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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오전 대전 국방과학연구소(ADD)를 방문해 국방과학기술을 통한
창조경제 창출 방안을 점검했다. ‘국방의 초석’으로 불리는 국방과학연구소의 창설 배경과 그동안의 연구성과 등을 살펴본다.
국방과학연구소를 둘러보면 의외로 기념비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정문부터 시작되는 비탈길을 올라 각 건물로 갈라지는 곳과 충무관으로 불리는 연구동 앞에 각각의 기념비가 눈에 띈다. 모양은 다르지만 두 기념비의 공통점은 음각된 글귀가 같다는 점이다. 바로 ‘국방의 초석(國防의 礎石)’이라고 쓰인 것이다.
기념비처럼, 현재도 국방과학연구소의 전 연구기술진의 마음에 신념처럼 새겨진 이 문구는 무기체계 개발과 관련 기술의 연구개발을 통해 국방력 강화와 자주국방 완수에 기여하기 위해 연구소 설립을 지시한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1976년 연구소에 하사한 휘호다.
풀네임보다 줄임말 ‘국과연’이나 영문 약자 ADD로 자주 불리는 국방과학연구소는 70년 8월 6일 창설됐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주한미군 감축 등 어려운 안보상황에 직면해 있던 60년대 말 자주국방태세를 확립하는 데 기초가 될 무기체계 연구개발 기관으로서 ADD의 설립은 당시 국민적 여망과 시대적 요청을 담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고 박 대통령의 확고한 안보관,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신념이 바탕이 됐다.
ADD 연구원을 지내다 원자력연구소장을 역임했던 한필순 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경제 또한 어려웠던 그 시기에 ADD 창설에는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보내오는 자금이 투입됐다고 한다. 고 박 대통령은 72년부터 78년까지 공식적으로 ADD를 12번이나 방문했다. 국방과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음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만큼 극히 완수하기 어려웠던 ‘특명’이 존재했다. 이 특명을 ADD는 완수했다.
그 첫 번째가 71년 11월에 내려진 이른바 번개사업으로 불리는 ‘긴급병기개발’ 지시다. 이에 따라 ADD는 소총 등 7개 품목에 대해 역설계 등의 과정을 거쳐 제작해 이듬해 4월 3일 고 박 대통령 참관 아래 시험사격을 했다.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번개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ADD는 국산 무기체계 개발에 대한 자신감을 공고히 하고 70년대를 통해 연구소의 기능을 확대하며 성장했다. 이 기간에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 ‘백곰’ 개발이 꼽힌다. 155㎜ 견인포 KH-179도 이 시기에 개발됐다.
그러나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연구인력의 3분의 1이 연구소를 떠나는 구조조정과 선진 각국의 기술보호정책 강화 등 안팎의 시련을 겪다 83년 아웅산 사건 이후 무기체계 연구개발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 시기에는 소형잠수함 돌고래 진수(1983), 지대지 미사일 ‘현무’ 시사회(1985) 등이 대표적인데 이후 80년 후반부터 연구소의 기능이 재정립되고 재성장하게 된다.
이에 따라 90년대를 도약기로 이루게 된다. 매년 국정감사를 받게 됨에 따라 연구소의 역할과 기능이 공개되기 시작하는 가운데 단거리 대공유도무기 천마, 중어뢰 백상어, 대한민국 최초의 실용항공기 KT-1 기본훈련기, 세계 최정상급의 자주포 K-9, 전방감시용 열상장비 등을 개발했다.
2000년대는 고도화 기간으로 볼 수 있다. 안동만 박사가 연구소원 출신으로 최초로 연구소장에 임명되는 등 연구소가 혁신의 길을 걷게 된다. K2 전차, K21 전투장갑차, 장거리 대잠미사일 홍상어 등 세계시장에서 빠지지 않는 정상급 성능의 무기체계를 잇달아 개발했다. 특히 K11로 명명된 복합형 소총을 세계 최초로 개발함으로써 미래 국방과학기술을 선도할 수 있는 역량과 가능성을 제시했다.
ADD는 무기체계를 국내 개발하면서 민간 기술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화포를 개발하면서 익힌 총포신 가공기술은 70년대 재봉틀 제작에 머물렀던 기술 수준을 1000분의 1㎜라는 정밀가공기술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군용차량 표준화는 국내 자동차 관련 산업의 기반 구축에 크게 영향을 줬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정보기술 산업의 총아로써 90년대 휴대전화에 적용된 CDMA 기술은 주파수 도약방식의 군용 차기 FM 무전기 개발에 힘입어 민간에서 자신감 있게 끌어들인 기술이었다.
수출 면에서 2000년~2006년까지 평균 방산수출 규모는 2억2600만 달러 수준이었으나 ADD의 개발 첨단 무기체계의 수출 성과로 인해 2008년 10억3100만 달러, 2009년 11억6600만 달러 어치를 수출할 수 있었다.
ADD는 지난해 연구소장 백홍열 박사를 중심으로 연구개발에 매진한 결과 국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유도탄 사업, 중고도 무인기 탐색개발 사업 등 142개 핵심기술개발과 22개의 체계개발 사업을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ADD는 무엇보다 향후 더 중요한 전략비닉무기, 북한의 비대칭 전력에 대한 맞춤식 무기, 그리고 이에 필요한 창조적인 핵심기술 개발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를 통해 창설 초기부터 마음에 새겨온 국방의 초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국가 안전보장에 기여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백홍열 연구소장과 함께 중고도 무인기(MUAV) 등 ADD가 연구개발한 주요 무기체계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1976년 대통령 영애의 신분으로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해 연구 현황을 살피고 있다. 출처=‘국방의 초석 40년’
국방과학연구소를 둘러보면 의외로 기념비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정문부터 시작되는 비탈길을 올라 각 건물로 갈라지는 곳과 충무관으로 불리는 연구동 앞에 각각의 기념비가 눈에 띈다. 모양은 다르지만 두 기념비의 공통점은 음각된 글귀가 같다는 점이다. 바로 ‘국방의 초석(國防의 礎石)’이라고 쓰인 것이다.
기념비처럼, 현재도 국방과학연구소의 전 연구기술진의 마음에 신념처럼 새겨진 이 문구는 무기체계 개발과 관련 기술의 연구개발을 통해 국방력 강화와 자주국방 완수에 기여하기 위해 연구소 설립을 지시한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1976년 연구소에 하사한 휘호다.
풀네임보다 줄임말 ‘국과연’이나 영문 약자 ADD로 자주 불리는 국방과학연구소는 70년 8월 6일 창설됐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주한미군 감축 등 어려운 안보상황에 직면해 있던 60년대 말 자주국방태세를 확립하는 데 기초가 될 무기체계 연구개발 기관으로서 ADD의 설립은 당시 국민적 여망과 시대적 요청을 담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고 박 대통령의 확고한 안보관,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신념이 바탕이 됐다.
ADD 연구원을 지내다 원자력연구소장을 역임했던 한필순 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경제 또한 어려웠던 그 시기에 ADD 창설에는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보내오는 자금이 투입됐다고 한다. 고 박 대통령은 72년부터 78년까지 공식적으로 ADD를 12번이나 방문했다. 국방과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음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만큼 극히 완수하기 어려웠던 ‘특명’이 존재했다. 이 특명을 ADD는 완수했다.
그 첫 번째가 71년 11월에 내려진 이른바 번개사업으로 불리는 ‘긴급병기개발’ 지시다. 이에 따라 ADD는 소총 등 7개 품목에 대해 역설계 등의 과정을 거쳐 제작해 이듬해 4월 3일 고 박 대통령 참관 아래 시험사격을 했다.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번개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ADD는 국산 무기체계 개발에 대한 자신감을 공고히 하고 70년대를 통해 연구소의 기능을 확대하며 성장했다. 이 기간에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 ‘백곰’ 개발이 꼽힌다. 155㎜ 견인포 KH-179도 이 시기에 개발됐다.
그러나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연구인력의 3분의 1이 연구소를 떠나는 구조조정과 선진 각국의 기술보호정책 강화 등 안팎의 시련을 겪다 83년 아웅산 사건 이후 무기체계 연구개발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 시기에는 소형잠수함 돌고래 진수(1983), 지대지 미사일 ‘현무’ 시사회(1985) 등이 대표적인데 이후 80년 후반부터 연구소의 기능이 재정립되고 재성장하게 된다.
이에 따라 90년대를 도약기로 이루게 된다. 매년 국정감사를 받게 됨에 따라 연구소의 역할과 기능이 공개되기 시작하는 가운데 단거리 대공유도무기 천마, 중어뢰 백상어, 대한민국 최초의 실용항공기 KT-1 기본훈련기, 세계 최정상급의 자주포 K-9, 전방감시용 열상장비 등을 개발했다.
2000년대는 고도화 기간으로 볼 수 있다. 안동만 박사가 연구소원 출신으로 최초로 연구소장에 임명되는 등 연구소가 혁신의 길을 걷게 된다. K2 전차, K21 전투장갑차, 장거리 대잠미사일 홍상어 등 세계시장에서 빠지지 않는 정상급 성능의 무기체계를 잇달아 개발했다. 특히 K11로 명명된 복합형 소총을 세계 최초로 개발함으로써 미래 국방과학기술을 선도할 수 있는 역량과 가능성을 제시했다.
ADD는 무기체계를 국내 개발하면서 민간 기술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화포를 개발하면서 익힌 총포신 가공기술은 70년대 재봉틀 제작에 머물렀던 기술 수준을 1000분의 1㎜라는 정밀가공기술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군용차량 표준화는 국내 자동차 관련 산업의 기반 구축에 크게 영향을 줬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정보기술 산업의 총아로써 90년대 휴대전화에 적용된 CDMA 기술은 주파수 도약방식의 군용 차기 FM 무전기 개발에 힘입어 민간에서 자신감 있게 끌어들인 기술이었다.
수출 면에서 2000년~2006년까지 평균 방산수출 규모는 2억2600만 달러 수준이었으나 ADD의 개발 첨단 무기체계의 수출 성과로 인해 2008년 10억3100만 달러, 2009년 11억6600만 달러 어치를 수출할 수 있었다.
ADD는 지난해 연구소장 백홍열 박사를 중심으로 연구개발에 매진한 결과 국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유도탄 사업, 중고도 무인기 탐색개발 사업 등 142개 핵심기술개발과 22개의 체계개발 사업을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ADD는 무엇보다 향후 더 중요한 전략비닉무기, 북한의 비대칭 전력에 대한 맞춤식 무기, 그리고 이에 필요한 창조적인 핵심기술 개발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를 통해 창설 초기부터 마음에 새겨온 국방의 초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국가 안전보장에 기여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2013-05-23 10: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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