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글씨”: 감옥 앞의 우파와 좌파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의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는 1640년대의 미국 보스턴(Boston)을 배경으로 하는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로서 유럽 최고 수준의 문학 작품과 견줄 수 있는 첫 번째의 미국 소설이었다. 《주홍 글씨》로 인해서 미국은 문학도 유럽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
호돈은 뉴잉글랜드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스턴 지역 鄕土年代記(향토연대기)와 法庭 季刊誌(법정 계간지)를 愛讀(애독)하였다. 《주홍 글씨》는 이런 史料(사료)에 나타나는 간통사건의 재판과 형벌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호돈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사실과 허구”의 결합체이다. 특히 사랑하지 않는 늙은 남편과 결혼하고 간통죄를 범한 헤스터 크래포드(Hester Craford)라는 젊은 여인의 재판에는 엄격한 청교도였던 호돈의 조상들도 관여했었다.
유토피아에도 감옥은 있어야 한다.
청교도들은 기독교적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정치적 속박과 종교적 탄압을 피해 新大陸(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舊大陸(구대륙)의 타락과 죄악으로 오염이 되지 않은 原初的(원초적) 순수 세계인 새로운 에덴을 건설하려고 했다. 에덴이라는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들은 神의 戒律(계율)을 철저하게 따르고 神의 계율에 의해서 사회를 통제하고 국가를 경영하는 神政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全知全能한 神의 계율을 하나도 어김없이 완벽하게 실행할 수 있을 만큼 완전한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神政을 실현해 행복을 누리기에는 너무나 결함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율을 위반하는 罪人(죄인)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處女地(처녀지)에 도덕적 순수와 행복의 유토피아를 세우면서도 감옥과 묘지를 위한 땅”도 할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사회에는 聖者(성자)들의 교회와 죄인의 감옥이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감옥이 없으면 지상낙원의 건설이나 維持(유지)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유토피아에도 감옥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생존조건이다.
엄격한 청교도 교육을 받은 호돈은 《주홍 글씨》에서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이상에 지나치게 몰입해 인간성을 억압하게 되는 청교도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인간 정열의 제한 없는 방출이 초래하는 혼돈과 무질서에 대해서도 憂慮(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정열을 禮讚(예찬)하면서도 계율의 필요성도 看過(간과)하지 않고 있다. 계율 즉 법이 없으면 인간 공동체의 존속은 물론 문명의 생성과 발달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호돈은 정열과 계율 간의 갈등과 이로 인한 죄와 벌과 懺悔(참회)의 과정을 면밀히 추적하면서 공익을 위한 사회적 규범이 종교적 교리나 정치적 이념에 의해 절대화되는 순간 규범은 개인의 자유와 인간을 말살하는 괴물로 변형될 수도 있지만 정열의 무제한적 방출도 위험하며 성공적인 사랑은 법과 도덕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罪人에서 聖女의 길로
姦通罪(간통죄)로 복역 중이던 헤스터 프린(Hester Prynn)은 군중들 앞에서 가슴에 A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繡(수)를 달고 3시간 “전시된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그 붉은 글씨를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A는 간통을 의미하는 ‘adultery’의 머리글자이다. 그러나 정열이 삶의 기본원칙인 헤스터는 주홍글씨 A를 죄의 부끄러운 징표가 아니고 사랑의 자랑스러운 깃발로 간주한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주홍글씨는 군중들은 물론 上席(상석)에 앉아 있는 주지사, 목사 등
식민지 고위인사들의 눈길을 마법처럼 사로잡고 있었다. 사랑의 所産(소산)인 아기를 안고 군중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헤스터는 광휘에 빛나는 女神의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열과 애정이 없이는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헤스터에게 주홍 글씨의 징벌을 가하는 청교도들도 아무리 존경받을 만하고 덕성이 훌륭하더라도 헤스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내면에는 죄 있는 정열이 있기 때문에 헤스터는 種族(종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주홍글씨로 죄 값을 치르는 희생양(scapegoat)의 역할을 한다. 일반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죄를 공개적으로 스스로에게 烙印(낙인)함으로써 헤스터는 사회대중의 양심을 淨化(정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헤스터는 존경받는 목사 딤즈데일(Diemsdale)과의 사회적으로 금지된 사랑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지는 않지만 청교도 법정이 내린 형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부당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앞두고서도 “악법도 지켜야 한다.”라고 말한 소크라테스처럼 헤스터는 정열의 형벌을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받아들인다. 이로 인해서 그녀는 고통과 苦惱(고뇌)의 세월을 보내야 하였다.
懲罰(징벌)의 세월이 흘러 갈 동안 헤스터는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살았다. 그녀는 사람들과 결코 다투지 않았다. 자신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과 병자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도와주는 봉사와 희생의 미덕을 쌓으며 도덕적 純粹(순수)의 길을 갔다. 사람들은 그녀를 호의적으로 보기 시작하였고 그녀를 “자비의 수녀”(Sister of Mercy)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에 있는 주홍 글씨를 수치와 죄악의 징표가 아니고 여성의 힘을 상징하는 Able의 머리글자 A라고 말하였다. 또한 주홍글씨 A는 수녀의 가슴에 달고 있는 십자가처럼 모든 재앙을 물리치는 聖(성)스러운 힘이 있다고도 하였다. 청교도의 엄혹한 법이 자신의 소중한 사랑을 파멸시켰지만 그 법이 내리는 형벌의 적극적인 수용과 고통을 통해서 헤스터의 영혼은 천사처럼 淨化(정화)되어 간 것이다. 古代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작가 이스킬러스(Aeschylus)의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We must suffer, suffer and suffer into truth)라는 말처럼 고통은 헤스터로 하여금 죄인에서 성녀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딤즈데일의 다행스런 顚落(전락)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스는 침착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이 결코 순수하고 義롭지는 않았다. 그는 姦夫(간부)의 탐색과 膺懲(응징)에 偏執狂(편집광)적으로 집착하였다. 그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딤즈데일이 헤스터의 연인이라는 心證(심증)을 가지게 된다. 칠링워스는 딤즈데일의 主治醫(주치의)가 되어 치료를 빙자해 딤즈데일의 집에 寄居(기거)하면서 그의 비밀을 면밀하게 캐어 나갔다. 어느 날 병약해진 딤즈데일 목사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칠링워스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옷을 제쳤다. 그리고 목사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주홍글씨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그의 얼굴은 狂暴(광폭)한 歡喜(환희)로 가득하게 된다. 칠링워스의 모습은 영혼을 지옥에 빠뜨린 악마의 그것과 닮았었다. 그는 인간 공동체의 발전과 존속에 필수적인 법과 도덕성을 善한 목적이 아닌 개인적 복수를 위해 악용하였기 때문에 악마로 변형된 것이다. 악마는 법과 도덕성마저도 악행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딤즈데일은 마음속에 숨겨둔 죄로 인해, 그 죄를 공개적으로 참회하지 못하는 비겁함 때문에, 그리고 교묘하게 그의 양심을 찌르면서 그의 죄의식을 증폭시키는 칠링워스의 간악한 계략으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져 갔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고통의 불길로 인해 精練(정련)되고 淨化(정화)되어 갔었다. 죄로 인한 고통이 그로 하여금 진리에 보다 더 가깝게 하고 그의 정신세계를 보다 더 심원하게 성숙시키는 것이었다.
슬프고 고뇌에 찬 딤즈데일의 설교는 대단히 감동적이고 가슴을 적시는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딤즈데일은 가장 미천한 사람들에게도 깊은 이해와 따뜻한 동정을 나타내었고, 고통 받는 죄인들에게도 형제적 紐帶感(유대감)을 가졌다. 사람들은 세상의 죄악에 대한 煩悶(번민)으로 허약해진 딤즈데일이 그들 앞에서 예수처럼 산 채로 昇天(승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만큼 그를 거룩한 존재로 우러러보게 되었다.
딤즈데일은 소설의 끝에 가서 사랑의 도피를 하자는 헤스터의 제의를 거부한다. 그는 헤스터와의 “금지된 사랑”의 경험에서 정열은 법과 도덕의 통제를 벗어나면 성공적인 사랑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청교도 법전의 엄혹한 權化(권화)”가 아닌 “가장 죄가 많은 자에게도 형제애를 보여 주는” 사회지도자로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죄인의 경험을 통해 죄를 짓는 인간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동정하며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는 顚落(전락)을 통해서 진리를 터득하고 인간으로서 가능한 線(선)까지 승리한 인간이 된다.
《주홍글씨》에서 호돈은 罪를 짓고 형벌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전락(Fortunate Fall)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헤스터와 딤즈데일은 죄를 짓고 형벌을 달갑게 받아들이면서 각각 성녀와 성자의 길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죄를 짓지도 않고 형벌의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다면 甲男乙女(갑남을녀)의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죄와 형벌이라는 淨火(정화)의 불길 속에서 이들의 영혼은 淨化(정화)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악마가 되는가?
불에 대인 아기가 불을 두려워하듯이 죄를 지어서 형벌의 고통을 당한 사람은 죄를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사회에는 어디에나 형벌이 있고 감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짓는 존재이지만 죄를 두려워하는 동물로 진화해 왔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이 도덕적인 동물로 진화하는 데 一助(일조)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이코를 제외한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죄를 두려워하고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공동체는 존속할 수 없고 문명의 발전도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죄를 두려워하고 죄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헤스터나 딤즈데일처럼 죄와 벌은 오염된 영혼을 순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의 兄이 거액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아먹은 죄로 감옥살이 하다가 出獄(출옥)할 때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국민에게 죄송합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얼굴 표정은 어두웠고 그의 눈길은 카메라를 애써 피하고 있었고 음성은 풀이 죽어 있었다. 그의 心情(심정)은 죄를 지어서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였다. 대통령도 국민에게 사과하였다. 그들은 우파 정치인이었다.
저명한 언론인이고 방통위 위원장이던 그는 뇌물죄로 수감될 때 “국민에게 죄송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悔恨(회한)에 젖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도 우파 人士(인사)였다. 대부분의 우파는 고관대작이든 미관말직이든 市井雜輩(시정잡배)이든 죄를 짓고 잡히면 고개를 푹 숙이면서 죄송하다고 말한다. 우파뿐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심지어 흉악한 살인범이라도, 죄가 드러나서 경찰에 체포되면 대체로 머리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한다. 아니면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떨군다.
좌파들은 정치인이든 지식인이든 시정잡배이든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좌파는 예외 없이 獨善(독선)과 광신에 사로잡혀 唯我獨尊(유아독존)의 정신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내란죄로 잡혀 들어가던 어느 좌파 국회의원은 “도둑놈들아! 도둑놈들아!”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의 표정은 증오의 덩어리였다. 나라를 강탈하려는 대역죄를 짓고도 賊反荷杖(적반하장)으로 국가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도둑이라고 毒舌(독설)을 퍼부으며 악을 쓰는 것이다. 그를 “首”로 받들어 모시는 좌파의원들은 머리를 삭발하고 “민주”투쟁을 한다며 단식까지 하고 있다. 이들의 얼굴에는 미안하다는 표정은 전혀 없고 이들의 음성은 풀이 죽기는커녕 殺氣(살기)가 어려 있다.
무슨 “꼼수”라는 좌파 어릿광대는 법원에서 풀려나오면서 정의의 투사처럼 意氣揚揚(의기양양) 하게 머리를 쳐들고 큰소리치고 있었다. 어느 유명한 좌파 詩人은 선거법 위반죄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머리를 독사처럼 쳐들고 자신을 거미줄에 걸린 나비로 비유하며 “수난당하는 예술인 像(상)”을 연출하였다. 어느 지위 높은 변호사 출신 좌파 기관장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者를 옹호하면서 악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국가를 지키는 보안법을 악법이라는 것이다. 어느 좌파 국회의원은 대통령 경호실 경찰관을 얼굴이 피범벅이 되도록 구타하고서도 청와대에게 사과하라고 대들었다. 또 다른 좌파 의원은 국회에서 최루탄을 터뜨리고서도 正義(정의)의 투사처럼 날뛰었다. 이 반역적 범법자들에게서 秋毫(추호)의 후회나 미안함이나 부끄러움을 읽을 수 없었다.
史草(사초)를 私邸(사저)로 불법 搬出(반출)한 좌파 대통령을 떠받들던 정치인과 그의 하수인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말을 바꾸고 거짓말하면서도 조금의 수치심도 없어 보인다. 비밀이 담겨 있지 않은 일반 공문서라도 원위치에 보관하지 않으면 징계를 받는 데 국가 Ⅰ급 비밀문서를 제 멋대로 유출하고 파기하고서도 눈을 부라리며 “뭐 잘못 했나?”라든 듯이 머리를 쳐든다.
정상적인 인간은 누구나 죄의식이 있다. 어린아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얼굴이 빨갛도록 부끄러워한다. 반대로 악마는 죄를 숭배하고 죄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금 죄를 짓고도 意氣揚揚(의기양양)하게 큰 소리치고 있는 한국의 반역좌파는 문자 그대로 악마이며 악마의 제자들이다. 악마는 법을 무시할 뿐 아니라 칠링워스처럼 법을 惡行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도 한다. 이들에게는 죄의식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죄악이 이들의 本性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부끄러워하고 악마는 죄를 자랑으로 생각한다. 감옥 앞에 서 있는 우파와 좌파의 차이는 인간과 악마의 차이라고 하겠다. 우파 죄인은 再生의 가능성이 있지만 좌파 죄인은 再生이 거의 불가능하다. 우파는 헤스터나 딤즈데일처럼 죄를 지어도 그 죄를 부끄러워하고 죄 값을 당연한 듯이 치르며 재생의 길을 갈 수도 있지만 좌파는 죄를 짓고도 그 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감옥에 갔다 온 것을 훈장이나 받은 것처럼 자랑하기 때문에 改過遷善(개과천선)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파는 죄인이라도 헤스터나 딤즈데일처럼 형벌의 고난을 통해 聖女와 聖人의 班列(반열)에 오를 가능성이 있지만 성녀 성자라도 공산주의 독충에 물리면 예외 없이 살인을 하고도 미소를 짓는 악마로 전락하게 되기 쉽다. 주홍글씨(형벌)는 우파에게는 재생의 수단이 되지만 좌파에게는 악행의 원천이 되는 것 같다. 20세기 최악의 살인마 3人―히틀러, 스탈린, 모택동―중에 2명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죄를 지으면 부끄러워하는 右派 인간과 살인 하고도 미소 짓는 左派 악마
인간은 죄를 부끄러워하고 악마는 죄를 자랑으로 생각한다. 좌파에겐 죄의식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죄악이 이들의 本性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朴承用
[ 2013-11-20, 22: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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