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賢姬를 사실상 가짜로 몬 천주교 사제 115명 명단
115명의 신부들이 오늘도 수많은 신도들 앞에서 진실과 正義를 외칠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이 이보다 더할 순 없다.
趙甲濟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를 사실상 가짜로 몬 115명의 신부들이 있다(2003년). 이들을 기독교의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실까 궁금하다. 이들은 터무니 없는 의혹을 제기한 文書(문서)에 감히 성경 귀절을 인용하고 있다. 진실과 사랑의 종교가 거짓과 증오의 수단으로 惡用(악용)되었다. 115명의 신부들이 오늘도 수많은 신도들 앞에서 진실과 사랑을 외칠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 인간의 사악함이 이보다 더할 순 없다.
1987년 대통령 선거 개표 때 컴퓨터 부정이 있었다고 거짓 선동했던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의구현'은 '不義(불의)구현'이 아니었던가? 진실을 떠난 사랑, 진실을 떠난 正義는 없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신부들이 정말로 KAL기 폭파가 김정일의 지령에 의한 것이란 진실을 몰라서 이런 거짓된 행동을 하는가. 알면서도 그러는가? 前者(전자)라면 공부를 더해야 하고 後者(후자)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사랑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글, 겸손함이 전혀 없는 글, 저주와 편향과 왜곡과 오만이 가득한 아래 글에는 반드시 天罰(천벌)이 내릴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소명과 함께 사제적 양심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정부당국에 요구합니다.>라는 말이 천벌의 씨앗이 될 것이다. 폭파지령자 김정일에 대해선 한 마디의 항의도 하지 않는 인간들이 말하는 '시대적 소명'은 '학살자 비호'이고, '사제적 양심'은 '거짓선동의 자유'인가?
성명서는, <고귀한 생명이 정치적 음모로 희생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예언자적 사명을 실천코자 합니다>고 했는데, 왜 지령자 김정일에 대해서 해야 할 이야기를 우리 정부를 향해서 하는가 말이다. 김정일이 앗아간 원혼들이 이젠 좀 편안히 저승에서 永眠(영면)해야 할 때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가지고 저승까지 소란스럽게 만든 신부들은 지옥에 갈까, 천당에 갈까?
살인범(김정일)을 욕하지 않고 오히려 피살자의 집안(한국)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 성당이다. 이 모든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의 바닥엔 학살자 김정일의 대한항공 폭파 지령을 은폐해주려는 끈질긴 집념이 있다. 거짓에 대한 집착이다. 이 놀라운 집착의 원동력은 좌편향 이념일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증오와 거짓까지도 적당히 덮어주는 분인가? 그것이 사랑이고 용서인가? 115명의 행동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국민들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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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 KAL858기 조작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 115인 선언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 : 10)
그렇습니다. 억울하게 숨져간 형제자매들이 지금은 이 땅에서 우리 모두에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16년 전 전두환 정권 말기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858 여객기가 미얀마 인근 안다만 해역에서 실종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실은 거대한 이 비행기는 시신도, 유품도, 잔해도 전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무수한 의혹 속에서 이제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생자들의 가족들은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함과 고통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흑막 속에 묻혀버린 사건의 진실을 찾아서 16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피눈물을 뿌리며 진상규명을 위해 몸바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이 사건은 잊혀진 것이 아니라, 조작된 것이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우리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 가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사건의 의혹을 풀어 진실을 밝혀내야 합니다. 거대한 흑막과 은폐의 벽을 무너뜨리고 망각의 장막을 거둬내어 저 깊은 어둠의 동굴 속에 묻혀 있는 음모의 진상을 세상의 밝은 빛 앞에 드러내어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해 내야 합니다.
이에 오늘 천주교 사제 115인은 성서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새삼 고백하며 신앙과 양심으로 115인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간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불의한 권력과 세력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하고 다짐합니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루가 12 : 2)
이른바 `KAL858기 폭파사건`은 발생 초기부터 숱한 의혹 속에서 진행되고, 고문과 학살의 대명사이던 전두환 독재정권과 그의 동반자 노태우 정권은 사건의 진상을 설명할 직접적 증거물을 하나도 제시하지 못한 채, 오로지 안기부의 밀실 속에서 빚어낸 김현희의 자백만을 근거로 'KAL기 폭파사건은 북한의 서울올림픽 방해책동의 일환'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종말을 맞았던 전두환 정권은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북한이 파견한 공작원이 항공기를 폭파했다는 이 사건은 조작의 의혹이 짙습니다. 이 사건은 지난날 안기부 등이 위기에 처한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김대중 납치사건, 최종길교수 고문치사사건, 이른바 인혁당 관계인사 고문조작 사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수지킴사건 등 각종의 암살과 테러, 조작사건과 완전히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의혹 중 우선 그동안 분명하게 밝혀진 몇 가지 사례만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정부가 KAL기 폭파범이라고 발표한 김현희는 가짜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1) 김현희가 자신이 북한에서 자랄 때 찍었던 사진이라고 제시한 사진 속의 인물들은 김현희가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밝혀졌습니다. 사진에 나타난 인물들은 모두 `동그란 귀` 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김현희의 귀 모양은 `칼 귀`로서 서로 다른 인물임이 너무나 명백합니다.
(2) 김현희가 자필진술서나 기자회견 등에서 사용한 용어 중 `TV`, `속죄`, `약주병`, `밧데리,` `조선항공기`, `변소`, `환승로비`, `여자경찰관` 등은 북한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또한 김현희가 썼다는 자필 맹세문의 `규율`이란 단어가 북한에서는 `규률`이라고 쓴다는 지적을 받자 당국은 맹세문의 용어를 황급히 고쳐 발표한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3) 정부는 김현희의 아버지가 앙골라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수산대표 김원석이라고 발표하였으나, 확인 결과 그러한 인물도 그러한 직책도 없었음이 밝혀졌습니다.
(4) 수사발표에 나타난 김현희의 행적에 대해 일본기자가 조작임을 제시하자 김현희는 그 뒤 자기가 썼다는 수기에서 수사 당시 발표된 행적을 슬그머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5) 김현희는 정예공작원으로서는 상식적으로 할 수 없는 행동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증거들을 소지하고 다니는가 하면, 도주할 수 있었음에도 도주하는 시늉만 내다가 체포되었다는 사실 등입니다.
(6) 김승일과 김현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
2. 정부는 이사건에 대해 사실상 형식적 수사만을 했을 뿐입니다. 미리 각본에 의한 것이기에 수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1) 항공기 사고시 블랙박스 수색은 기본인데도 블랙박스 수색을 위한 기구를 투입하지도 않고 블랙박스를 찾으려는 그 어떠한 구체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2) 사고 비행기가 미얀마의 카렌족 지배지역에 불시착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그 지역을 수색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수색 지역을 안다만 해역으로 바꾸었습니다.
(3) 정부는 형식적으로 유품과 잔해에 대해 수색하는 시늉만 내다가 10일 만에 수색을 포기하고 철수해 버렸습니다.
(4) 사고 항공기 잔해라고 발견하여 정부가 증거로 제시한 구명보트는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3. KAL858기가 폭파되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1) 이란-이라크 전쟁 중 경비가 삼엄한 바그다드 공항에서 비행기에 폭발물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
(2) 김현희가 설치했다는 폭발물(C4 350g: PLX700cc) 의 종류와 양으로는 항공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정도의 폭파가 불가능합니다.
(3) 당시 김현희의 행적을 유심히 살폈던 교체 승무원들은 모두 김현희가 그러한 종류의 폭발물을 들고 탑승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4) 정부는 일본인 여권을 가진 김현희 일행을 오스트리아 빈에서부터 바그다드를 거쳐 아부다비까지 계속 미행, 감시하였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김현희가 그러한 보안검색을 피해서 비행기 안에 폭발물을 설치할 수 있었겠습니까? 보안상식상 모순입니다.
위와 같은 숱한 모순과 분명한 사실에 기초하여 우리는 당시 정부의 발표가 진실에 기초하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2년 전에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정부에 대해 위와 같은 의혹을 제기하며 진상규명을 촉구하였으나, 정부는 이러한 의혹 제기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기부가 발표한 수사결과의 수많은 모순에 대해 가족들은 물론 항공사고 전문가들, 국내외 언론 등이 끊임없이 지적하여 왔으나, 역대 정부는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심지어 의혹을 제기하는 인사들에 대해 안보사범이란 누명을 씌워 탄압을 일삼는 등 진상규명 활동 자체를 봉쇄하고 조작하여왔습니다.
희생자 가족들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고, 가신 분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 사제들은 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껴안고 고귀한 생명이 정치적 음모로 희생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예언자적 사명을 실천코자 합니다. 또한 우리는 희생되신 115인 한 분 한 분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분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며 부활의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소명과 함께 사제적 양심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정부당국에 요구합니다.
우리의 요구
- 정부는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전면적으로 재조사를 해야 합니다.
- 정부는 전두환, 노태우, 안무혁(당시 안기부장), 이상연(당시 안기부차장), 정형근(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수사책임자) 등 당시 권력책임자와 사건수사 당사자들을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 국정원, 검찰은 당시 사건 관련자료 일체를 공개하고 의혹에 대해 소상히 해명해야 합니다.
- 정부는 공개토론회와 김현희에 대한 내외신 합동 기자회견을 개최하며, 진상 규명을 위한 민관합동조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2003년 11월 3일
KAL858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 115인
KAL858기 탑승자115인·천주교 신부 기도결연
승무원
<김직한(기장 58) - 박철수· 신문갑 신부>, <나우식(부기장 37) - 윤영길· 이세형 신부>,<한동숙(항공기관사 32) - 이정주· 최요섭 신부>,<유봉근(객실승무원 사무장 33) - 천장선· 윤희동 신부>,<권미경(여승무원 25) - 양인경· 정진국 신부>, <김성미(여승무원 22) - 이옥수· 고태경 신부>, <고나경(여승무원 25) - 이봉문· 박영진 신부>, <신정섭(여승무원 22) - 이준형· 최 훈 신부>, <구인실(여승무원 23) - 임병태· 하춘수 신부>, <유경승(남승무원 29) - 이영선· 박혁호 신부>,<박찬국(보안승무원 30) - 박비오· 최태준 신부> ,<황창남(보잉707기 기장 50) - 이준호· 최경식 신부>,<이규호(보잉707 기장 52) - 류현수· 이현우 신부>,<이현수(보잉707 기관사 34) - 조정훈· 남경철 신부>, <박명규(DC10기장 45) - 연제식· 조정제 신부>, <성창모(DC10기장 55) - 배승록· 노중래 신부>, <신태호(DC10 부기장 48) - 손병규· 이주형 신부>,<김형(DC10 기장 45) - 강창원· 임효진 신부>,<김재형(DC10 항공기관사 38) - 박찬인· 김정훈 신부>, <김동화( DC10 항공기관사 45 - 윤달수· 임성진 신부>
현대건설
<김탁진(기계배관 29) - 윤병권· 백남해 신부>, <김선호(AC계장 33) - 방영훈,·박요환 신부>, <이명춘(크레인 43) - 송우진· 이경환 신부>, <정종태(철골 30) - 김지성· 차호찬 신부>, <심재민(국내토목부과장 38) - 임기선· 유승학 신부>, <이재식(설비배관 38) - 강진용· 주세익 신부>, <고석준(발전공 40) - 김봉술· 한정수 신부>, <이용철(플렌트 전공 40) - 김동훈· 이재규 신부>, <김종대(증기엔진 50) - 김태현· 김민중 신부>, <오덕일(기계비계 33) - 김형준· 오병수 신부>, <김현길(해외전기부 4급 28) - 서북원· 정신철 신부>, <서춘길(하도급 관리 28) - 서종엽· 조명연 신부>, <강창원(건축도장 33) - 이강건· 정병덕 신부>, <정태진(제관 34) - 이상돈· 김성휘 신부>, <최덕만(방수 42) - 이상선· 손해락 신부>, <권용원(형틀목공 25) - 이상헌· 김태헌 신부>, <강흥구(증기엔진 26) - 장명원· 강윤희 신부>, <권순직(덤프 35) - 정원일· 현상옥 신부>, <조천희(플랜트전공 25) - 권오준· 김동철 신부>, <하승기(기계설비 31) - 이명균· 김일회 신부>, <모태국(한식요리사 33) - 주수욱· 김종성 신부>, <백경수(해외토목부차장 41) - 전종훈· 박희중 신부>, <권효칠(하도급관리 27) - 박창일·권순오 신부>, <김동선(해외인력부4급 30) - 윤종일·박인근 신부>, <박영대(하도급관리 40) - 김도연·박동진 신부>, <손탁익(기계보온 36) - 황동환·김훈 신부>, <김영상(한식요리 39) - 안충석 신부>, <손명준(조적 39) - 김권일 신부>, <김영기(크래딩 28) - 최광조 신부>, <김병노(플랜투전공 28) - 조병환 신부>, <박수용(플랜트전공 26) - 유재훈 신부>, <김달훈(해외인력부 대리 49) - 박진성 신부>, <조상찬(해외토목부대리 37) - 이현태 신부>, <이정훈(해외플랜트 부과장 38) - 조성학 신부>, <김경성(급여 35) - 신종섭 신부>, <김덕봉 전무 45) - 연용모 신부>, <김재훈(부장대우 39) - 신성국 신부>, <최충식(새시 28) - 곽동철 신부>, <황동철(해외증기부6급 51) - 박영봉 신부>, <손장주(국내공사관리부대리 32)- 김훈일 신부>, <박연출(중기자재 34) - 이동식 신부>, <김상윤(급여임직 32) - 최인섭 신부>, <유호신(플랜트 전공 40) - 박호성 신부>, <이종변(타이어 35) - 김병찬 신부>, <신건민(새시 27) - 이원순 신부>, <이경부(하도급관리 32) - 신범철 신부>, <이종섭(타이어 35) - 김남오 신부>, <김용진(한식요리 46) - 박치영 신부>, <김기수(형틀목공 43) - 정효준 신부>, <남달희(형틀목공 43) - 최범관신부>, <정회권(견출 26) - 김영수 신부>, <박선만(견출 27) - 전성호 신부>, <양정태(일반미장 42) - 정병철 신부>, <이용호(일반미장 42) - 이철우 신부>, <정인성(견출 42) - 주영길 신부>, <정길복(덤푸 35) - 이길두 신부>
정우계발
<이운용(토공 43) - 최광석 신부>, <서원길(토공 33) - 권오성 신부>, <김상만(토공 40) - 김대성 신부>, <박기형(새시공 33) - 송제호신부>, <김학현(건축재도 25) - 정창식 신부>, <정외석(목공 46) - 김기영 신부>, <박상길(토공 37) - 곽길섭 신부>, <이준삼(목공 26) - 김태형 신부>, <김승기(토공 31) - 이강우 신부>, <송갑면(목공 52) - 손태성 신부>, <조장업(요리사 35) - 조영만 신부>, <구본석(증기정비 30) - 한 건 신부>, <고동영(건축과장 31) - 장훈철 신부>, <나주현(형틀목공 29) - 강호성 신부>, <채홍목(토공 25) - 강정웅신부>
삼성종합건설
엄주선(배관공 35) - 김태환 신부>, <유대림(측량보조원 25) - 신동원 신부>, <박정태(트레일러운전사 44) - 이영훈 신부>, <안종인(조리보조원 28) - 배상복 신부>, <한성제(토목기사 30) - 최재현 신부>, <채종태(조리사 36) - 김병수 신부>, <김정수(비계공 36) - 최정훈 신부>
(주) 대우
서만석(리비아주재사장 55) - 장재봉 신부>, <이사성(해외업무1부장 39) - 이재원 신부>, <한석(해외업무1부과장 37) - 김대하 신부>
남광토건
<윤재희(철관공 42) - 박 혁 신부>, <김상훈(포클래인공 30) - 김인한 신부>, <김훈제(사무보조 32) - 정 호 신부>
한양
<지성진(이라크현장소장 - 서성민 신부>, <이형오(이라크기능직원 - 김명선 신부>, <송경민(현대종합상사대리 29) - 주영돈 신부>, <이강성(삼성종합계발목공 46) - 도정호 신부>, <최만구(한국중공업 36) - 고원일 신부>,<강석재(주이라크총영사 57) - 신기현 신부>, <홍연식(미영사 부인 53) - 원정학 신부>, <황명상(동아건설아부다비코시방파제건설의무촉탁 49) - 이영창 신부>, <김창완 - 윤승식 신부>, <김대웅 - 최원오 신부>, <돌와니디(인도) - 권경렬 신부>, <압오우에드몬디(아랍에미리트연합) - 김현영 신부>
천주교신부 총 162인
[ 2013-11-18, 10:10 ] |
경호 실패로 죽은 박정희-육영수
경호의 원칙을 어겼다.
趙甲濟
1974년 3월1일 오전 朴正熙 대통령은 부인 陸英修여사와 함께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55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때 외국대사들이 同부인하여 참석했는데 대통령 경호원들이 핸드백을 물품보관소에 맡기도록 했다. 경호원들은 부인들의 핸드백을 남자 경호원이 검색할 수가 없어 보관소를 운영한 것이었다. 경호원들은 대사 부인들에게 손수건만 갖고 입장하도록 했다.
이 행사 뒤에 駐韓외국사절단의 부인회에서 陸여사에게 과도한 경호조치라고 항의했다. 陸여사는 朴대통령에게 이를 전했고, 朴鐘圭 경호실장은 혼이 났다. 朴실장은 경호과장에 대해 정직처분을 내렸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부터 朴실장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라도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과잉 검문 검색을 하지 않도록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그해 8월15일 文世光은 국립극장에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경호원의 검문을 피했다. 陸여사가 자신의 죽음에 스스로 영향을 끼친 셈이다.
文世光은 1974년 8월15일 오전 7시 조선호텔에서 프론트로 전화를 걸었다.
'국립극장에 가야 하는데 오전 8시까지 승용차를 대기시켜주세요. 출발은 오전 9시입니다'
文은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여 바지 허리춤에 숨기고 오전 8시40분에 M-20 포드 승용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는 車中에서 운전기사에게 '국립극장에 도착하면 내려서 문을 열어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1만원권을 주었다. 文은 또 왼쪽 옆구리에 숨겨둔 권총으로 손을 넣어 총의 공이치기를 머리 위로 올려놓았다.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결정적 실수가 된다.
정각 9시 文世光을 태운 승용차는 국립극장 정문에서 검문을 받지 않고 들어가 극장 계단 아래에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리더니 뒷문을 정중하게 열어주었다. 중절모를 쓴 文世光은 기사가 공손히 절을 하는 가운데 계단을 올라갔다. 文은 왼쪽 현관을 통해 극장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검문하지 않았다.
당시 현관에는 대통령 선발 경호원이 3명, 경찰관이 8명 근무중이었다. 文은 비표도 없이 통과했다. 중절모를 쓰고 으시대는 文의 모습을 본 경호원들은 고위인사라고 생각하여 통과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그 뒤 조사에서 '3.1절 행사 때 외국인에 대한 경호를 너무 심하게 했다고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그날엔 소극적으로 대했다'고 변명했다.
극장안으로 들어온 文은 1층과 2층 로비를 오고가면서 저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는 통로에 카핏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는 朴대통령이 지나갈 때 저격하려고 카핏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장시간 같은 장소에 머물다가는 경호원의 검문을 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10여명이 권총을 차고 로비를 오가고 있었다. 文은 로비 경호원에게 먼저 다가가서는 '우시로쿠 일본대사와 스즈키씨를 기다리는데 혹시 오지 않았느냐'고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극장 로비는 여기 뿐인가요'
'2층에도 있습니다'
경호원은 文을 2층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文은 '아,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었지'하면서 1층으로 되돌아왔다. 경호원은 다른 간부 경호원에게 文을 인계했다. 경호원은 '저 분은 일본대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을 것이다. 인계받은 경호원은 文을 보고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나타났다. 경호원은 文을 잡고는 기둥 뒤에 있으라고 했다. 文은 朴대통령이 입장하는 것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약 10분 더 로비에서 머물렀다.
文은 다시 로비 근무자에게 다가가서 일본어로 '대통령의 얼굴을 한번 보고싶은데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근무자는 文의 입장을 묵인하는 표정을 지었다. 文이 로비에서 극장안으로 들어가려니 출입구 근무자가 비표를 달지 않은 그를 제지했다. 文은 로비 근무자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들어가도 좋다고 이야기했다'고 둘러대었다. 출입구 근무자가 로비 근무자를 바라보니 그는 무표정이었다. 출입구 근무자는 이를 들여보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극장안으로 들어온 文을 안내하여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자리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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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英修 여사 피살 사건 5일 뒤인 1974년 8월20일 朴대통령은 정상집무에 들어갔다. 이날 金鍾泌 국무총리는 오전 오후 두 차례 대통령을 만나 陸여사 서거 후의 國政방향에 대해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金총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吳定根 국세청장을 추천했다. 朴대통령도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吳定根은 5.16 군사혁명 때 출동한 해병여단의 병력을 이끈 대대장 출신(당시 중령)이었다. 가장 먼저 한강다리를 넘은 해병대 병력의 선두 지휘관이었다.
이날 오후 2시55분에서 3시20분 사이 朴대통령의 사위 韓丙起 대사가 청와대로 들어왔다. 韓대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車智澈 공화당 국회의원을 추천했다. 이날 오후 4시33분부터 5시20분 사이 朴대통령은 車의원을 불러 요담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車의원을 경호실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통보했다. 물론 車의원은 충성을 맹세했다.
8월21일 오후 2-3시 사이 朴鐘圭 실장이 대통령에게 離任인사를 하고 신임 車 실장이 취임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임무교대가 되었다. 朴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랫동안 모실 인물이 陸여사에서 車실장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10.26 사건을 예약한 인물교체였다.
누가 車실장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하고 왜 대통령이 그를 발탁했는가를 놓고 말들이 많지만 모든 결정은 朴대통령의 몫이다. 기자가 입수한 朴대통령 재임기간중의 면담일지를 읽어보니 車의원을 경호실장으로 발탁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陸여사 피살 이전에도 朴대통령이 가장 자주 獨對했던 정치인은 단연 車智澈 의원이었다. 이는 朴鐘圭 경호실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호실장이 면담을 주선해주지 않으면 그렇게 잦은 獨對는 이뤄질 수 없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한 달 전 공수단의 車대위를 포섭하여 金鍾泌씨에게 선을 보인 다음 朴正熙 소장 앞으로 데려간 사람이 바로 朴鐘圭 소령이었다. 5월16일 서울시청 앞에서 찍힌 유명한 사진에서 朴소장 양쪽에 호위로 서 있는 두 사람 또한 朴鐘圭와 車智澈이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수부대 훈련도 함께 받았다. 朴실장은 車의원을 동생처럼 좋아했다. 물론 朴대통령의 車의원에 대한 신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했을 것이다. 朴실장은 친한 사람들에겐 “車의원이 나의 후임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車의원은 당시 好評을 받는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공수부대 장교출신답지 않게 신중하고 공부를 많이 하며 청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호실장이 되면서 그의 인격의 일부로 나타나는 오만방자함도 보이지 않을 때였다. 朴鍾圭 경호실장도 후임으로 車의원을 추천했을 가능성이 높다.
朴대통령은 車실장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金日成 정권이 지령한 朴대통령 살해는 실패했으나 陸여사 피살로써 반쪽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車 실장은 과잉경호를 했다. 朴 대통령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였다. 심지어 김재규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도 제한하였다. 朴 대통령은 대중과 멀어졌다.
정작 본인은 결정적 시기에서 경호의 원칙을 어겨 경호대상인 朴 대통령도 本人도 죽었다. 1979년 10월26일 밤 정보부가 관리하던 궁정동 식당으로 대통령을 모시고 가면서 그는 권총을 차고 가지 않았다. 김재규의 총을 맞은 그는 실내 화장실로 달아났다. 가슴 관통상을 당한 朴 대통령을 버려두고.
이 행사 뒤에 駐韓외국사절단의 부인회에서 陸여사에게 과도한 경호조치라고 항의했다. 陸여사는 朴대통령에게 이를 전했고, 朴鐘圭 경호실장은 혼이 났다. 朴실장은 경호과장에 대해 정직처분을 내렸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부터 朴실장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라도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과잉 검문 검색을 하지 않도록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그해 8월15일 文世光은 국립극장에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경호원의 검문을 피했다. 陸여사가 자신의 죽음에 스스로 영향을 끼친 셈이다.
文世光은 1974년 8월15일 오전 7시 조선호텔에서 프론트로 전화를 걸었다.
'국립극장에 가야 하는데 오전 8시까지 승용차를 대기시켜주세요. 출발은 오전 9시입니다'
文은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여 바지 허리춤에 숨기고 오전 8시40분에 M-20 포드 승용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는 車中에서 운전기사에게 '국립극장에 도착하면 내려서 문을 열어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1만원권을 주었다. 文은 또 왼쪽 옆구리에 숨겨둔 권총으로 손을 넣어 총의 공이치기를 머리 위로 올려놓았다.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결정적 실수가 된다.
정각 9시 文世光을 태운 승용차는 국립극장 정문에서 검문을 받지 않고 들어가 극장 계단 아래에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리더니 뒷문을 정중하게 열어주었다. 중절모를 쓴 文世光은 기사가 공손히 절을 하는 가운데 계단을 올라갔다. 文은 왼쪽 현관을 통해 극장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검문하지 않았다.
당시 현관에는 대통령 선발 경호원이 3명, 경찰관이 8명 근무중이었다. 文은 비표도 없이 통과했다. 중절모를 쓰고 으시대는 文의 모습을 본 경호원들은 고위인사라고 생각하여 통과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그 뒤 조사에서 '3.1절 행사 때 외국인에 대한 경호를 너무 심하게 했다고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그날엔 소극적으로 대했다'고 변명했다.
극장안으로 들어온 文은 1층과 2층 로비를 오고가면서 저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는 통로에 카핏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는 朴대통령이 지나갈 때 저격하려고 카핏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장시간 같은 장소에 머물다가는 경호원의 검문을 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10여명이 권총을 차고 로비를 오가고 있었다. 文은 로비 경호원에게 먼저 다가가서는 '우시로쿠 일본대사와 스즈키씨를 기다리는데 혹시 오지 않았느냐'고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극장 로비는 여기 뿐인가요'
'2층에도 있습니다'
경호원은 文을 2층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文은 '아,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었지'하면서 1층으로 되돌아왔다. 경호원은 다른 간부 경호원에게 文을 인계했다. 경호원은 '저 분은 일본대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을 것이다. 인계받은 경호원은 文을 보고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나타났다. 경호원은 文을 잡고는 기둥 뒤에 있으라고 했다. 文은 朴대통령이 입장하는 것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약 10분 더 로비에서 머물렀다.
文은 다시 로비 근무자에게 다가가서 일본어로 '대통령의 얼굴을 한번 보고싶은데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근무자는 文의 입장을 묵인하는 표정을 지었다. 文이 로비에서 극장안으로 들어가려니 출입구 근무자가 비표를 달지 않은 그를 제지했다. 文은 로비 근무자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들어가도 좋다고 이야기했다'고 둘러대었다. 출입구 근무자가 로비 근무자를 바라보니 그는 무표정이었다. 출입구 근무자는 이를 들여보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극장안으로 들어온 文을 안내하여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자리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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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英修 여사 피살 사건 5일 뒤인 1974년 8월20일 朴대통령은 정상집무에 들어갔다. 이날 金鍾泌 국무총리는 오전 오후 두 차례 대통령을 만나 陸여사 서거 후의 國政방향에 대해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金총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吳定根 국세청장을 추천했다. 朴대통령도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吳定根은 5.16 군사혁명 때 출동한 해병여단의 병력을 이끈 대대장 출신(당시 중령)이었다. 가장 먼저 한강다리를 넘은 해병대 병력의 선두 지휘관이었다.
이날 오후 2시55분에서 3시20분 사이 朴대통령의 사위 韓丙起 대사가 청와대로 들어왔다. 韓대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車智澈 공화당 국회의원을 추천했다. 이날 오후 4시33분부터 5시20분 사이 朴대통령은 車의원을 불러 요담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車의원을 경호실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통보했다. 물론 車의원은 충성을 맹세했다.
8월21일 오후 2-3시 사이 朴鐘圭 실장이 대통령에게 離任인사를 하고 신임 車 실장이 취임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임무교대가 되었다. 朴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랫동안 모실 인물이 陸여사에서 車실장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10.26 사건을 예약한 인물교체였다.
누가 車실장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하고 왜 대통령이 그를 발탁했는가를 놓고 말들이 많지만 모든 결정은 朴대통령의 몫이다. 기자가 입수한 朴대통령 재임기간중의 면담일지를 읽어보니 車의원을 경호실장으로 발탁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陸여사 피살 이전에도 朴대통령이 가장 자주 獨對했던 정치인은 단연 車智澈 의원이었다. 이는 朴鐘圭 경호실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호실장이 면담을 주선해주지 않으면 그렇게 잦은 獨對는 이뤄질 수 없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한 달 전 공수단의 車대위를 포섭하여 金鍾泌씨에게 선을 보인 다음 朴正熙 소장 앞으로 데려간 사람이 바로 朴鐘圭 소령이었다. 5월16일 서울시청 앞에서 찍힌 유명한 사진에서 朴소장 양쪽에 호위로 서 있는 두 사람 또한 朴鐘圭와 車智澈이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수부대 훈련도 함께 받았다. 朴실장은 車의원을 동생처럼 좋아했다. 물론 朴대통령의 車의원에 대한 신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했을 것이다. 朴실장은 친한 사람들에겐 “車의원이 나의 후임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車의원은 당시 好評을 받는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공수부대 장교출신답지 않게 신중하고 공부를 많이 하며 청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호실장이 되면서 그의 인격의 일부로 나타나는 오만방자함도 보이지 않을 때였다. 朴鍾圭 경호실장도 후임으로 車의원을 추천했을 가능성이 높다.
朴대통령은 車실장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金日成 정권이 지령한 朴대통령 살해는 실패했으나 陸여사 피살로써 반쪽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車 실장은 과잉경호를 했다. 朴 대통령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였다. 심지어 김재규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도 제한하였다. 朴 대통령은 대중과 멀어졌다.
정작 본인은 결정적 시기에서 경호의 원칙을 어겨 경호대상인 朴 대통령도 本人도 죽었다. 1979년 10월26일 밤 정보부가 관리하던 궁정동 식당으로 대통령을 모시고 가면서 그는 권총을 차고 가지 않았다. 김재규의 총을 맞은 그는 실내 화장실로 달아났다. 가슴 관통상을 당한 朴 대통령을 버려두고.
[ 2013-11-17, 21:46 ] |
민주당과 문재인에게 속는 사람이 더 나쁘다
조갑제닷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敵의 말을 믿는 자는 3族을 멸해야 한다'고 했다. 敵에게 지는 것보다 敵을 믿는 게 더 위험하다. 자발적 간첩이 되기 때문이다. 상습거짓말쟁이들인 민주당, 親盧, 문재인, 통진당의 말을 믿는 것은 무슨 죄가 될까?
첫번째 속을 때는 속인 사람이 나쁘다. 두번째 속을 때는 쌍방이 다 나쁘다. 세번째 속을 때는 속는 사람이 더 나쁘다.
처음 거짓말은 논리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두번째 거짓말엔 욕설을 퍼부어야 한다. 세번째 거짓말은 조롱으로 대한다.
첫번째 속을 때는 속인 사람이 나쁘다. 두번째 속을 때는 쌍방이 다 나쁘다. 세번째 속을 때는 속는 사람이 더 나쁘다.
처음 거짓말은 논리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두번째 거짓말엔 욕설을 퍼부어야 한다. 세번째 거짓말은 조롱으로 대한다.
[ 2013-11-17, 21:11 ] |
오늘의 선동賞
조갑제닷컴
오늘의 선동賞:
<"박근혜 정부는 '만사제통(萬事弟通)' 인사"라는 말이 나온 軍 인사 장군의 아들들이 유난히 많은
육사 '로열 기수' 살펴 보니>(조선닷컴 머리 기사 제목)
[ 2013-11-17, 18:01 ]
김정일은 '양측이 다 포기하자'고 세 번 말하고 노무현은 '예, 좋습니다'라고 화답
살인범이 "000를 죽이자"고 세 번 제의하였을 때 "안됩니다"라고 하지 않고 "예, 좋습니다"라고 했다면 共犯이 되는 것이다.
趙甲濟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을 읽고도 盧 당시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는 데 합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國語 실력을 의심하든지, 양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래 대화록을 읽어보면 김정일은 세 번에 걸쳐, 남북한 양쪽이, 우리가 지켜온 NLL과 자신들이 우리 海域에 멋대로 그은 경계선을 다 포기하자고 한다. 이 제의에 대하여 노무현은 "예 좋습니다"라고 말한다. 살인범이 "000를 죽이자"고 세 번 제의하였을 때 "안됩니다"라고 하지 않고 "예, 좋습니다"라고 했다면 共犯이 되는 것이다. 확정된 명백한 진실을 논란거리로 삼는 나라는 地動說을 논란거리로 삼은 中世 암흑기를 살고 있는 셈이다. ,,,,,,,,,,,,,,,,,,,,,,,,,,,,,,,,,,,,,,,,,,,,,,,,,,,,,,,,,,,,,,,,,,,,,,,, 김정일: 이승만 대통령 시대 51년도에 북방한계선 있지 않습니까? 그때 원래 선긋는 38선을 위주로 해가지구… 그거 역사적 그건데, 그걸 다 양측이 포기하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하는 첫 단계 기초단계로서 서해를 남측에서 구상하고 또 우리가 동조하는 경우에는 제 일차적으로 서해 북방 군사분계선 경계선을 雙方(쌍방)이 다 포기하는 법률적인 이런 거 하면 군대는 해상에서 다 철수하고 그담에 경찰이 하자고 하는 경찰 순시대… 노무현 대통령: 평화협력체제, 앞으로 평화협력지대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를 해야 합니다. 김정일: 그거 해야 합니다. 노무현: 헌법문제라고 자꾸 나오고 있는데 헌법문제 절대 아닙니다. 얼마든지 내가 맞서 나갈 수 있습니다. 아주 내가 가장 핵심적으로 가장 큰 목표로 삼았던 문제를 지금 위원장께서 승인해주시는 거죠. 김정일: 평화지대로 하는 건 반대 없습니다. 난 반대 없고. 그래 바다문제까지 포함해서 그카면 이제 實務(실무)적인 협상에 들어가서는 쌍방이 다 법을 포기한다, 과거에 정해져 있는 것, 그것은 그때 가서 할 문제이고 그러나 이 구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발표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 예 좋습니다. 실제로 한강하구에 골재 채취문제도 다 포함된 것입니다. 이 양측의 골재량이 전체적으로 약 28억 불 정도가 되는데, 이 골재를 치우면 임진강 수위가 1m 낮아질 수 있기 때문에 水防(수방)효과로 굉장히 좋은 효과가 있고 또 뭐 운반선이 왔다 갔다 하고… 전체를 서해 평화협력지대로 선포하고, 그 안에 공동어로구역 만들고, 북쪽에 생태평화공원까지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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