이 무너질 듯한 절망속의 유족들에게 빛이 되어줄 救援(구원)의 말과 글은 거짓 선동이 아니라 올곧은 정직함에서 비롯된다. 정직한 말과 글만이 그들에게 오늘의 悲劇(비극)을 딛고 일어설 힘이 된다.
며칠 전 기고된 金東吉 선생의 ‘Life must go on though good men die (선한 자가 죽더라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글처럼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도록 안내해 주어야 한다. 정직해야만 진정한 용기가 생겨난다. 비극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직함으로 이번 사건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사는 인생은 불확실성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 살든 프랑스에 살든 아프리카 밀림이나 남태평양의 피지 섬에 살든 이런 비극이 올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사고에서는 神을 믿든 안 믿든 무관하고, 착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상관없으며,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무차별적으로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을 수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敵은 지금도 불확실성의 커튼 뒤에서 우리의 삶을 노리고 있으며,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불확실성의 그늘을 조금이라도 줄여가도록 현실을 딛고 일어서서 노력하자는 다짐이어야 한다. 그것만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救援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체면이나 허풍같은 허위의식은 벗어던지고 냉철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거짓과 無知의 암흑을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 언론이 처음 이 세상에 나오면서 시작된 ‘啓蒙主義(계몽주의)’는 아직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언론 스스로가 가장 먼저 계몽되어야 할 것 같다. ■
수시로 발작하는 선동언론의 前科 목록
趙甲濟
*선동언론의 前科 목록
*1998년 좌경언론이 주도한 반공(反共)소년 李承福(이승복) 지우기
*2002년 좌경 언론이 밀어준 이회창 아들 병역 관련 김대업의 사기 폭로
*2003년 MBC 등의 김현희 가짜몰이
*2004년 KBS와 MBC의 탄핵사태 편향 보도
*2008년 광우병 亂動(난동) 사태와 MBC 등 공영방송의 선동
*2010년 좌경 언론의 천안함 폭침 의혹 부풀리기
*2012년 한겨례와 SBS가 주도한 張俊河(장준하) 타살설 선동
*2014년 세월호 보도: 해경에 대한 집중 난타, 다이빙벨 해프닝 등
*구조화되고 생리화된 언론의 선동
1. 좌편향된 언론은 신념, 그것도 왜곡된 신념을 사실보다 중요시한다. 이념의 틀에 사실을 구겨 넣는다.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사실을 왜곡, 조작하는 데 언론이란 간판과 특권을 이용한다. 좌경 기자는 거의가 정치화된 선동꾼들이다. 언론을 자칭하고 언론의 자유를 악용하여 언론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위협하는 본산은 종북좌익 이념에 물든 기자들이다. 정치장교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런 정치기자이다.
2. 한국 언론계에 종사하는 기자는 2만 명이 넘고, 70% 이상이 20~40대이다. 교육과정에서부터 좌경화된 이들이다. 이들이 언론계의 中樞(중추)를 장악하고 있다.
3. 선동 기자들이 기승을 부리는 때는 바로 선거철이다. 선거판을 정권탈취와 체제파괴의 목적에 이용한다. 2002년 大選(대선) 기간의 김대업 사기와 신행정수도 공약 사기, 2004년 총선 직전 KBS-MBC의 탄핵 반대 선동, 2010년 지방선거 때의 천안함 의혹 선동, 2011년 서울시장 선거 때의 나경원 1억 원 피부 관리설 선동, 2012년의 장준하 타살설 선동 및 무비판적 단일화 홍보가 대표적 사례이다. 모두가 좌경 언론이 주도하였다.
4. 선동과 조작 세력은 주로 종북좌파 세력이다. 좌경 언론이 거짓말 前歷者(전력자)의 말을 계속 중계해준다.
5. 광우병 선동, 김현희 가짜몰이 등의 범죄를 저지른 기자들을 언론계에서 추방하고 선동꾼들을 정치적으로 매장시켜야 하는데 그런 自淨(자정)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
6. 좌편향된 선동 언론은 선동 정치인과 한통속이 되어 유권자들을 속이는데(게으른 기자와 부지런한 정치꾼의 합작) 그 결과는 前科者(전과자)가 20%, 국가반역범죄 前科者가 10%인 19代 국회이다.
7. 선동언론이 유권자들의 분별력을 망가뜨리면 어린 민주주의는 반역자와 사기꾼의 노리개가 된다. 이런 언론은 한국 민주주의의 적(敵)이다. 공동체의 危害(위해)요인이다.
8. 기자들이 좌경화함으로써 언론의 원칙, 즉 正名(정명)의 원칙, 헌법과 문법, 사실과 공정성의 원칙이 파괴되었다.
9. 보다 근본적인 언론파괴의 원인은 언론이 한글專用(전용)으로 自我(자아)부정적, 韓國語(한국어)파괴를 자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 동아, 중앙일보 등 이른바 정통 언론까지도 좌경언론에 끌려다니는 현상은 좌경화의 한 가닥인 漢字(한자)말살에 동조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보수 언론은 좌경언론의 정체와 한반도 이념전쟁의 본질을 안이하게 파악하고, 안이하게 대처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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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고엽제 매립'은 오보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오보한 언론이 사과도 정정도 하지 않았기 때문-
한국 언론의 가장 큰 병폐는 誤報(오보)를 하고도 바로잡기를 거부하거나 誠意(성의) 없이 한다는 점이다. 한겨레신문은 2011년 5월19일 주한미군이 경북 칠곡군 미군기지에 고엽제를 대량매립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단정적으로 보도하였다.
<주한미군이 1978년 암 등 치명적 질환을 일으키는 독성물질인 고엽제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럴 기지에 대량 매립한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시비에스>(CBS) 계열사인 <케이피에이치오>(KPHO) 방송은 지난 13일(현지시각) 캠프 캐럴에서 근무한 미군 전역자 3명을 인용해 이렇게 보도했다. 1968~69년 미군이 비무장지대에 고엽제를 살포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바 있으나, 후방의 민간인 거주지역 부근에 고엽제를 버린 사실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2011년 5월19일, 한겨레)
그해 12월29일 한겨레신문은 이런 기사를 실었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미군기지 ‘캠프 캐럴’에 대한 환경오염 조사 결과, 땅속 토양에서 고엽제와 관련된 성분이 검출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미 공동조사단은 과거 이곳에 고엽제가 매립됐다는 의혹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짓고 퇴역 미군 스티브 하우스의 폭로 이후 7개월여에 걸친 조사를 마무리했다.>(2011년 12월29일, 한겨레)
한겨레는 자신들의 오보에 대하여는 설명도 사과하지 않았다. MBC도 '섬뜩한 폭로'라고 표현, 미국인 주장을 믿도록 유도하는 誤報(오보)를 하였다.
<1970년대 경북 칠곡 미군기지에서 일어난 섬뜩한 일이 폭로 됐습니다. 주한 미군이 수천 킬로그램의 맹독성 고엽제를 파묻었다는 겁니다. (중략). 우리 정부는 주한 미군 측에 고엽제의 매립 경위와 현재 상태 등에 대한 즉각적인 공동조사를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2011년 5월19일, MBC 뉴스)
KBS와 경향신문 보도는 객관적 전달 형식을 취하여 誤報라고 볼 순 없다.
<주한 미군이 30여 년 전 경북 칠곡군의 한 미군기지에 고엽제를 대량 매립했다는 전직 주한미군의 증언이 나와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KBS 뉴스)
<주한미군이 고엽제인 ‘에이전트 오렌지’를 대구 인근 미군기지 내에 대량으로 파묻었다는 주장이 미 퇴역군인에 의해 제기됐다. 미 애리조나 주 지역TV 방송 KPHO-TV(미국 CBS 계열)가 최근 탐사보도를 통해 1970년대 대구 칠곡 인근 캠프 캐롤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이 ‘에이전트 오렌지’ 수천 킬로그램을 그대로 땅에 매립했다고 보도했다.>(경향신문)
SBS는 2011년 5월21일 뉴스에서 폭로자를 인터뷰, 고엽제 매립을 사실이라고 단정한 바탕에서 선동적 보도를 하였다.
<앵커: 미군이 경북 칠곡에 묻은 고엽제 양이 당초 알려진 것보다 2배나 많은 10만 리터 정도로 드러났습니다. 그때 복무 했던 미국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우리 국민들에게 사죄했습니다.>
한겨레 등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미국인의 주장을 사실로 조작해간 배경엔 反美이념이 있었지 않았을까? 주한미군에 불리한 기사는 언론의 윤리를 무시하고 소신대로 밀고 나가도 괜찮다는 생각 말이다. 한 미국인의 허위폭로로 그동안 주한미군이 당한 명예훼손, 韓美 양국 정부의 예산 낭비, 좌익들의 모함은 어떻게 보상 받나? 한국은 부정직을 응징할 수준의 나라가 아직 못되는 모양이다.
타이타닉호 침몰 때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살아난 남자중엔 타이타닉호를 보유한 화이트스타라인 회장 브루스 이스메이도 있었다.
趙甲濟
1912년 4월14일 밤 세계 최대의 여객선인 타이타닉호가 처녀항해중 대서양에서 氷山과 충돌, 15일 이른 새벽에 침몰하였을 때 2223명이 타고 있었다. 31.8%인 706명만이 살아남고 1517명이 사망하였다. 여자승객의 74%, 어린이의 52%가 살아남았는 데 반하여 남자승객의 20%만이 구조되었다. 1등석 승객 중에서 어린이 전원과 144명의 여성 중 139명이 살았고 남성은 70%가 죽었다. 어린이와 여성들을 우선적으로 구명보트에 태웠기 때문이다.
2등석 손님 중에선 여성의 80%가 구조되었고, 남자의 90%가 죽었다. 1,2등석 손님들은 당시 미국과 영국의 최상류층이었다. 미국 최고의 부자라고 불리던 존 제이콥 아스톨씨는 아내를 데리고 와서 보트에 태운 뒤 同乘(동승)하기를 거부하고 배에 남아 있다가 죽었다. 또 다른 巨富(거부) 벤자민 구겐하임은 자신에게 돌아온 보트의 자리를 여성에게 양보하고 죽었다. 그는 그 여성에게 '내 아내에게 내가 정정당당하게 행동했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월래스 하트레이가 지휘하던 8명의 樂團(악단)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들은 기울어가는 갑판에서 계속 연주를 하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승객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배가 거의 수직으로 기울어 침몰을 시작할 때까지 연주를 했다고 하여 타이타닉호를 다루는 영화에마다 등장하는 장면이 되었다.
이 樂團이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목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으나 찬송가 '내 주를 가까기 하게 함은'이라는 게 定說(정설)이다. 하트레이는 평소에도 '만약 내가 탄 배가 침몰하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을'을 연주하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살아난 남자중엔 타이타닉호를 보유한 화이트스타라인 회장 브루스 이스메이도 있었다. 이스메이는 선장에게 속도를 더 내도록 압박, 사고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氷山(빙산)과 충돌한 뒤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선장에게 지시, 침몰을 앞당겼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대한 비방의 핵심은 최종책임자가 어떻게 살아났느냐였다. 선장도 죽고 수많은 영국과 미국의 부자들이 구명정 탑승을 포기, 배와 같이 침몰하였다. 미국 최고 부자중 한 사람이었던 구겐하임은 애인을 데리고 탔었는데 애인을 구명정에 태워 보내고 자신은 남아 '신사답게'(바에서 술잔을 비우면서) 최후를 맞았다.
이스메이는 구명정 C를 탔는데, 그는 "배를 탈 때 둘러봤더니 아무도 없었다"고 변명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타이타닉호가 거의 수직으로 침몰할 때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그가 만든 배가 처녀항해에서 비참한 꼴을 당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영국과 미국의 언론은 이스메이를 '타이타닉호의 비겁자'라고 부르면서 조롱하였다. 한 작가는 그를 비방하는 詩를 썼다. "캄캄한 밤중의 바다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는 건 바닷사람의 의무이고, 군중과 함께 도망치는 건 船主(선주)의 고귀한 권리인가?"라는 문장도 있었다.
영국의 上流(상류)사회도 그를 파문하다시피 하여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는 곧 해운회사에서 은퇴, 아일란드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37년에 74세로 죽었다.
월남전 때 미군 사령관이었던 웨스터모어랜드 장군은 미국의 정예 공정사단의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이 부대가 낙하 훈련을 했다. 물론 그도 뛰어내렸다. 그날 강풍에 휘말려 부대원 7명이 죽었다. 다음날도 강풍이 불었으나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낙하 훈련을 중단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다만, 자신이 먼저 뛰어내려 강풍을 확인해볼테니 기다려보라고 했다. 사단장이 홀로 낙하했다. 着地(착지)엔 성공했으나 낙하산이 强風(강풍)에 휩쓸려 끌려가다가 겨우 정지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하여 훈련을 중단시켰다.
영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누가 만들어서 준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이 王權(왕권)과 싸워 쟁취한 것이다. 그들은 富에 따른 명예와 의무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영국의 신사는 힘 센 사람이 아니라 '신사답게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자본가였다. 체제를 만든 사람들이 그 체제의 혜택을 보면서 또 그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할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자본가들은 독재자와 선동가로부터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 자유민주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인 자본가와 기업인들은 애국운동단체를 돕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敵(적)들을 돕고 있다. 그들은 독립투사들과 군인들과 혁명가들과 엘리트 관료들이 만들어준 체제의 혜택만 볼 뿐 체제를 싸워서 지켜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비겁한 富者(부자)들이다. 그러니 좌파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19세기말 영국이 인구 3억의 인도를 다스릴 때 인도엔 약 15만 명의 영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6만 명은 군인이었다. 영국 군인들은 이 광활한 대륙의 변경에 퍼져서 주둔했으므로 보통 인도인들은 영국 군인들을 볼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여 이런 少數(소수)로써 多數(다수)를 다스릴 수 있었는가.
인도행정청(India Civil Service: ICS)이 그 비밀이었다. 인도행정청에는 약 1000명의 영국 공무원들이 근무했는데, 이들이 인도 각지에 파견되어 식민지 행정을 맡았다. 이 1000명이 사실상 3억 인구를 다스린 것이다. 이 3억 인구는 언어만 해도 20가지이고 지방語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다가 종교 인종도 각양각색이었다. 이런 인도를, 영국 공무원 한 사람이 30만 명씩 안정적으로 관리했던 셈이다. 이 불가사의한 행정의 비밀에 대한 연구서적이 수년 전 출판되었다.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라는 사람이 쓴 《지배계급》(The Ruling Caste, 출판은 Farrar, Straus, Giroux, 381페이지, 27달러)이 그것이다.
인도행정청에서 근무할 영국인을 뽑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영국정부는 애국심과 자부심에 기반한 公人(공인)윤리를 반복교육으로 깊게 심었다. 학생들은 인도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다. 영국정부는 이들에게 그런 현지 관련 지식보다는 '제국의 魂(혼)'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인도에 대한 지식은 현지에 부임하여 배우도록 했다. 그 대신 大英(대영)제국의 知的(지적)이고 도덕적인 우월성에 대한 교육이 행해졌다. '유럽 도서관 한 개의 선반위에 올라 있는 책이 인도와 아라비아 전체의 문학작품을 모두 모은 것보다 더 우수하다'는 식의 교육이었다.
著者(저자) 길모어씨는 이 책에서, '제국주의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무장한 이 젊은 관료들은 '책임을 떠 안는 것의 쾌감'을 간직하고 어떤 경우에도 조국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이들이 인도에 가서 부임하는 곳은 교통이 불편한 奧地(오지)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무슨 사고가 일어나도 상부 지시에 따라서 행동할 수가 없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결단력이 요구되었다. 영국관료들은 실용주의와 상식에 기초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부임 초기부터 터득해나갔다.
소요사태를 예방하려면 우선 지배층이 민중을 자극하지 않아야 했다. 영국관료들은 인도사회의 풍습이나 사회적 관행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불태워 순장하는 식의 야만적인 풍습은 금지시켰다. 인도사람들은 세금을 내고, 지역관리들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영국인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영국관리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현지의 언어에 숙달해야 했다. 이 식민통치 관리들의 행동윤리는 피지배층을 대할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이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영국관리들은 절대로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인도 민중의 定評(정평)이 이들의 통치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인도는 독립한 뒤에도 영국행정청의 이름을 India Administrative Service로 바꾸고 그 골격을 이어갔다. 물론 영국인은 인도관리로 교체되었다. 인도는 영국관리들이 남긴 전통, 즉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한 公職(공직)규범을 그대로 계승하여 오늘날 세계최대의 민주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 행정관료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국은 각자가 자신의 義務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넬슨)"
趙甲濟
"의무, 명예, 조국(Duty, Honor, Country)"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모토이다. 조국보다 의무를 더 강조한다. 애국심보다 의무감을 더 앞세운 것이다. 장교의 명예심과 애국심은 의무를 다할 때만 증명되는 것이다. 의무를 다함은 애국의 구체적 표현이다.
1805년 10월21일 영국과 유럽의 운명을 건 트라팔가 海戰(해전)을 앞두고 호레이셔 넬슨 영국 제독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와 싸우러 나가는 영국 함대에 유명한 명령을 내린다.
신호 깃발로 전해진 명령은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였다. 원래 넬슨은 신호 담당 장교 존 파스코 중령에게 "England confide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라고 지시했는데 파스코 중령은 confides(믿는다)를 expects(기대한다)로 교체할 것을 건의, 허락을 받았다.
<영국은 각자가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는 이 명령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英軍(영군)이 이기고 넬슨이 戰死(전사)한 뒤 유명해졌다. 原文(원문)은 조금씩 가필 수정되었다. "England expects every man to do his duty"로 달라진 문장이 퍼지는 바람에 세인트 폴 성당에 있는 넬슨의 무덤엔 그렇게 써져 있다. 1811년 존 브라함이란 테너 가수가 '넬슨의 죽음'이란 노래를 작곡, 유행시켰는데, 이 문장이 들어갔다.
군사문화의 精髓(정수)를 이어가는 영국의 海軍(해군)과 미국의 陸軍(육군)이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전투라는 비상 상황에선 各自(각자)가 의무를 다하는가의 與否(여부)에 성패가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이 사병이나 말단 직원이라도 문제가 생기는데 대통령, 장관, 장군, 사장, 선장이 그러할 경우엔 대참사가 일어난다. 義務는 의로운 일에 힘쓴다는 뜻이다. 의무를 다하는 것이 正義이다.
세월호 침몰의 과정을 살펴 보면 任務(임무)를 다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고 이것이 人命희생을 결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船社(선사) 경영자는 짐을 규정대로 싣지 않아 안전운항의 의무를 버렸다.
2. 船長(선장)은 맨먼저 배를 버리고 달아나 救難(구난) 지휘의 의무를 위반하였다.
3. 1등 항해사는 규정을 위반한 貨物積載(화물적재)를 눈감아 주어 1당 항해사의 職務(직무)를 어겼다.
4. 海運(해운) 관련 공무원들은 안전운항을 위한 규정이 실천되고 있는지를 감독해야 할 의무를 버렸다.
5. 海運 담당 기자들은 沿岸(연안)해운의 문제점을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사실보도의 의무를 버렸다.
위의 다섯 단계에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의무를 다하였더라면 세월호 침몰은 막을 수 있었다. 수많은 직업이 서로 연결되어 사회를 구성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는 직업 윤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瓦解(와해)된다.
세월호 사건은 "나는 나의 직무를 다하고 있는가"라는 話頭(화두)를 던졌다. 안전을 위한 새로운 정부 조직을 만들고 책임자들을 감옥에 보내도 규정과 의무를 지키지 않는 풍토에선 사고를 막을 수 없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옳다. 특히 남탓의 전문가들인 기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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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라 克日派다
그가 친일파라면 나는 매국노이고 토요다로 창씨개명한 前 대통령도 나을 것이 없다. 그를 무덤에서 불러내 폄하하려는 자들은 그 무덤에 대신 파묻히고 말 것이다.
趙甲濟
"오늘날 한국인의 가장 큰 타락은, 특히 배운 사람들의 가장 큰 타락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미워할 줄 모르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사랑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김일성을 비호하고, 박정희를 저주하는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 없다."
세월호 침몰을 기회로 삼아 朴槿惠(박근혜) 대통령을 공격하는 세력이 아버지 박정희를 모함하는 거짓 선동 글들을 인터넷 상에 또다시 퍼뜨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은 2012년의 두 차례 선거에서 새누리당을 다수당,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함으로써 세 가지 주권적, 헌법적 결단을 내렸다.
"헌법을 지켜라. 현대사를 긍정하라. 종북좌파는 안된다."
특히 일부 세력이 '친일파의 딸' '독재자의 딸'이라고 욕하던 이를 最多(최다) 득표로써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게 만들었으니 친일타령이나 현대사 부정은 정치적으로 매듭지어진 셈이다.
그래도 朴正熙(박정희)를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朴正熙는 5년 남짓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장교의 군복을 입었다. 군관학교 생도로서, 또 北중국에 주둔한 만주국 부대의 장교 신분이었다. 이 사실을 들어 그를 친일파라고 모는 것은 무지막지한 왜곡이다. 그가 근무한 적도 없는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다고 우기면서 항일세력 사냥을 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범죄자다.
당시 한국인들은 日帝(일제)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국인을 보호할 나라가 따로 없었다. 한국인이 충성을 바칠 국가가 없었다. 한국인은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反日(반일)의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냐 日帝냐의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日帝를 선택했다면 그런 한국인은 반역자로 불려도, 친일파라고 불려도 좋다.
대한민국이 없었던 시절인데 日帝를 거부한다는 것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였다. 하나는 만주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길이었다.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反日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길이었다. 이 험난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친일파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인간들은 위선자이다.
지하철에 떨어진 아기를 구하기 위해서 뛰어들어 아기를 살리고 자신은 죽은 시민은 영웅이다. 그런 영웅의 용기는 길이 길이 기려야 한다. 이는 산 자의 의무이다. 그렇다고 그때 왜 다른 사람들은 뛰어들지 않았느냐고 욕을 하고 그런 방관자들을 비겁자라고 두고두고 매도한다면 그는 자신도 지킬 수 없는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는 위선자이다.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상 천국이 이뤄지기 전에는.
더구나 조선백성의 지도자인 고종이 일본에 항복했다. 말하자면 장수가 敵軍(적군)에 항복한 것이다. 고종을 친일파로 몰지 않고선 백성들이 친일했다고 욕할 순 없다. 장수가 항복했는데도 졸병들이 왜 죽을 때까지 싸우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원에 가 봐야 한다.
日帝 시대에 이 땅에서 태어나 죽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日帝에 형식상 순응해야 하는 것이 그중의 하나였다. 日帝가 만든 법이 비록 아니꼽더라도 지켜야 먹고 살 수 있었다. 日帝의 교육제도가 비록 皇國臣民(황국신민)을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더라도 학교에 다녀야 했다. 日帝가 만든 경부선과 電氣(전기)와 水道(수도)를 이용하여야 했다. 이런 일을 했다고 해서, 즉 살아남기 위해서 최소한의 순응을 한 사람까지도 친일파라고 부를 수 있는가.
朴正熙가 대구사범에 들어가 교사가 되어 문경에서 교사 노릇을 했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는 나라 없는 朝鮮人(조선인)으로서 日帝에 겉으로 순응하면서 살아간 것뿐이다. 그가 이 무렵 이승만 김구처럼 초인적 행동을 하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한국인 전부가 李承晩 金九처럼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만 했다면 해방이 왔을 때 누가 공장을 돌리고 누가 군대를 만들었겠는가. 日帝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그 日帝로부터 先進(선진) 과학과 기술을 배우고 그렇게 배운 기량을 대한민국 건국 후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썼던 많은 사람들은 만주의 독립운동가 못지 않은 애국자들이다.
그러면 누가 친일파인가. 日帝에 순응한 정도가 아니라 日帝에 적극적으로 복종하여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조선인을 괴롭힌 사람들이 친일파이다. 두 가지 조건이 중요하다. 日帝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복종한 것과 조선인을 괴롭힌 일,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면 친일파이다. 일본의 경찰에 취직하여 파출소에서 근무하면서 주로 도적을 잡는 일을 했다면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가 日帝 경찰의 特高(특고)형사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잡는 일에 종사했다면 그는 친일파이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버린 친일파를 불러내 조사하자고 앞장선 과거 열린당 두 국회의원의 아버지는 헌병간부와 특무경찰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소탕이 主임무였다. 이들이 친일파이다.
朴正熙가 조선인 탄압과는 무관한 만주국의 장교가 되었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몰아가려는 사람들은 만주국 장교로서 朴正熙가 독립군을 사냥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린다. 朴正熙 전기를 쓰면서 그의 하루 하루 행적을 추적했던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박정희는 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 북중국의 만주군에 배치되어 毛澤東(모택동) 군대와 싸웠다. 毛澤東 군대와 싸운 것을 가지고 친일파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毛澤東 군대는 당시 일본의 敵이었을 뿐 아니라 그 뒤엔 대한민국의 敵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抗日(항일)투쟁을 한 것이 곧 애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을 세우기 위하여 항일을 한 것이지 한민족에게 자유와 독립을 주기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었음을 북한정권이 증명한다.
朴正熙가 만주국 장교 군복을 입고 있을 동안 그가 장교로서의 힘을 이용하여 조선인을 괴롭히거나 日帝에 아부했다는 증언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 증언은 많다. 즉, 비록 만주국 군인이었지만 항상 조국의 독립을 생각했고 독립군 노래를 즐겨 불렀으며 만주군 내의 독립운동 조직이 그를 포섭대상으로 여길 만큼 민족정신이 강했다는 등등의 이야기이다.
조국이 없던 시절 식민지의 한 청년이 일본의 괴뢰국 군인이 되어 공산군과 싸웠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려는 것은 그가 대통령으로서 이룩한 조국 근대화의 업적을 말살함으로써 민족사의 가장 찬란한 한 章(장)을 없애려는 의도를 깐 역사파괴 행위이다. 이 자들은 여운형처럼 친일한 좌익들은 친일파 명단에서 빼준다. 그들의 목적이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것임을 자백하는 행태이다.
人生(인생)의 복잡하고 기복 많은 본질을 무시하고 일순간의 약점을 캐내어 그 사람과 한 시대의 모든것을 깡그리 부정하려 드는 선동술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5년 韓日수교를 결단함으로써 일본의 자금과 기술을 받아들여 낙후한 한국경제를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런 경제발전 과정에서 만들어진 三星(삼성)은 일본의 대표기업인 소니를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전자회사로 컸다. 이것도 親日(친일)인가. 경제발전으로써 우리가 일본인을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도록 만든 가장 큰 공로자는 朴대통령이 아닌가.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라 克日派다. 그런 그가 친일파라면 나는 매국노이고 토요다로 창씨개명한 前 대통령도 나을 것이 없다.
한 나라의 품격은 국민들이 어떤 사람을 기리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동족 600만 명을 희생시킨 金日成 金正日 부자를 추종하던 자들이 민족사에서 처음 보는 경제적 풍요를 가져온 위인을 온갖 악랄하고 치사한 방법을 동원하여 매장하려고 한다. 이런 세력의 득세를 보면 한국은 내일 망할 것 같은데, 다행인 것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국민들이 다수라 朴대통령은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역대 인물 1위로 꼽히고 있다. 민주 국가에서 70%가 넘는 지지는 전체주의 국가의 100% 지지보다 더한 거의 우상숭배 수준의 인기이다. 그런 朴대통령을 무덤에서 불러내 폄하하려는 자들은 그 무덤에 대신 파묻히고 말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가장 큰 타락은, 특히 배운 사람들의 가장 큰 타락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미워할 줄 모르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사랑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김일성을 비호하고, 박정희를 저주하는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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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애국자 朴正熙를 친일파라고 모는 이들은 金姸兒(김연아) 선수가 금메달 받는 장면은 묵살하고 엉덩방아 찧는 장면만 틀어주면서 3流라고 욕하는 격이다. 朴正熙의 滿軍(만군)장교 경력만 부각시키고, 장교 시절에 배운 군사기술로 나라를 지켜내고 나라를 근대화하여 '일본을 우습게 여기는 세계 유일의 나라'로 만든 사실은 묵살한다.
이런 위선자들에 대하여 신약 성경 마태복음 7장은 名文(명문)을 남겼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위선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좌파들이, 북한정권을 위하여 봉사한 진짜 친일파들은 빼주고, 朴正熙, 安益泰(안익태), 徐廷柱(서정주), 金東仁(김동인), 金東振(김동진), 張勉(장면), 홍난파, 金性洙(김성수), 방응모 같은 애국자들을 친일파로 모는 이유는 세계사의 성공스토리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든 주인공들을 매도하여 조국을 태어나선 안 될 나라였다고 선전함으로써 敵(적)을 이롭게 하고 젊은이들의 영혼을 타락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청산할 친일파는 없고 숙청해야 할 친북파는 많은 시대에서, 그 친북파의 핵심이 주도하는 친일파 소동은 대한민국을 불리하게, 敵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념적 편향성에 입각하여, 국민들의 70%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여론조사에서는 세종대왕보다도 더 위대한 민족사의 제1인물로 평가되는 박정희를 친일파로 모는 것은 그들의 자충수이다. 무식하면서도 오만한 좌익들은 항상 내부적 요인, 즉 자충수로 망한다. 이런 親北派(친북파)들에게 내가 남기는 경고는 '저주 받지 않으려거든 저주하지 말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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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槿惠는 朴正熙의 실질과 능률의 리더십을 배울 때
정보를 장악해야 상황을 장악한다.
李東昱 (평론가)
=다시 보는 法家的 통치 기술 C₄I=
法家型 지휘통제력의 근원
지휘(Command), 통제(Control), 통신(Communication), 컴퓨터(Computer), 정보(Intelligence)를 요약한 C₄I는 원래 컴퓨터가 발명되기 전인 1970년대 중반에 空地합동작전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고안된 ‘전술지휘자동화 체계’(당시엔 C₃I) 였다. 그렇기는 해도 실제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兵家(法家)의 세계에서 살아온 군인들은 이 개념을 터득하고 실제에 적용해 왔었다. 朴正熙 少將(소장)과 육사 8기생들이 주축이 된 5·16 혁명과 조국 근대화의 핵심 요체도 C₃I를 바탕한 조직력이었다. 훗날 세계 여러 개발도상국가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을 배워 가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을 흉내 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61년 5월16일 새벽에 朴正熙 少將이 지휘하는 반란군의 지휘, 통제, 통신과 정보력이 政府軍(정부군)보다 약했다면 그 날의 쿠데타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군복을 벗고 출마한 朴正熙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신생정당인 공화당의 선거캠프가 지휘, 통제, 통신, 정보력을 제대로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15년간 선거판을 휘저었다는 야당을 따돌리고 승리할 수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중화학공업 육성을 필두로 하는 조국근대화의 길목에 선 朴正熙 대통령은 C₃I를 유지하기 위해 독재자의 소리를 들어가면서 維新(유신)을 단행했다. 그 維新의 시대에 정부는 ‘민주주의’라는 名分으로 공격해오는 儒家的(유가적) 민주화 세력을 軍 출신들로 형성된 法家的(법가적) 국가주의 세력의 힘으로 침묵시키고 본인이 직접 國政(국정)을 지휘·통제했다.
1974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매일 ‘시국대책회의’를 주재했다. 5공 시절의 ‘관계기관대책회의’의 前身(전신)인 이 기구가 바로 정권의 의사결정기구였다. 국무총리, 당의장, 정보부장, 비서실장 등이 참석했고 정보부의 1일정보가 회의의 주요 아젠다가 되곤 했다. 지시가 내려가면 이행 과정이 중간중간 보고되었고, 점검과 수정과 조율이 소통되었다(Plan-Do- See). 통제력과 통신력은 정보기관에 의해서 작동됐다. 이해가 상충하는 정부 부처 간 회의에서는 정보기관원이 調整官(조정관)이란 이름으로 끼어들어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부처 수장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정돈했다. 정보력은 조정관들의 업무상 도구였다.
이 당시 공직사회는 공무원을 조선조의 科擧(과거)처럼 考試(고시)를 통해 임용했으나 그들의 규율은 조선조의 儒家的 통치술과 달리 軍 출신들에 의한 法家的 통치술인 C₃I에 영향을 받았다. 가족주의에 함몰돼 국가관이 없는 儒家的 통치술의 결정적 단점을 박정희 대통령은 法家的 통치술로 보완했다. 朴 대통령은 공직사회를, ‘예의’와 ‘충성’을 기치로 내건 선비집단이 아니라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들로 채웠다. 이것이 무너지기 시작한 때는 경호실장과 정보부장의 ‘예의’와 ‘충성’ 경쟁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공직사회는 상층부에서 하층부에 이르기까지 ‘능률’과 ‘실질’의 경쟁터였었다. 선비와 관료가 아니라 기능공과 기술자, 문학자와 문인이 아니라 과학자와 군인들이 1392년 이후 처음으로 대접받는 세상이 만들어졌었다. 이것이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바탕이었다.
이제 와서 이 제도의 결점만을 이야기하지는 말자. 당시 대한민국은 오일쇼크의 풍랑을 뚫고 중화학 공업과 방위산업, 포항제철 건설과 새마을 운동 등 거대 國策(국책)사업들을 부단히 추진하던 시절이었다. 월남의 공산화와 김일성의 局地戰(국지전) 및 땅굴 도발, 영부인 陸英修(육영수)의 암살과 판문점 도끼 만행 등을 겪던 시절이었다. 1주일이 멀다하고 무장공비와 무장간첩이 출몰하던 시절, 건설과 전투가 병행했던 시절, 대한민국과 국민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놓여 있었던 시절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朴槿惠(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여겨졌던 50대 이상의 국민들 중 일부가 세월호 침몰사건과 서울시 지하철 사고로부터 정부의 지도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고 발생의 정치적 책임을 묻는 감정적 처사가 아니라 사고 직후부터 보여주는 정부의 매끄럽지 못한 사태수습 능력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것이다. 이념과 철학이 부재한 親朴(친박) 진영과 그들이 옹위하는 朴槿惠 대통령이 위협받는 모습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2002년 미선 효순 양 사건과 2008년 광우병 선동 사건을 겪은 愛國(애국)-보수 진영이 매우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만약, 작금의 청와대가 조금이라도 위기의식을 갖는다면 이제라도 눈 비비고 박정희 시절의 정책결정구조인 C₃I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朴槿惠 대통령이 부친인 故 朴正熙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 자산 제1호가 바로 法家的 지도력의 요체인 C₃I이기 때문이다.
정책의 실패는 대부분 정보(Intelligence)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C₃I나 C₄I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면 단연코 ‘정보(Intelligence)’이다. 인문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학문으로 哲學(철학)을 꼽고, 哲學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과목으로 認識論(인식론)을 든다. 그 認識論이 현실에서는 정확한 정보를 의미한다.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대응책이 달라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흔히 정보를 information이라고 하지만 유독 정보기관과 연관되어서는 Intelligence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최고 의사결정권자, 최고 통치권자를 위한 정보는 知性(지성,Intelligence)이 필요한 심도 깊은 판별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송어와 숭어를, 산소통(Oxygen Tank)과 공기통(Air Tank)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자가 정확한 정보 수집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C₃I나 C₄I가 제대로 발휘되는 조직이 작금의 우리 정부에 있었더라면 세월호 사태에 이 정도로 무기력하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정상적인 조직이었다면 우선 Intelligence(정보) 수집 담당자가 가장 먼저 현장에 접근해 디테일한 정보를 채집하고 이를 최고의사결정자의 정책결정과정에 포함되도록 신속 조치했을 것이다. 이때 현장은 사고 현장인 바다뿐 아니라 선박회사가 보유한 세월호 관련 제반 정보를 의미한다. 특히 乘船(승선)인원, 구조와 실종자 수, 화물의 내용, 선박의 내부 구조, 사고 海域(해역)의 水溫(수온)과 潮流(조류)의 특성 등등 사태수습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들이 정확하고 신속하게 수집되었을 것이다. 책임추궁을 위한 원인분석은 나중의 일이다.
국가기관에 의해 수집된 정보는 정부의 최고결정권자나 최고정책기구에 우선적으로 배포된다. 이유는, 정보가 힘을 갖기 때문이다. 정보를 장악하면 지휘(Command), 통제(Control)에 이어 통신(Communication)도 쉽게 장악할 수 있다. 나아가 컴퓨터(Computer)를 통한 SNS로 각종 유언비어가 난립하는 상황도 통제가 된다.
사태수습을 책임질 당국이 정확한 정보를 장악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무식한 언론과 방송들이 줄어들거나 사라지게 된다. 어떤 방송사가 헛소리를 보도해도 당국에 의한 정정보도가 나가게 되면 이로 인해 대중의 신뢰도는 달라진다. 全국민이 주시하는 대형사건에서 어떤 방송사가 엉터리 보도를 했다는 사실이 당국에 의해 신속하게 밝혀지면 당국과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축적해 가는 반면, 해당 방송사는 신뢰도를 급속히 잃어버린다. 신뢰를 잃어버리면 煽動力(선동력)도 잃어버린다. 이는 시청률 저조로 이어지고 광고수입의 급락과 동시에 방송사는 存廢(존폐) 위기를 맞는다. 이는 능률과 실질이 통하는 시장원리와 동일하다. 정보가 정부의 품질을 좌우하는 것이다.
정확한 정보는 일처리의 능률과 실질을 도모한다. 비극적 사건을 능률적이고 실질적으로 수습하면 개인과 국민과 국가의 품격은 높아지고, 선동에 휘둘린 채 감정적으로 처리하면 개인과 국민과 국가의 품격은 추락한다. 외교무대에서 朴槿惠 대통령의 활약으로 국가의 품격을 높여왔으나 이번 비극적 사건의 수습과정에서 드러난 정보의 실패로 인해 우리의 C₄I가 함량미달임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과 국민의 품격도 디스카운트 되고 있을 것이다.
당국이 정확한 정보를 장악했더라면 민간인 잠수사의 죽음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격앙된 유가족들에게 심리 치료적 접근법을 통해 그들을 진정시키면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객선 船體(선체)의 특성상 에어포켓이 존재할 가능성이 희박하며, 저체온증의 과학적 데이터를 제공함으로써 11도의 수온에서 4시간 이상 생존은 불가능함을 설득해 생존자가 있을 것이란 헛된 기대를 접게 했을 것이다. 17세기의 발명품인 다이빙 벨이 강한 潮流에서는 빈 깡통과 다름없다는 사실도 일치감치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뻔히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악조건 속으로 구조대원들을 몰아넣지 않도록 당국이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러한 정보기관이 없는 듯하다. 멋들어진 말과 글로 치장한 관료들만이 폼을 잡고 있다가 사건이 발생하자 침묵하는 중이다. 사태 수습을 책임진 당국자는 傷心(상심)한 유가족과 국민들 앞에서 현장을 장악하는 당당함을 보여주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정보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당국자는 엉터리 언론과 방송에 휘둘렸다. 관료들이 유족들에 대한 예의 지키기에 급급해 하는 동안 잠수 전문가와 救難(구난) 전문가들만이 떠밀리듯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중이다. 화려한 여객선이 폭풍도 없었던 바다에서 뒤집어질 정도로 내부가 엉터리였듯이 전문가들을 운용하는 관료조직 내부도 예의와 충성 경쟁에 익숙한 엉터리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우리가 승선중인 ‘대한민국 號’가 다시금 말과 글로써 기술자와 전문가들을 푸대접 하던 士農工商(사농공상)의 바다로 진입한 것은 아닐까.
김정은의 오해가 없기를…
敵(적)과의 격투 중에 나의 눈이 일시적으로 멀어버린 사실을 敵이 알아차린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북한의 김정은은 현재 대한민국의 視力(시력)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여객선 참사에 대한민국 정부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어떤 지휘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김정은은 예의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屍身(시신)이 인양되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儀典(의전)절차조차 마련하지 않은 채 연일 천포 두른 막사 안으로 운구하는 모습에서 김정은은 우리 정부의 사건 인식 능력과 지휘 통제 능력을 채점하고 있을 것이다. 자질 미달의 언론과 방송의 보도행태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知力(지력)과 청와대의 홍보능력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아울러 朴槿惠 대통령이 선친과 같은 法家的 지도자인지, 민주화 계열의 儒家的 지도자인지 혹은 요설로 혹세무민하는 道家的(도가적) 지도자인지 김정은은 유심히 분석하고 있을 것이다. 부디 그의 판단에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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