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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武器/ 조갑제닷컴

鶴山 徐 仁 2014. 1. 14. 19:55

 

 

 

 

西獨은 東獨을 붕괴시키기 위한 지원만 했다

 

 

서독은 결코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金玄浩   

 

 

 

서독의 東方정책이 한국의 햇볕정책에 주는 교훈
  金玄浩
  월간조선 2000년 3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단호한 원칙 없는 화해와 협력은 독일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서독은 결코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서독은 동독의 人權 침해 사례를 30년간 모아 통일 후 처벌했다.
   ●경제 지원에는 반드시 국경에서의 긴장 완화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직접 차관은 不許… 차관과 총격 중지를 교환하기도
   ●社民黨정부, 동독과 화해정책 펴면서 「反체제 인사의 공직취임 금지」 결정
  
   「붕괴를 위한 지원」 만이 있었다
  
   『東方政策(동방정책)은 동독 체제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는가, 지연시켰는가』
   독일의 대표적 권위지인 週刊(주간) 디 차이트(Die Zeit)가 1992년 2월부터 3월까지 6회에 걸쳐 게재한 시리즈 논쟁의 제목이다. 당시 독일 지식인 사회는 이 주제를 놓고 일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東方政策은 엄밀히 말하면 1960년대 말부터 서독 사민당의 브란트 정부가 추진한 소련과 동구권에 대한 평화공존 및 화해정책이지만 여기서는 브란트 이후 통일 때까지 서독이 동독에 취한 「독일정책」까지 포괄하는 의미이다.
   차이트紙(지)가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실은 기사의 제목은 「원칙적으로 올바른 東方政策이 왜 마지막에 가서 부분적으로 운영상의 실패로 끝났는가」였다. 핵심 부분을 인용해 본다.
   『과연 東方政策은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일조할 목적으로 추진되었는가? 그같은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東方政策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것이다. 그렇지만 공산주의 체제의 현실을 처음으로 직시하면서 동독의 內的(내적)인 안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外的(외적)인 안정을 보장해 줌으로써 동독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돕는 것으로 공산주의 붕괴의 출발점이 되도록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즉 「안정화를 통한 변화(Wandel durch Stabilisierung)」 유도였던 것이다. 붕괴시킬 것인가, 지원할 것인가의 선택 가능성은 존재한 적이 없다. 단지 붕괴를 위한 지원만이 있을 뿐이었다(통일부 번역자료에서)』
   이 글을 쓴 차이트紙의 로베르트 라이히트(Robert Leicht) 기자는 이같은 목적을 가진 東方政策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동서독간 타협으로 시작된 개방이 지속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反動(반동)」을 맞았다는 것이다. 동독內 주민들의 분위기는 베일에 가려지고, 경제 침체는 가속화됐으며, 비밀경찰(Stasi)의 규모가 확대되고, 반체제 운동가들이 말문을 열기 시작했지만 서독의 정부와 政界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東方政策의 후반기에 들어 서독의 정치인들이 현상에 안주해 동독內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비판이었다.
   이 기사가 東方政策에 대한 독일內의 일반적 평가를 대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차이트紙의 논쟁 기사가 거듭 확인하고 있는 사실은 東方政策에 대한 시각과 평가는 독일內에서도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 온 서독의 東方政策은 어떠한가. 한국인들의 東方政策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독일 분단 시대에 서독은 동독에 대해 평화공존을 바탕으로 한 화해와 협력 정책을 꾸준히 추진한 결과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의 통일정책관련 자료나 학자들의 글 속에서도 이같은 인식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독일의 통일정책하면 「화해와 협력」을 떠 올리는 것이 일반의 상식처럼 됐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金大中(김대중) 정부의 對北(대북) 햇볕정책이 추진되면서 더욱 심화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차이트紙의 지적대로 서독의 對동독정책이 화해와 협력, 교류 등의 모습만 갖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님에도, 우리에게는 유독 이 부분만 부각되고 있는 느낌은 떨치기 어렵다. 서독이 동독과의 화해와 협력을 표방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견지하고 실현하려고 했던 핵심적 원칙들에 대해서는 좀체 우리의 시선이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원칙들은 화해정책 속에 담긴 「숨은 그림」과도 같은 것이어서 얼른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해내지 못한 채 화해와 협력이라는 겉모습만을 추구하다가는 우리는 독일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이 기사는 서독의 東方政策 전반을 되돌아 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화해와 협력이라는 화려한 外樣(외양) 속에 서독 정부가 내부적으로 그어놓은 원칙과 양보할 수 없는 한계가 무엇이었던가를 살펴보면서 한국에 주는 시사점을 찾아 보려는 것이다.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
  
   독일 통일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진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독일 통일은 서독이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통일을 사실상 포기한 채 동독과의 평화공존과 화해 협력을 강화해 온 결과 국제적 여건 변화에 따라 「偶然(우연)」의 모습으로 찾아 왔다고 보는 견해이다. 한국의 對北 햇볕정책도 근저에는 이같은 통일 철학을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독은 동독의 체제를 인정하고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통일 의지를 스스로 약화시키거나, 약화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는 말과 행동은 극도로 삼가했다. 서독 기본법은 서문에서 『모든 독일 민족은 自決(자결)에 의하여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완수하도록 요구받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역대 서독 정부는 이를 최고의 통일 이념과 통일 정책으로 삼아 對 동독 정책의 기본으로 유지했다.
   기본법의 이 규정은 단순한 선언적 의미에 머물지 않았다. 1972년 12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자 서독 바이에른 주정부는 이듬해 5월 연방헌법재판소에 기본조약의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바이에른주는 독일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사당(CSU)이 집권하고 있다. 위헌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기본조약에서 동독을 서독과 동등한 자격을 가진 독립된 자립 국가로 승인한 것은 기본법에 규정된 「통일 완수의 使命(사명)」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기본조약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동등 자격의 원칙 위에서 상호 정상적 선린 관계를 발전 시킨다」 「(양측은) 주권상의 평등, 독립의 존중, 자립과 영토의 불가침성, 자결권, 인권 보장 등 유엔헌장에 명시된 목표와 원칙을 준수한다」는 등의 조항을 담고 있었다.
   서독은 기본조약에서 동서독 관계를 「특수 관계」로 규정하려 했으나, 동독의 강력한 반발로 이를 조약에 명시하지 못했다. 브란트 사민당 정부는 동독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기 앞서 동독에 대한 국가 승인의 문제가 국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1969년 10월28일 『서독 정부가 동독을 국제법상 승인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설사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들은 서로에게 외국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간의 관계는 특수할 수밖에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동독은 정권 수립 이후 줄기차게 서독으로부터의 국가 인정을 요구해 왔고, 기본조약 협상 과정에서도 독자적인 주권 국가로서 서독으로부터 제한 조건 없이 국제법상의 국가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기본조약의 해당 조항 표현은 양측의 타협의 결과였다.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기본조약은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동독은 국제법상 하나의 국가이다. 그러나 서독에 의한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 문제는 별개이다. 서독은 동독에 대한 국제법상 승인을 공식적으로 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와 반대로 되풀이하여 이를 분명히 거부하였다. 서독이 동독에 대하여 긴장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취한 태도와 특히 조약을 체결하면서 대두된 실제상의 승인 사실을 평가한다면 이는 특수한 형태의 사실상의 승인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常駐대표부도 총리실 소속으로
  
   헌법재판소는 서독 정부의 「특수 관계」이론을 지지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특히 기본조약이 분단 고착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이 조약은 기본법상의 再통일 사명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 조약은 분단을 위한 조약이 아니고 오히려 독일 민족이 다시금 국가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도록 연방정부가 오늘에도 내일에도 언제나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통일을 위해 노력해 나가기 위해 마련한 조약인 것이다』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은 학자들 사이에 적잖은 이론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서독 헌법재판소 판결이 독일 국내와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것은 서독이 추진하는 동독과의 평화공존과 긴장완화 정책이 결코 통일 의지의 약화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며, 서독 정부는 영원히 통일의 사명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서독 정부 역시 동독의 체제를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국제법상의 국가 승인으로까지 확대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 나갔다. 기본조약에 따라 동독의 동베를린에 설치한 상주대표부를 외교부가 아닌 총리실 소속으로 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는 常駐대표부 설치가 동독과의 외교 관계 수립, 즉 국제법상의 국가승인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하기위한 苦肉策(고육책)이었다. 반면 동독은 서독 본에 설치한 常駐대표부를 외교부 산하에 두어 양측 관계를 국제법상의 국가관계 성격으로 만들기 위해 진력했다.
   당시 서독의 야당이었던 보수성향의 기민당(CDU)은 常駐대표부 교환과, 서독 연방대통령에대한 동독 常駐대표부 대표의 신임장 제정이 국제법상의 승인과 다름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민당 정부는 서독 기본법에 규정된 신임장 제정 대상인 「파견된 자(die Gesandten)」를 반드시 외교사절에 한정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까지 개발하면서 이를 일축했다. 常駐대표부 근무자들에 대해 비엔나 외교협정의 외교관 특권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이 됐을 때도, 서독 정부는 현실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끝까지 「이를 준용하여 적용한다」는 유보적 태도를 고수했다.
   서독의 통일 의지에 맞서 동독의 「분리 의지」도 집요했다. 1971년 집권한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1974년 헌법 개정에서 통일 조항을 아예 삭제함으로써 對 서독 「분리 정책(Abgrenzungspolitik)」을 공식화했다. 삭제된 통일 조항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그 국민은 독일민족의 제국주의에 의하여 강요된 독일 분단을 극복하고 두 개의 독일 국가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바탕 위에서 통일할 때까지 단계적으로 노력한다」는 내용이었다. 같은해 유엔 총회 연설에서 피셔 동독 외무장관은 『오늘날 독일 땅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두 개의 민족, 즉 「사회주의적 민족」과 「자본주의적 민족」이 존재한다』는 주장까지 폈다. 동독이 「2 민족론」까지 내세우며 서독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줄기차게 요구한 것은 인구, 국력, 국제적 위상, 정통성 등에서 서독에 대한 절대적 열세를 느꼈기 때문이다.
  
   「흡수통일」 아닌 동독의 자발적 「편입」
  
   서독이 동독과의 평화 공존과 화해 협력을 추구해 나가면서도, 이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통일의지의 약화로 비쳐지지 않도록 분명한 자세를 견지한 사실은, 한국 정부가 「흡수 통일」 배제를 對北 정책의 3원칙 중 하나로 공식 천명하고 있는 점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정부가 말하는 「흡수통일」은, 동독 공산 정권 붕괴 이후 서독이 주도한 독일식 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독일에서는 이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정확한 용어라고 할 수도 없다. 독일 통일 당시 서독 기본법 규정에 따르면 두 가지 방식의 통일이 가능했다. 기본법 23조에 따라 동독 지역이 서독 연방에 「편입」하는 방식과, 146조에 따라 동서독이 함께 새로운 통일 헌법을 제정하는 방식이었다. 호네커 정권 붕괴 후 자유총선에 의해 구성된 동독 의회는 이 두 가지 방식 가운데 조속한 통일을 위해 스스로「편입(Beitritt)」을 선택해 서독 기본법 체계 속으로 들어 간 것이다. 서독도 통일과정의 단순화를 위해 이 방식을 선호했다.
   만약 한국 정부가 독일식 통일을 배제한다면, 어느 날 북한 주민들이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한국 헌법 체계 속으로 들어 올 것을 결정하더라도 우리 정부는 이를 「배제」하겠다는 뜻이 된다.
   한국 정부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높은 통일 방식의 배제를 굳이 공식 정책으로 천명하고, 대통령까지 나서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통일 의지의 약화로 비쳐질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金大中 대통령은 『지금 곧 통일해도 우리에게는 북한을 지원할 능력이 없다. 통일을 서두르는 것은 북한이나 한국에게 모두 좋은 일이 아니다』(지난 1월5일 도이 다카코 일본 사민당 당수와의 회견)고 언급하고 있다. 통일 비용이 두려워 일부러라도 통일을 늦추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통일 의지는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한국 정부는 현재 미국과 일본 등에 대해 북한과의 수교를 촉구하고 있다. 이것이 마치 한국이 북한을 국제법상의 국가로 승인하는 의미로 비쳐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남북한은 현재 어느 일방도 동독과 같은 「분리 정책」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당장 논쟁거리가 될 여지는 거의 없다. 남북기본합의서도, 동서독 기본조약과 달리, 남북한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만약 어느 날 북한 정권이, 동독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 대한 체제 열세를 절감해 국제사회와 한국에 대해 체제 보장을 요구하고 나설 경우 한국의 북한에 대한 국제법상 국가 승인 문제가 대두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 한국 정부가 현재 취하고 있는 여러 가지 對北정책은 한국의 북한에 대한 국가 승인 여부를 판단하는 주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북한이 金日成(김일성) 死後(사후) 자신들을 「金日成 민족」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실에서 동독의 「2 민족론」을 연상하는 것은 영원한 杞憂(기우)일까.
  
   동독인은 당연히 서독 국적을 인정
  
   서독이 동독과의 화해정책 속에서도 동독의 강력한 반발을 무릅쓰고 끝까지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통일의 기반을 구축했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독 탈출 주민 문제였다.
   이는 현재 한국 정부의 탈북자 또는 중국內 조선족들에 대한 정책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서독은 동독 주민을 자국민으로 간주했다.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 정책에서도 이 원칙을 지켰다. 서독 기본법 116조는 『1937년 12월31일 현재 독일제국 영토하의 독일 국적 소유자와 그 배우자 및 비속은 독일 국적을 갖는다』고 규정했다. 이는 곧 서독이 전체 독일 민족의 정통성을 법적으로 승계하고 있음을 명확히 천명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동독 지역은 물론 폴란드 체코 소련 등지의 독일인들은 독일 국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됐으며, 이들이 서독으로 들어 올 경우 별도의 국적 취득 절차 없이 당연히 서독 국민이 갖는 모든 권리를 갖는 것으로 해석됐다. 동서독 기본조약에 대한 위헌 소송 판결에서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이 조약은 동독 정부가 국적에 관한 법률을 어떻게 다루든지 관계없이 서독은 동독의 모든 국민에게 기본법 규정에 따라 서독 국민과 동일한 독일인으로 취급한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서독의 「1 국적 주의」에 동독은 강력히 반발했다. 동독은 동서독이 서로 다른 2개의 국적을 갖는다는 내용의 국적법을 제정했고, 기본조약 체결 이후에는 『서독도 2개의 국가와 2개의 국적을 명시적으로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1950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유입된 인구는 4백90만명에 달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는 47만명이 넘어갔다. 동독의 이주·탈출 주민들은 서독과 국제사회에서 동독 체제의 문제점을 폭로함으로써 동독 체제의 안정성을 더욱 떨어뜨렸다. 대개 교육 수준이 높은 젊은층들이 대거 서독으로 넘어감으로써 동독 체제 내부의 자체 개혁 잠재력이 더욱 약화돼 사회적 위기가 고조됐고, 결국 공산정권의 붕괴를 초래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반면 서독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고도 성장 과정에서 이주민들의 역동력이 경제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업型 「탈주 지원」도 보호
  
   서독 정부가 동독으로부터의 탈출 주민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견지했는지는 탈출 지원자들에 대한 처리에서 분명해진다. 베를린 장벽 구축으로 서독으로의 탈주로가 봉쇄되면서 서독인들의 동독인 탈출 지원도 크게 늘어나게 됐다. 이를 서독은 「탈출 지원」이라고 했고, 동독은 「인신 매매」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처음에는 탈출 지원이 순수한 인도적 성격이었지만 나중에는 돈을 받고 도와주는 상업적 탈주 지원까지 생겨나게 됐다.
   동독은 서독의 탈출 지원 업체의 활동을 중단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은 거주이전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속하는 절대적인 기본권이며 단일 국적 제도를 원칙으로 삼고 있어 동독 시민의 서독 입국을 막을 수 없다는 입장을 지켰다. 나아가 다른 사람이 거주이전의 기본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람도 형사 처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원 과정에서 문서 위조 등을 하였다 하더라도 범죄 행위가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1977년 9월 서독 연방대법원은 탈출 지원에 관한 3건의 소송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판결을 내렸다. 이중 2건은 동독 탈주 성공 후 탈주자가 지원자에게 잔금 지불을 거절한 것이었고, 1건은 탈출 실패 후 선금을 환불하라는 소송이었다. 연방대법원은 동서독간에 체결한 통과교통협정이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독간의 국가 관계만을 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탈출 지원은 법적인 금지 사항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따라서 탈출 지원 계약은 동독에서 오는 독일인으로 하여금 기본권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기에 「善意(선의)의 관습」에 어긋나지도 않는다고 밝혀 탈주 지원 행위를 격려했다.
   이 판결에 대해 당시 니르 동독 외무장관은 『서독에 있는 범죄적 인신 매매자들의 존재와 행위를 정당화시킬 뿐 아니라 동독內 통과路(로)의 악용을 공공연히 호도하는 것』이라고 비난했고, 동독 대법원도 『(서독) 도당에 의한 범죄행위가 정당화 됐으며, 동독의 법률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독은 1957년 형법에서 「동독 출국 使嗾(사주)」와 「反(반)국가 인신매매」를 범죄로 규정했고, 1977년에는 탈주 지원에 대해 종신금고형까지 가능토록 했다. 동서독 통과교통협정 발효 후 6년간 서독 출신 9백52명이 동독에서 탈주 지원 또는 방조 혐의로 체포돼 이중 8백65명이 기소되고 6백3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탈출 지원에는 납으로 봉인된 트럭을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이는 동서독간 협정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다. 동독측은 불시에 봉인된 트럭을 열어보는 방법으로 대처해 나갔다. 이런 일로 동독과의 마찰이 심해지자 서독은 1978년 기업형 탈출 지원에 대해 마약 남용(탈주자를 운송 과정에서 마취시키는 경우) 규정 등을 적용해 영업 행위를 일부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기는 했으나 탈출 지원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독일 통일의 직접적 계기가 된 1989년의 동독인 대거 탈출 사태는 이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西獨, 동독 인권 침해 사례 기록 모아
  
   한국 정부는 북한의 인권 문제에 관해 공개적인 언급을 가급적 삼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실효도 없이 공연히 북한 정권을 자극만 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남북기본합의서에도 「人權(인권)」이라는 단어는 찾아 볼 수 없다.
   동서독 기본조약은 유엔 헌장을 빌어 「인권 보호」를 명시적으로 규정했고, 이는 서독의 강력한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동독 정권이 서독의 인권 개선 요구를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하는 경우에 대해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서독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이익을 자유롭고 합당하게 표출하는 것을 동독이 기본조약 정신을 위배한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제한하려는 것은 오히려 그 편(동독)에서 조약을 위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서독 기본법이 적용되는 지역은 서독 지역에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동독 주민들에 대해 서독 기본법상의 인권 보장을 동독에 요구하는 것은 실효성을 갖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서독은 동독內의 인권 신장을 원칙으로 천명해 놓고 실질적인 관계개선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구체적 사안마다 동독 주민들의 삶의 조건 개선을 시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동독은 서독과의 기본조약 체결 이듬해인 1973년 국제인권협약을 비준하고 1976년부터 국내에 발효시킴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인권에 관한 국제적인 구속력을 인정했다.
   서독이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동독內의 인권 개선 의지를 지속적이고 단호하게 행동으로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잘츠기터(Salzgitter)에 설치한 동독지역의 정치적 폭행사례에 관한 기록보존소였다. 잘츠기터는 지방법원이 소재한 도시 중 동서독 경계에 가장 가까운 국경 도시였고, 이 도시가 속한 니더작센주는 가장 긴 동서독 경계선을 갖고 있었다. 동독의 코앞에다 이런 기록보존소를 세운 것 자체가 서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기록보존소의 설립 목적은 동독 정권에 대해 인권 침해에 대한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심리적 압박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동독內에서 자행되는 각종 인권 침해와 정치적 탄압 사례를 최대한 수집해 자세히 기록해 둠으로써 동독이 민주화되거나 통일이 이루어지면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해 두려는 목적이었다. 당장은 이같은 無言(무언)의 경고를 통해 동독 정권이 가급적 인권 침해를 자제토록 하는 효과를 노렸다.
   동독은 이 기록보존소의 존재 자체가 동독에 대한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면서 서독과의 교류 중단까지 위협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해체를 요구했지만 서독은 요지 부동이었다. 서독 연방대법원은 동독인이 동독內에서 행한 행위에 대해서도 서독 법원의 사법권이 미친다는 취지의 판결을 통해 기록보존소의 법적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잘츠기터 기록보존소는 1961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 구축에 대한 대응조치의 하나로 설립된 후 통일 이후인 1991년까지 30년간 존속했다.
   관련 기록들의 수집 통로는 다양했다. 돈을 지불하고 인도 받은 동독 정치범, 동독 탈출자, 동독 방문 서독인 , 동독의 신문 방송 등에 보도되는 사건 등을 통해 인권 침해 사례를 모았다. 인권 침해를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묻는 질문서에는 가해자의 성명 주소 연령 인상착의 특징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난이 포함돼 있었다. 이 기록보존소가 30년간 수집한 사례는 4만3백 건에 달했다. 여기에는 8만여 명의 이름이 언급됐고, 이중 1만여 명이 형사 소추가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이 문건들은 실제로 통일 후 동독 체제 청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권 침해 가해자들에 대한 형사 처벌의 증거가 되는 한편,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의 근거로 활용됐다.
   잘츠기터 기록보존소는 우리가 지금 북한 인권 문제에 어떤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를 되새겨 보게 한다.
  
   경제 지원에는 국경 긴장 완화 조건 붙여
  
   서독의 동독에 대한 지원은 항상 조건이 붙어 있었다. 서독의 요구 조건은 인적 교류의 확대, 內獨間 국경에서의 수속 절차 완화, 환경 문화 교육 분야의 협력 강화 등이었다.
   동서독간 경제 협력중 교역이나 임가공 등은 순수 경제적 측면이 강했던 반면, 정치적 고려에 의한 서독의 동독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은 주로 차관 형태로 이루어졌다. 서독 은행들은 1970년대부터 동독에 차관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독 자금이 곧바로 동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독 은행의 외국 지점(주로 런던 파리 룩셈부르크 등)이 국제 컨소시엄(채권단)을 구성해 「유럽 차관(Eurokredit)」을 제공하는 형식을 취했다. 서독 정부와 연방은행은 통일 당시까지 서독은행이 서독의 자금을 직접 동독에 차관으로 제공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했다.
   동독은 1983년 서독측에 대규모 차관을 요청했다. 1980년대 들어 동독은 심각해진 경제난으로 국제 금융시장에서 채무는 늘어나고 신용도는 떨어져 서방은행들이 차관 제공을 거부하는 사태를 맞고 있었다. 당시 동독의 왜채는 90억~1백30억 달러에 달했으며, 이중 약 40%는 1년 이내에 상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동독 대외무역부 차관 겸 외환 총책임자인 샬크 골로드코브스키는 서독의 기사당(SCU) 당수 프란츠 요셉 슈트라우스에게 서방은행의 차관을 서독 정부가 주선하고 보증을 서 줄 것을 요청했다. 동독이 서독 정계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슈트라우스에게 직접 접근한 것은 그의 이해 없이는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는 사전 접촉에서 협상 개시의 조건으로 동서독 국경에서의 여행 규제 완화와 총격 사살 금지 등을 요구했다. 실제로 양측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동독측의 여행수속 절차가 대폭 간소화되고 총격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본격 회담에서는 서독측에서 독일정책 담당 주무 부처인 총리실의 예닝거 장관이 참여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0억 마르크와 9억5천만 마르크의 차관이 동독에 제공됐다. 금리와 상환 기간 등 차관조건은 당시 유럽 금융시장에서 적용되던 통상 수준으로 특혜는 아니었다. 또 서독은 국내의 자본 시장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차관 금액 전액을 유럽內 서독 은행 지점들을 통해 유럽 자본시장에서 조달했다. 서독 정부의 예산 부담도 전혀 없었다.
   차관 제공이 결정 난 후인 1983년 9월 동독측은 슈트라우스에게 국경 지대에 설치된 자동발사 장치를 제거하겠다고 통보한 후, 5만4천 개의 「SM-70 자동발사 장치」와 잔여 지뢰들을 제거했다. 대신 동독은 전자 감시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양독 경계선상의 살벌함을 대폭 줄였다.
  
   화해 앞서 내부 체제부터 가다듬어
  
   1984년 차관 제공후 동독이 서독에 취한 주요 화해 조치는 11가지에 달했다. 동독인들의 서독 방문 허가 조건을 완화하고, 서독 체류 기간 한도를 30일에서 60일로 늘렸다. 서독인들의 동독 방문 허용 기간도 30일에서 45일로 늘리고, 동독 방문시 한 사람이 의무적으로 동독 마르크로 바꿔야 하는 서독 마르크의 액수도 25마르크에서 15마르크로 낮췄다. 이러한 조치들이 동서독간 인적 왕래를 확대시켰음은 물론이다.
   한국은 북한에 15만여 t의 비료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금강산 관광및 개발 대가로 9억4천여만 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대신 북한으로부터 어떤 화해 조치를 얻어내고 있는가.
   서독 사민당의 브란트 정부는 동독과의 화해정책을 본격화하고 있던 1972년 1월 브란트 연방총리와 각 주의 총리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동 결의안을 채택했다.
   『서독 기본법을 부정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은 공직에 임용될 수 없다. 反헌법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단체에 가입한 자들은, 단체 가입 사실 자체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없도록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서독 정부는 이런 자들의 공직 임용을 배제할 수 있다』
   결의안은 反헌법적인 단체의 기준에대해서는 명확히 언급하지 않고, 그 판단을 헌법수호청(Verfassungsschutz)에 위임했다. 이 때문에 정부 각 기관은 공무원을 임용할 때 반드시 反헌법적 단체 소속 여부와 활동 등에 관해 신원 조회를 해야 했다.
   이 결의안은 서독 各 주별로 취해지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행정 규제에 대해 통일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독 공산당(KPD)은 1956년 위헌 판결을 받아 해산되고 3천여 명의 당원들이 구속됐으나, 1968년 기본 政綱(정강)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명시하지 않는 등 보다 온건한 모습으로 탈바꿈해 DKP라는 이름으로 再창당했다. 서독 정부는 DKP를 다시 해산시키지는 않았으나 그 활동을 정밀 관찰하고 당원들의 공직 임용을 금지시키는 등의 제한을 가한 것이다. 사민당이 동독과의 화해정책 추진과 함께 이같은 결의안을 마련한 데에는 「東方政策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용만 당한다」는 보수 정당들로부터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한 의도도 작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독과의 본격적인 대화와 교류에 앞서 내부 체제를 가다듬는 의미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對北 햇볕정책이 북한의 외투를 벗기기 전에 한국의 對北 경각심부터 허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서독의 東方政策과 현재의 한국 햇볕정책을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당시 동서독과 지금의 남북한은 내부 체제, 분단상황, 국제 환경 등에서 너무나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 관리를 통해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정책이 어떤 목표와 원칙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있어서는 독일과 한국이 크게 다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인류사에서 가장 평화적이고 성공적인 통일을 이룬 독일의 경우는 우리가 자주 들춰보아야 할 「참고서」임에 틀림없다.
   서독 헌법재판소의 다음과 같은 판결은 지금의 한국 정부가 되새겨 볼 만한 금언이다.
   『서독의 모든 헌법기관은 국가 통일의 재성취를 정치 목표로서 견지하여야 하며, 이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할 정치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 통일을 좌절시키는 어떤 일도 시도해서는 안된다. 대내적으로는 언제나 경각심을 갖고 통일문제를 추진해 나가야 하며, 대외적으로는 이를 끈기 있게 대변해야 한다』●
  

[ 2014-01-14, 16:00 ]

 

 

 

 

소련을 붕괴시킨 헬싱키 선언의 人權 조항

 

 

독재체제가 人權의 원칙에 동의하는 것은 독을 마시는 행위이다.

 

趙甲濟   

 

 

 

소련을 붕괴시킨 헬싱키 선언연구
  
   故(고)黃長燁(황장엽) 선생은 ‘狂犬(광견)을 겁내지 말라’는 책에서 소련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을 네 개로 꼽았다.
   1956년 소련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 스탈린은 소련뿐 아니라 국제공산당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스탈린 격하운동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를 끌어내림으로써 이 운동의 단결이 붕괴되었다. 毛澤東(모택동)의 중공이 흐루시초프에 반발함으로써 소련과 중국이 분열되고 미국에 대한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공격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던 것이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건. 흐루시초프가 미국의 코앞인 쿠바에다가 미사일과 핵무기를 반입, 설치하려는 모험주의는 케네디 대통령의 반격을 받았다. 미국이 소련과의 핵전쟁을 각오하고 쿠바를 해상봉쇄하자 소련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철수했다. 이는 소련의 권위를 떨어뜨려 1964년 흐루시초프 실각의 원인이 되었다.
   1975년 헬싱키 선언. 소련이 서방세계가 제안한 人權(인권)조항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공산권 붕괴의 한 계기가 되었다.
   1985년 이후 고르바초프의 자진 해체. 그는 공산권 쇠퇴의 원인이 인권사상과 자본주의의 침투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않고 계급 독재 등 사회주의에 내재한 모순 때문이라고 확신, 이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해체하고 말았다는 것이 黃長燁씨의 분석이다.
  
   헬싱키 선언이 한국에 주는 교훈
  
   헬싱키 선언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본다. 1969년 3월17일 소련의 주도하에 있던 동구 공산권의 집단안보체제인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서방세계에 대해 유럽안보회의의 소집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소련의 목적은 1년 전에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봉기를 소련이 무력진압한 데 따른 후유증을 해소하는 한편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닉슨 미국 대통령에 대해 일종의 선제공격을 거는 것이었다.
   소련은 닉슨을 강경파로 인식하고 있었다. 소련이 제안한 議題(의제)는 서구와 동구의 화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화 과정에서 형성된 현재의 유럽 국경이 변경될 수 없다는 점의 확인, 그리고 독일 내부의 분계선에 대한 재확인 등이었다.
   닉슨과 키신저는 이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베를린市에 대한 자유 접근권의 보장 및 유럽의 재래식 군사력 감축과 연결시켜야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답했다.
   이 회의가 실제로 열린 것은 1973년 6월이었다. 이 회의는 소련에 대해서 현재의 유럽 여러 나라들의 국경선이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양보를 해주는 대신 많은 것을 얻었다.
   이 회의가 열렸을 때 서독 사민당 빌리 브란트가 시작한 동방정책에 의해 동독과 서독은 내부 분계선에 합의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서독으로 하여금 ‘국경선의 평화적인 변경’이란 조건을 이 회의에서 관철시키도록 뒷받침했다. 즉, “국경선은 국제법에 따라 합의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변경될 수는 있다”는 조항을 헬싱키 선언에 포함시킨 것이다.
  
   東歐(동구)의 해방을 가져온 인권조항
  
   이 조항은 1990년에 독일 통일 과정에서 주도권을 쥔 서독이 소련을 설득하는 법적인 근거가 되었다. 이 ‘평화적인 변경’ 조항에는 또 “서명국가는 국제조직, 군사적 동맹을 포함한 多者間(다자간)이나 상호 조약 기구에 가입하든지 가입하지 않든지 하는 자유를 가지며 중립 선택의 자유도 가진다”는 규정이 덧붙여졌다. 이 규정도 東歐 공산권이 해체될 때 위성국가들이 주권을 강조하면서 소련의 개입을 저지하는 법적인 장치가 되었다. 이런 조항을 내심 반긴 것은 소련의 무력적 내정간섭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동구 위성 국가들이었다.
   이 회의는 유럽 안보 협력 회의(the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CSCE)로 불리게 되었고 1975년의 헬싱키 선언 이후 존속된 조직체의 명칭은 유럽 안보 협력 기구(the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였다.
   黃長燁씨가 말하는 헬싱키 선언이란 유럽안보회의가 1975년 헬싱키 선언에서 채택한 인권선언을 가리킨다.
   이 조항은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교류, 인권, 기본적인 자유의 보호를 규정한 것이다. 이 조항은 유럽국가들이 제안한 것이다. 그 목적에 대해서 키신저는 회고록 (Years of Renewal)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목적은 국제협정에 의하여 소련이, 1968년의 체코 및 1956년의 헝가리 봉기나 시위 같은 것을 앞으로는 탄압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벨이나 바웬사 같은 비전과 용기의 지도자들은 헬싱키 선언에 들어 있는 이 조항을 이용하여 공산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근거로 삼았으며 마침내 동구유럽의 해방을 가져왔다.>
   헬싱키 선언에서 반영된 人權 조항의 교섭을 주도한 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북한인권 문제를 가장 열정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유럽안보회의는 ‘군사적 신뢰조치’에 대한 합의도 이루었다. 예컨대 사단급 부대를 이동할 때는 30일 전에 관련국가에게 통보해야 한다는 조항을 둔 것이다. 이런 조항도 재래식 군사력에서 우세한 소련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휴지?
  
   포드 대통령이 헬싱키 회의에 참석하여 한 연설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있다.
   “미국은 이 회의가 합의한 원칙들을, 인류를 위해 보전해야 할 유럽 문명의 위대한 유산의 하나로 간주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이런 것들은 공허한 말이나 진부한 표현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 작업과 말들을 심각하게 여길 것이다. 여러분들은 미국 정부와 국민들이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에 대해서 갖고 있는 깊은 신념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포드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역사는 오늘 우리가 말한 것이나 우리가 약속한 것으로 이 회의를 평가하지 않고 우리가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약속을 지켜낼 것인가로 평가할 것이다.”
   포드는 이 대목을 이야기할 때 일부러 맞은 편에 앉은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의 눈을 노려보았다고 한다. 서방세계는 포드의 이 약속을 지켰다. 따라서 헬싱키 선언은 말장난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꾸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서방세계는 소련에 대해 헬싱키 선언을 계속해서 상기시킴으로써 이 선언이 소련의 행동을 규제하는, 즉 인권탄압을 못하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도록 했던 것이다.
   1991년에 남북한이 맺은 기본합의서는 우리측의 주도로 이루어진 합의였다. 이 합의대로 하면 남북한은 평화공존의 길을 걸으면서 통일로 가는 前段階(전단계)의 교류와 협력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북한은 이 합의서의 이행을 거부했다. 남한은 이 합의서의 이행을 북한에 강제할 수단이 없었다. 그 뒤의 정권-金泳三, 金大中 정권은 이 합의서를 잊었다. 북한과 대화할 때 항상 이 합의서의 이행을 촉구했어야 했는데 다른 정권에서 만든 것이라고 그랬는지 그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972년의 7.4 공동 성명은 통일3원칙으로서 북한이 주장해온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뒤 북한이 주한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요구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 공동성명보다도 훨씬 구체적으로 진전된 실천계획이 남북기본합의서였다. 교류, 경제협력, 군사적 긴장완화 등 거의 모든 부문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이 문서는 대한민국 측의 의지 부족으로 휴지가 되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은 김정일를 만나기 전까진 기본 합의서를 강조하더니 평양 會談(회담)에선 우리에게 불리한 7.4공동성명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의 요구를 많이 받아들인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金大中 대통령은 왜 7.4공동성명과 함께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가장 중요한 문서인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가. 盧泰愚 정부의 가장 큰 성과인 남북기본합의서를 스스로 無力化시킨 것이다. 그러면서도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남한의 연합제 통일방안에 공통점이 있다고 합의해준 것은 북한 측으로선 남북 대화 30년만의 일대 성과라고 환호할 만한 일이었다.
   남북관계의 기본 문서에 한국 측이 북한의 통일원칙을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원칙이어야 할 자유와 인권에 대해서 한 마디도 반영시키지 못한 것은 과연 한국 측이 통일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마저 갖게 하였다.
   헬싱키 선언도 휴지가 될 수 있었다. 미국 등 서방세계가 이를 선언으로만 인식했다면. 그러나 미국의 歷代(역대) 정권은 헬싱키 선언을 對蘇(대소)정책의 기본틀로 생각하고 이를 근거로 소련을 압박하여 공산권의 붕괴를 촉진했던 것이다. 남북간에 아무리 근사한 합의가 있어도 그것을 관철시킬 만한 지도자의 신념과 國力과 국민들의 합의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선언은 좋은 말로서만 기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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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련측에서 본 헬싱키 선언
  
   인간의 사고능력이란 무서운 것이 세계를, 역사를 바꾸는 힘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사이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경비를 지불하고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킬 것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참고가 될 만한 역사적 事例를 찾아보면 1975년 헬싱키 선언이 있습니다.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붕괴를 가져오는 데 있어서 이 선언이 한 역할에 대해서는 과거 조금 언급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소련측에서 이 선언을 어떻게 보았는지 검토해보기로 합시다.
  
   아나톨리 도브린이란 사람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1962년에 미국 주재 소련 대사로 부임하여 그 뒤 24년간 케네디, 존슨, 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까지 여섯 대통령과 그 정부를 상대했던 거물 외교관이었습니다.
  
   도브린이 은퇴후에 쓴 회고록 'In Confidence'(비밀로)가 1995년 미국의 타임스 북스(Times Books)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서 그는 헬싱키 선언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헬싱키 선언은 1975년8월1일에 서명되었다. 이 선언은 그 뒤 소련과 동구 공산국가 내부에서 자유화 운동이 오랫동안 골치아프게 진행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은 결국 이들 국가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 냉전이 종식되도록 하였다.>
  
   헬싱키에서 열렸던 회의의 공식 명칭은 유럽의 안보와 협력에 관한 회의(The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iope)였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35개국이 참여했는데, 이는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한 1815년 비엔나 회의 이후 최대 규모였습니다.
  
   이 회의는 소련이 유럽과 미국을 이간질시키려고 제안했던 것인데 미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묵혀 있다가 1973년 닉슨 대통령의 결단으로 미국이 참석하면서 예비 회담이 2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의제는 세 가지였습니다. 안보, 경제협력, 인도적 협력. 소련은 안보와 경협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국측은 인도적 협력 즉 인권의 원칙을 이 선언에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소련은 인권문제는 국내문제라는 전제하에서 국제협정으로 이에 간섭하는 것을 거부하려 했습니다. 미국측은 소련이 인권 조항에 동의하지 않으면 안보 및 경협 부문에 대해서 동의해줄 수 없다고 버티었습니다.
  
   소련은 이 회의에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새로 책정된 폴란드 등 동구 공산국의 국경선을 서방으로부터 보장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서방에서 人權조항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낭패한 것입니다. 인권조항에는, 서명국은 기본적 인권, 이동의 자유, 사상 교류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이 선언의 초안을 정치국 회의에 보내 토론하게 했습니다. 정치국 위원 중 수스로프, 코시긴, 포드고르니, 안드로포프는 인권조항을 받아들인다면 국내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간섭을 허용하게 될 것이라면서 반대했습니다.
  
   많은 소련 대사들도 이 조항 때문에 국제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를 준비했던 그로미코 외무장관이 이 초안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무엇이 內政 간섭인가 하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소련정부뿐이다. 우리는 우리 집의 주인이다'고 말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설득했습니다.
  
   브레즈네프도 그로미코 편을 들었습니다. 그는 헬싱키의 거대한 국제頂上회담장에 나가서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는 것에 매료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이 2천만 명 이상의 人命을 희생시켜가면서 확보한 국경선을 서방이 인정해준다는 것은 기가 막힌 선전 무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또 이것을 소련 국내 선전에 잘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권조항에 대해서는 소련 국내에 간단하게 소개하면 그만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소련은 헬싱키 최종 협정(Helsinki Final Act)라고 불리는 선언에 서명했던 것입니다.
  
   도브리닌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브레즈네프의 판단은 잘못된 것임이 곧 밝혀졌다. 소련의 反체제 세력은 이 역사적 문서에 의해 크게 고무되었다. 프라우다에 보도된 이 선언의 全文은 소련 정부의 공식 문서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문서는 反체제 자유 세력의 헌장처럼 되었다. 이것은 소련 지도층이 상상하지 못한 사태 전개였다.>
  
   재미 있는 것은 브레즈네프를 함정에 빠뜨려 냉전에서 미국이 승리하도록 한 초석을 놓았던 포드 대통령은 미국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성토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소련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공화당내 포드의 경쟁자였던 레이건 지사(뒤에 대통령)도 포드를 공격했습니다.
  
   미국 포드 대통령은 키신저 국무장관의 도움을 받아 이 회의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양보를 소련으로부터 받아냈습니다. 동구권 국가의 국경선을 인정해준다면서 단서 조항을 하나 끼웠던 것입니다. 즉, 평화적 방법으로써 국경선을 변경하는 것은 합법적이란 조항이었습니다. 이 조항은 서독 정부의 부탁을 받아 미국이 밀어붙인 것이었습니다.1990년 동서독이 통일될 때 이 조항으로 해서 소련은 동서독 사이의 國境변경에 대해 불법이란 항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헬싱키 선언이 동구 공산국가들에게 미친 영향도 큰 것이었습니다. 인권조항 덕분에 폴란드 같은 데서 反共시위가 일어나도 과거처럼 소련 군대를 보내 탄압하기가 논리상 어렵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바웬사 같은 지도자들이 폴란드에서 반공 노조 운동을 열심히 벌여 공산권 붕괴의 불길을 당겼던 것입니다.
  
   자, 위의 헬싱키 선언 공식을 북한의 북한 정권에 어떻게 적용하면 될까요. 김정은이 자멸의 길을 열지로 모르는 인권의 원칙을 수용할 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는 판단을 스스로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예컨대 북한이 또 핵실험을 하면 유엔 안보리 결의로 北核 문제 해결을 위한 더 강력한 對北 경제 제재를 걸어놓습니다. 예컨대 항만과 해운봉쇄도 합니다. 이렇게 해두고 기다리면 김정은 정권은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입니다.
  
   국제사회가 유리한 입장에서 김정은과 협상이 가능해질 때 협상 의제로 인권조항을 넣는 것입니다. 인간 이동의 자유, 사상의 자유, 정치수 수용소 폐지, 이산 가족 재결합 등등을 저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북한의 내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교두보가 생겨 민주화 운동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만약 김정은 정권이 인권 조항을 지키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간섭을 받아야 하게 됩니다.
  
   인권문제는 內政이 아니라 국제사회 공통의 문제이므로 인권탄압을 하는 국가를 국제사회가 응징하는 것은 합법적인 행위, 때로는 경찰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생각해봅시다. 김정은의 핵공갈에 대해 한국 미국이 인권을 들고 나와 대응한다면 누가 이길지. 인권, 즉 사랑의 원자탄이 공포의 원자탄을 녹일 것입니다. 인권은 세계 여론, 특히 NGO와 진보세력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북한에서 민중봉기가 나서 김정은이 위태해지면 국군을 보내서 김정일을 보호하자고 할 사람들입니다. 인권이야말로 북한정권을 평화적으로 붕괴시켜 2300만 동포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 2014-01-14, 11:11 ]

 

 

 

 

독일통일의 교훈을 거꾸로 배운 좌파들

 

 

염돈재 박사의 책을 추천한다.

 

趙甲濟   

 

 

 

국가정보원 제1차장(해외담당) 출신인 염돈재 박사(성균관 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장)가 쓴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평화연구소, 1만5000원)은 누구보다도 정치인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란 생각이 든다. 著者(저자)는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통일 모델을 설명하면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실패한 對北(대북)정책을 비판하고 代案(대안)을 제시한다.
  
   나는 이 책이 독일통일을 다룬 국내 책들 중에서 최고라고 평가한다. 이 책만큼 핵심을 정확하게 짚고 쉽게 정리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 독일통일과 남북통일의 조건들을 비교하면서 그가 제시한 정책 代案(대안)들은 모두가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것들이다. 통일정책에 관계하는 이들의 必讀書(필독서)이다.
  
   이 책이 實感(실감) 있게 읽히는 것은 著者(저자)의 독일통일 현장 경험 덕분이다. 염돈재 박사는 盧泰愚(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에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북방정책의 立案(입안)에 관계하였다. 그는 헝가리, 소련 등 공산권과 수교 교섭을 할 때 실무자로 참여하였다. 더구나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통일 과정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던 1990년 8월에 駐독일대사관 공사로 부임, 3년간 근무하였다. 그는 2003~2004년 노무현 정권 시절 國情院 해외담당 차장으로 재직하면서 對北정책에도 간접적으로 관계하였다.
  
   그는 머리글에서부터 <우리 사회가 독일통일의 배경을 잘못 이해하고, 독일통일이 주는 교훈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국에선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이 東獨과 적극적인 교류·협력을 해온 것이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著者는 <독일통일은 基民黨 정부의 ‘힘의 優位’ 노선이 이룬 성과>라고 규정한다. 그는 <서독 정부가 社民黨의 화해·협력 노선을 따랐다면 독일통일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저자는 노태우 정부 때 북한정권과 맺은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햇볕정책과 對北지원은 독일통일의 원인을 誤解한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했다.
   <우리가 (서독 사민당처럼) 善意를 갖고 먼저 북한을 지원하고 북한의 안정과 발전을 도우면 북한도 변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다>는 전제는 잘못 된 것이다.
  
   그는 <우리는 지금 독일통일을 잘못 이해한 데 따른 代價를 톡톡히 치루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화해협력 정책과 햇볕정책은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10년간 추진한 이 정책은 <공산동맹의 상실과 경제파탄으로 위기에 처한 북한이 위기에서 벗어나 핵개발에 필요한 시간과 자금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염돈재 원장은 독일통일이 미국의 부시 정부의 적극적 지원으로 가능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 점을 알았다면 韓美관계를 더 소중히 생각했어야 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독일통일에 관해 집단오류에 빠졌었다고 지적하였다.
  
   <독일정부가 통일과정에서 저지른 실책을 연구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진 것>은 독일통일을 성공사례로서가 아니라 실패사례로 인식하는 과오를 범하게 했다. 가장 모범적인 평화통일 사례가 한국사회에선 ‘경계해야 할 모델, 회피해야 할 모델’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독일통일의 후유증을 과장한 지식인들이 “조급한 통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경제를 살려놓고 나서 천천히 통일해야 한다”고 하니 젊은 세대에는 “통일을 왜 해야 하는데? 통일을 하면 북한사람은 누가 먹여 살릴 건데?”하는 통일기피 심리가 널리 퍼지고 있다고 그는 개탄하였다.
  
   염돈재 원장은 <독일통일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이룬 성과가 아니다>고 단정한다. 오히려 <서독의 對동독 지원이 동독의 민주화 혁명을 지연시켰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것이다.
  
   독일통일은 頂上회담을 통해서 이뤄진 것도 아니고 東西獨이 화해하고 협력해서 이뤄진 것도 아니다. 동독 공산정권 지도자들의 결단으로 이뤄진 것도 아니다. 독일통일은 동독 共産정권이 주민의 시위로 무너지고, 동독국민들이 西獨연방에의 가입을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저자는 정리하였다.
  
   따라서 동독 공산정권을 인정하고 안정시켜 동독의 변화를 유도하려고 한 社民黨의 정책은 정통성 없는 동독 공산정권을 안정시켜 평화혁명을 지연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비판 논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對北(대북)정책에 그대로 적용된다. 사민당의 햇볕정책은 공산주의의 改良 가능성과 ‘위로부터의 혁명’ 가능성을 믿었다는 점에서 역사인식의 오류를 범하였다. 1989년 가을 東獨에서 주민들이 反共시위를 벌일 때 서독의 야당인 사민당은 소련 및 동독과의 화해협력 기반이 손상된다는 점을 걱정하여 통일된 독일의 중립화 추구, 東獨 이주민의 수용 제한, 동독에 대한 경제지원 등을 주장하였다. 著者는 이 주장대로 하였더라면 독일통일은 불가능하였거나 통일과정이 훨씬 지연되었을 것이라고 썼다.
  
   염 원장은 독일통일은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보다는 기민당이 추구해온 ‘磁石 이론’의 성과라고 평가하였다. ‘자석 이론’이란 <서독이 경제, 정치, 군사, 도덕적으로 ‘힘의 優位’를 차지하면 자석에 쇠붙이가 끌려오듯 동독이 끌려와 (흡수)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독일식 흡수통일이 한반도에도 유리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남북한의 경우 ‘흡수통일’이 아닌 ‘대등한 통일’을 해야 한다면 남북한이 서로 타협하고 양보하고 절충해야 한다. 그렇다면 김일성 주체사상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수용하고 시장경제 체제를 고수할 것인가? 결국, 북한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대등한 통일은 불가능하다. 역사상 대등한 위치에 있는 分斷(분단) 양측이 평화통일을 이룬 사례가 없으며 힘의 차이가 있을 때 통일이 용이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흡수통일은 불가피한 선택이 될 가능성이 많다>
  
   염돈재 원장은 한국에서 독일식 흡수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고 통일 후유증이 크게 부각된 데는 독일 社民黨(사민당) 계열 인사들의 영향도 있다고 했다. 통독 직후 한국 언론에 소개된 인사들 가운데는 통일의 主役(주역)인 기민당 계열보다는 비판적인 사민당 계열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한국언론이 호의적으로 소개하였던 하버마스, 귄터 그라스, 패트릭 쥐시킨트 같은 인사들은 독일안에서도 통일에 대하여 험담을 많이 하는 좌경적 지식인이다. 좌파정권도 햇볕정책과 對北(대북)지원의 당위성을 홍보하면서 독일통일을 실패사례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著者(저자)는 북한경제를 회생시킨 후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지적한다. <부패한 북한 사회주의 독재체제 하에서 통일에 도움이 될 만한 수준의 경제발전을 이룬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의 경제기반을 더욱 강화하고 財政(재정)의 건전성과 탄력성을 높여 나가는 일이 훨씬 더 현실적 방책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북한을 대함에 있어서 ‘好意(호의)와 지원이 북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잘못된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면서, ‘속아서도 안 되지만 속이려 해서도 안 된다’는 名言(명언)을 남겼다. 흡수통일이란 말을 두려워하는 한국의 識者層이 이 책을 읽고 용기를 되찾았으면 한다.
  
  
  
  [ 2011-01-04, 22:46 ]
  

[ 2014-01-14, 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