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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武器/ [초대형 유조선 동승기 연재] 바다와 배는 이런 것이다(조갑제닷컴)

鶴山 徐 仁 2014. 4. 27. 16:54

 

 
[초대형 유조선 동승기 연재(1)] 바다와 배는 이런 것이다

 

 

쿠웨이트의 기름을 싣고 울산항을 향해 떠난 동해 2호 안에서.

 

趙甲濟   

 

 

 

악마의 변호인 朴正熙 전기(全13권) 趙甲濟의 現代史이야기(全14권)

  
   동해2호가 쿠웨이트의 시아일랜드를 떠난 것은 이날 밤 9시30분. 접안한 지 33시간 만이었다. 하루 남짓한 체류 중에 쿠웨이트의 뭍을 밟은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었다. 구실을 달면 통선을 타고 나가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럴 시간, 흥미, 의욕을 가진 선원이 없었다. 이덕인 선장은 이날 저녁 시아일랜드로 건너갔다. 잔교에 자리를 잡고 낚싯줄을 던졌다. 한 무리의 고기떼가 잔교 밑을 지나갔다. 李 선장은 30분 사이에 손바닥만한 준치를 들통으로 하나 가득 '주워담았다.' 2등 기관사 최용선 씨는 '상륙하는 기분이라도 내야겠다'면서 강철의 뭍-시아일랜드로 건너가 한 바퀴 돌고 왔다.
  
   다른 선원들은 15킬로미터 저쪽에서 어렴풋이 빛나는 쿠웨이트 알 아하마디의 무미건조한 해안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하얀 강철로만 철갑한 탱커群(군), 정유공장, 송유관 등의 비인간적인 풍경은 스무 엿새 동안 파도 위에 떠 있었고 이제 또 그만한 거리의 뱃길에 오르려는 선원들의 향수 어린 눈망울마저 식혀주지 못하였다. 밤 9시45분께, 전날 접안을 유도했던 이라크인 도선사가 브리지로 올라와 동해2호의 출항을 명령했다. 시아일랜드에 동해2호를 묶은 열 여섯 가닥의 줄이 풀어졌다. 조류는 예인선의 도움도 청하지 않고 23만 톤 무게의 기름배를 슬그머니 잔교에서 밀어냈다. 동해2호는 잔잔해진 해면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슬로우!"
   "하프 어헤드!"
   "레디!"
   "풀 어헤드!"
   도선사는 미련한 소를 몰 듯 쇳소리 나는 목청을 높여 명령을 내렸고 선장은 이를 받아 3항사를 향해 복창했다. 3항사의 명령에 따라 조타수는 키를 빙글빙글 돌리며 진로를 잡았다. 3항사 박영간 씨(25세)는 텔리그라프의 손잡이를 밀었다가 당겼다 하며 42 톤짜리 네 잎사귀 스크류의 회전속도를 조정했다.
  
   도선사가 進路(진로)각도를 명령하고서 선체가 그 명령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눈치를 챌 수 있을 때까지는 삼사 분의 시간차가 필요했다. 트럭 6만 대의 무게, 인간 4백만 명의 무게와 맞먹게 된 이 괴물의 반응 속도는 초 저속 화면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았다. 앞으로 가다가 급정거를 위해 '全速後進(전속후진)'을 걸어도 5킬로미터쯤은 그냥 미끄러져 버리는 이런 초대형 유조선의 조종 원리는 '미리 미리 살살'이란다. 출항 30분 만에 아하마디 항을 빠져 나온 동해2호는 마침내 침로를 150도 방향으로 굳히고 'RPM(분당 회전 속도)70'의 12노트 속도로 3만리 동쪽에 있는 울산항을 향해 航進(항진)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밤하늘의 별자리들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와글와글 붙박혀 있었고 그 밤하늘의 한 가장자리를 태우는 정유공장과 유전의 불길은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탱커 선원들은 페르샤만(또는 아라비아만)을 줄여 '피지'(PG=Persian Gulf)라고 부른다. 'PG'는 남포동이나 광화문, 또는 장생포보다도 그들에게 더욱 귀에 익은 이름이 되어 있다. 'PG'뿐만 아니라 이 바다의 연안 항구-라스타누라, 미나 알 아하마디, 담만, 바스라, 카그 아일란드 등등을 그들은 고향의 동네 이름 부르듯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발음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곳이 어떻더냐?'고 물어 보라. 거의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PG'의 항구들은 그들에게 오직 '이름으로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장소'나 '추억'으로서는 거의 새겨지지 않고 있다.
  
   지리감의 기억이 없는 유령화 된 항구들 뿐.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생긴 해상 철구조물(원유 적출 잔교), 정감이 발붙일 그런 장소가 아니다. 급성맹장염이라도 걸리지 않는 한 그런 항구에도 상륙할 수가 없다. 먼발치에서 보는 항구라는 것도 모두가 산도 풀도 없이 백열의 태양 아래에서 가로로 끝없이 뻗은 지평선과 가물가물하는 백색 건물들 뿐. 그 해안과 원유적재 부두(시 아일랜드) 사이에는 사, 오십 리 거리의 얕은 바다가 가로놓여 있기 마련이다. 초대형 유조선들은 흘수라는 장벽으로 해서 이 바다를 넘지 못하고 만다. 설령 통선을 타고 항구에 내린 듯 그들의 고달픔과 적적함을 잠시나마 달래줄 술, 여자, 그리고 풀과 나무들을 무슨 수로 만날 것인가.
  
   고달픈 항해 중 선원들의 가슴속에 쌓였던 감정의 찌꺼기를 발산케 하고 새로운 뱃길로 나가는 그들에게 활력을 다시 충전시켜 주는 그런 항구는 'PG'에는 없다. 쇳덩어리, 모랫 바람, 열기, 긴장, 그리고 지루함. 그런 것들만 선사하는 'PG'에 안 오려면 '7광구에서 유전이 터져야 한다'고 선원들은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었다. 이덕인 선장은 동해2호의 침로가 고정되고 방향 잡는 기능이 수동키에서 자동 항해 장치(Autopilot)로 넘어가자 브리지를 항해사에게 물려주고 선장실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기관장과 동승 선장 최화섭씨(36세),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초대, 술판을 벌였다. 李 선장이 몇 시간 전 시아일랜드에서 잡은 준치들이 신선한 회로 변해 한 접시 가득 담겨져 있었다.
  
   합천이 고향인 李 선장은 억양이 없는 차분하고 느릿한 말투로 낚시 얘기부터 꺼냈다.
  
   "PG 물고기들은 순해 빠졌어요. 오늘 수십 마리를 잡았는데 이건 낚시질이 아니라 그냥 팔 운동이었습니다. 미끼도 안 달고 낚시 바늘만 줄 끝에 매달아 던져 놓고 아령 체조하듯 팔만 들어올리면 한 마리씩 걸려 올라와요. 고기떼가 한참 지나갈 때에는 배나 옆구리에 바늘이 박혀 올라오는 놈들도 있었어요. 웨이팅(장기 해상 대기)할 동안에는 도미나 가오리, 점백이도 많이 잡았는데 영악한 한국 물고기와는 달라요, 쇠고기를 미끼로 써도 덥석, 플라스틱으로 만든 새끼물고기 미끼를 던져도 덥석, 아무 것이나 삼키는 겁니다. 점백이 같은 놈은 걸려도 몸부림을 안 쳐요. 바위에 걸렸나 해서 슬슬 당겨보면 일, 이 미터짜리가 멍청하게 달려 올라오는 게 가련하기도 하고…"
  
   李 선장에게 있어서 'PG'의 추억은 주로 낚시와 관련되어 있었다. 李 선장뿐 아니라 많은 한국의 탱커 선원들은 낚시도구를 필수품처럼 갖고 다니며 바보 같은 아랍 물고기들을 요절내고 있다. 'PG'行 한국의 선원들에게 낚시풍조가 퍼지게 된 것은 1970년대 초, 중반기의 장기 대선(待船)에서 비롯된 것 같다. 중동의 개발붐을 타고 'PG'의 항구에는 갖가지 화물선들이 몰려들었으나 항만 하역능력 부족으로 보통 서너 달 늦으면 여섯 달, 1년까지 배를 외항에 띄워놓고 짐 부릴 차례를 기다리는 滯船(체선) 사태가 빚어졌다. 待船 기간 중에는 입항 허가를 얻은 상태가 아니라 상륙도 안 된다.
  
   감옥처럼 한정된 갑판과 선실을 맴돌며 그것도 찌는 태양과 달아 오른 철판 위에서 미치지 않고 몇 달을 견디려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구명정을 내려 같이 대기중인 한국 배들을 찾아다니며 친구나 동창생들을 만나고, '해외수출' 선원들이 탄 배에 가서는 소주로 양주를 바꾸어 오고, 그리고 낚시질, 商船(상선) 선원이 어부로 둔갑하는 것이었다.
   "캡틴, 기억납니까? 호람샤스에서 만났던 일 말입니다."
   李 선장의 해양대학 두 해 후배인 尹기관장이 그 특유의 재치 있고 우스꽝스런 말솜씨로 6년 전의 추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그때 캡틴께서 일본 도쿠마루 해운의 화물선을 몰고 이란 호람샤스 외항에 떠 있었죠. 한두 달쯤 기다리셨나요? 나는 도쿄 탱커(주)의 유조선 기관장이었죠. 호람샤르에 들어가니 한국 배들이 바글바글해요. 퍼뜩 생각나는 게 저 사람들 부식 다 떨어졌겠구나 하는 거였죠. 그래서 VHF로 불렀습니다. '한국 배들 있으면 나오라!' 그때 그 거지 떼들을 인솔하고 온 게 아마 캡틴이었죠? 히히히…"
  
   李 선장은 싱긋 웃으며, '나는 그때 구걸하러 간 게 아니고… 우리는 아직 보급품이 충분했고 같이 대기중인 다른 한국 선장이 나를 찾아와 자꾸 쌀을 한 가마 팔라는 거예요. 쌀만은 主食(주식)인데 팔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박절하게 거절할 수도 없고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기관장 배와 연락이 되어서 저쪽은 탱커니까 물자가 풍부할 거라고 생각해서 내가 그 선장과 선원들을 안내해 간 거지'라고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 탱커 선원들은 그때 모두 한국인 수출 선원(다른 나라 국적의 배를 타는 한국 선원)이었죠. 거지 몰골의 동료들이 구명정 가득히 타고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식당에 會食(회식) 준비를 시키고 라면 담배 위스키 등을 몽땅 꺼내 놓으라고 비상을 걸었단 말입니다. 까짓 것 일본 회사 돈인데 아낄 것 있나 싶어 배불리 먹이고 한아름씩 안겨서 보냈지요. 그때는 캡틴, 저한테 신세 많이 졌어요."
  
   호람샤르 얘기가 나오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 사람이 최화섭 선장이었다. 이번 항차가 끝나면 정기 휴가를 받아 하선하는 李 선장으로부터 동해2호를 인수, 다음 航次(항차)부터 이 배를 몰 사람이 崔 선장이었다. 그는 첫 경험인 초대형 유조선의 운항법을 익히고 인수인계도 겸해서 이번에 동승 선장으로 탄 것이었다.
  
   그는 1980년 9월 16일에 雜貨(잡화)를 실은 화물선 아세아 8호(9900톤)를 몰고 호람샤르로 들어갔다가 이란-이라크 전쟁에 휘말렸다. 전쟁 초기의 격전장이 된 호람샤르 항구에서 10월 7일까지 고립되어 시가전의 관람객이 되었다. 부두에 접안 한 채 배속에 숨어 있었던 28명의 선원들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근접 전투를 목격해야만 했다. 총알을 머리에 맞고 고꾸라지는 군인, 화염과 연기에 휩싸인 아바단 정유공장, 공중전, 불길을 토하는 유조선…부두의 불길이 아세아 8호의 옷가지 화물에 옮겨 붙어 생사를 건 진화작업을 벌이기도 했던 그는 이라크가 호람샤르를 장악한 10월 7일 이라크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쿠웨이트로 철수, 이틀 뒤 한국으로 돌아왔었다. 이, 최 선장과 윤 기관장의 해상 생활경력을 합산하면 약 40년, 그 동안 그들은 수백 번이나 'PG'를 들락날락했다. 그러나 그들의 추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얘깃거리는 남미나 동남아시아의 풍성한 항구에서 며칠 동안 맛본 재미에도 미치지 못한 것 같았고 그나마 고생담이 대부분이었다.
  
   선장실을 나와 새벽3시에 브리지에 올라갔다. 1시 방향으로 촛불 같은 게 보였다. 쿠웨이트와 사우디 아라비아 사이의 중립지대(이곳의 산유량은 두 나라가 2등분함)에 있는 해저 유전 시설의 가스 태우는 불길이었다. 후트 유전의 불꽃을 우현 쪽으로 바라보며 지나치자 곧 카푸지 유전의 불길이 1시 방향에서 나타났다. 22년 전 일본인들이 단 한 방의 첫 구멍 시추에서 발견한 매장량 50억 배럴(한국의 25년 소모량)의 대유전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원유는 주로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몇 년 전까지 한국도 이 유전의 기름을 사 썼다. 동해2호가 새벽 4시30분에 스쳐 지나간 카푸지 유전에서 중립 지대는 끝났고 그 뒤 또 다른 불길이 동터 오는 수평선상에 어렴풋이 나타났다. 사우디의 사파니아 해저 유전, 매장량이 200억 배럴을 넘어 해저 유전으로는 세계 최대다.
  
   한국 언론이 자꾸만 7광구와 비교하여 우리 사람들의 귀에도 익은 사파니아 유전 뒤편에는 세계에서 매장량이 열 여섯 번째인 마니파 유전(매장량 110억 배럴), 다시 그 북쪽 연안에는 세계14위 베리 유전(매장량 120억 배럴), 그 한참 뒤에는 아부 사파 해저 유전. 동해 2호는 새벽6시 께에는 줄루프 유전(세계 22위, 85억 배럴)을 오른켠에 놓고 불길의 바다를 통과, 이 날 하오 2시께 라스타누라 동쪽 60킬로미터 해상에 이르렀다. 여기를 지날 때 약 9킬로미터 서쪽에 회색 군함 한 척이 멈추어 있는 것이 쌍안경에 포착되었다. 이덕인 선장은 '미국 순양함일 것이다'고 했고 해군 중위 출신인 최 선장은 '1만 톤급이다'고 했다. 동해2호는 며칠 전 쿠웨이트 입항 하루 전날 밤 이곳을 통과할 때 미국 군함을 만나 정중한 질문을 받았었다. 목적항구, 화물내용 따위를 VHF로 물어 보더란 것이다.
  
   美 해군은 라스 타누라 근해에 군함을 상시 배치, 유조선들의 동향을 읽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세계의 아킬레스 근육', '지구의 심장', '국제 정치의 무게중심', '열강의 파워 플레이 센터'로 불리는 'PG' 가운데서도 라스타누라는 노른자위 중의 노른자위다. 아라비아灣(만)의 세계사적인 중요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 그대로다. 아라비아 만 연안 8개 국가-사우디, 쿠웨이트, 이란, 이라크, 아랍연방 에미레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에 세계 석유매장량의 약 57퍼센트가 묻혀 있다. OPEC 가맹국 가운데 걸프<아랍국가와 이란의 호칭 대립으로 이곳 바다를 그냥 걸프(GULF:만)라고 부르는 경향이 요즘 생기고 있음> 연안 여섯 나라(바레인과 오만은 가맹국이 아님)의 산유량은 OPEC 전체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한다. 걸프 연안 국가의 기름은 공산권을 제외한 세계 각국의 소비량 가운데 40퍼센트를 공급하고 있으며 세계원유 무역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기름의 거의 전부가 걸프 연안 항구를 통해 수출되고 있다. 가장 큰 적출항구는 세계 최대 석유 매장국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간판 라스타누라 주아이마의 시 아일랜드. 한국은 소비량의 60퍼센트쯤을 이곳에서 실어오고 있다. 세계의 탱커 선원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여러 갈래의 '기름의 길'이 비롯되는 현대의 로마인 셈이다. 라스타누라의 시 아일랜드는 여덟 척의 VLCC가 동시 접안할 수 있는 규모이고 그 쌍둥이 주아이마의 그것은 30만 톤을 넘는 ULCC급 슈퍼탱커도 수용한다. 주아이마에서는 입항 때 도선사와 화물 적재 감독이 헬기로 탱커 갑판에 착륙, 출항 때까지 머물러 있다가 다시 헬기를 불러 퇴근한다. 육지와 시 아일랜드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1일 PG의 장래와 이곳을 둘러싼 국제 역학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변화가 조용하게 일어났다. 라스타누라에서 출발, 아라비아 사막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건너편 홍해 연안 도시 얀부에 이르는 1215킬로미터의 송유관이 개통된 것이었다. 16억 달러를 들여 만든 이 송유관 '페트로라인'은 세계 최대 가와르 유전의 원유를 하루 185만 배럴씩 흘려 보내고 있으며 몇 년 안으로 송유 능력은 두 배로 늘 것이다. 기름 수출량의 100퍼센트를 PG연안 항구를 통해 내보내었던 사우디는 이제 20퍼센트를 홍해로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란의 해·공군에 의해 송유 및 유전 시설이 대파되어 'PG'를 통한 원유 수출이 어렵게 되어 있는 이라크는 사우디의 사막을 지나 홍해로 들어가는 송유관 건설 계획을 사우디 정부와 의논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일본 기업들은 사우디 및 오만 정부와 합작, 라스타누라로부터 PG 바깥 아라비아 해 연안에 있는 오만의 무스카트 항까지 1500 킬로미터의 송유관을 새로 까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또 얀부 동쪽에 40억 달러를 들여 15억 배럴의 기름을 저장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인공유전을 만들 계획이라고 최근 보도되었다. 이런 잇단 움직임은 페르샤만 연안 산유국들이 'PG'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대의 기름 시설을 때려부수는 데 주력했던 이란-이라크 전쟁은 유전, 송유, 정유, 원유 수출항만시설이 공습이나 해상 봉쇄로 얼마나 손쉽게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 있는가를 입증했다.
  
   그래서 'PG' 로만 통하던 기름의 길을 호르무즈 해협을 넘어선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갈라놓아 위험 부담을 분산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PG'는 만으로 불리지만 동해만큼 넓은 바다다. 길이가 약 900킬로미터, 최대 폭은 300킬로미터쯤. 깊이는 100미터 미만, 동해2호는 반월도처럼 생긴 'PG'의 한복판을 세로로 가르며 호르무즈 해협을 향해 12노트 속도로 순항하고 있었다. 쿠웨이트에서 보았던 초록색의 바닷물은 짙은 청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검푸른 광활한 들판 위를 뉘엿뉘엿 기어가는 듯 동해2호는 1분당 50만 톤의 바닷물을 양쪽으로 밀어붙이며 미련스럽게 나갔다. 가벼운 배들은 해면을 지치고 파도를 타지만 이 빙산 같은 巨體(거체)는 바다를 무지막지하게 찢어 발기며 헤쳐 나가는 꼴이었다.
  
   높이 24미터의 船體(선체) 가운데 19미터를 물 속에 잠근 이 배는 사실상 半(반) 잠수선. 워낙 흔들림이 적어 날개처럼 船首(선수)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는 파문과 배 꼬리에서 뒤로 뻗은 물길이 없다면 동해2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수평선에는 'PG'로 들어오는 탱커와 빠져나가는 납작한 탱커가 끊임없이 엇갈리고 있었다. 일반 화물선은 슈퍼 탱커의 그림자에 가렸는지 자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선원들은 이 며칠간 휴게실의 텔레비전에 빠져 있었다. 항로에 따라 쿠웨이트, 사우디, 바레인, 아랍 연방 에미레이트의 텔레비전 화면이 차례로, 또는 몇 채널이 동시에 잡히고 있었다. 모두가 아랍어 방송인데 라스타누라 근방을 지날 때 잠시 아람코 석유 회사의 자체 영어 방송화면이 나타났다.
  
   아랍 텔레비전 화면은 오락 프로가 하나도 없고 아랍어를 알아듣는 선원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밤 늦게까지 한사코 거기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다. 화면이 흔들리고 간섭이 들어와도 막무가내로 자리에 붙어 있었다. 화투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동해2호가 바레인 앞을 지날 때 船橋(선교)에서 당직을 서던 2항사 이종권 씨(28)가 심심했던지 VHF로 '한국 배 있습니까?'라고 불렀다. 선박 VHF 는 반경 50킬로미터 이내에서 교신이 가능하다. '한국 배 여기 있습니다'고 곧장 받고 나온 것은 아세아 상선(주)의 예인선 청룡1호였다. 사우디의 주베일 항에 건설 자재를 실어주고 카타르의 도하 항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청룡1호의 당직 사관은 동해2호가 귀항길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부러운 듯 '우리는 돌아갈 기약이 없다'고 했다. 청룡1호는 한국을 떠나온 지 1년 반이나 됐다는 것이었다.
  
   청룡1호는 바지선을 끌고 다니는 배다. 이 바지는 길이가 170미터, 너비가 40미터나 되는 거대한 사각 철판 접시. 이 바지에는 대규모 공사 현장에 공급할 철 구조물, 공장시설, 건설자재 등 무거운 화물들이 실린다. 청룡1호와 이 바지선은 1700미터나 되는 쇠줄로 이어져 있어 한국선원들은 이 예인선을 만나면 '세계에서 제일 긴 배다!'고 소리치기도 한다. 속도는 8노트 정도이지만 풍랑을 만나거나 엔진 고장이 나면 가벼운 예인선이 무거운 바지선에 끌려 뒷걸음을 칠 때가 있다. 엔진을 끄고 기관을 수리중인 청룡1호를, 海·潮流(해·조류)에 밀려온 바지선이 쿵쿵 들이받는 바람에 침몰 위기에 빠진 적도 있었다.
  
   한국을 떠나 中東(중동)까지 오는 데만 50일쯤 걸린다는 굼벵이 청룡1호의 당직 사관은 향수에 젖은 목소리로 본국 사정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얘기 좀 해달라고 이종권 씨를 재촉했지만 李씨마저 사 오십일 만에 한국에 들러도 하루밖에 상륙할 수 없는 몸, 뾰족한 정보를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몇 시간 뒤에는 동해2호의 자매선인 동해1호가 VHF로 나왔다. 동해1호의 성명한 선장은 이덕인 선장을 불러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난해 12월25일부터 라스타누라에서 앵커 박고 웨이팅하고 있습니다. 벌써 40일이 흘렀습니다. 年暇(연가)가야 할 선원도 많은데 이거 큰일났습니다. 본국에 돌아가시면 정기 휴가자들이라도 빨리 교체해 달라고 잘 좀 말씀드려 주십시오…"
  
   李 선장은 '우리 배 몰고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 당장 교대합시다'는 농담으로 성 선장을 달래려고 했으나 성선장의 목소리에서는 답답, 허전, 다급한 가락이 사그러들지 않았다. 부정기 유조선인 동해1호는 기름 수출량의 격감으로 짐을 못 구해 타국 만리의 바다에서 하염없이 떠 있기만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검푸른 海原(해원) 저 건너 熱砂(열사)의 하늘밑, 철판으로 둘러싸이고 바다에 의해 이중으로 고립된 뱃사람들의 고향 그리는 형체 없는 목소리는 옆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찡하게 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