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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28일 서울 중앙청 앞에 나타난 북한군 T-34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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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자 6.25전쟁과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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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주년 특집 · 6.25 전쟁의 진실 |
지금도 진행 중인 ‘6 · 25 전쟁’
“기억은 끝나도 기록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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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왼쪽)와 그의 아들 존 소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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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톨랜드의 6·25전쟁… 관련 인물의 이야기 담아내 한국전쟁 입체적으로 재구성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눈부신 전과 올린 부대 소개 젊은 세대 눈높이에 맞춰
미국의 대표적인 전쟁 다큐멘터리 작가 존 톨랜드(1912~2004)는 "6 · 25전쟁 당시에 다른 (미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미국인들처럼 3년에 걸친 그 지루한 전쟁을 애써 외면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의 흥망과 태평양전쟁을 다룬 'The Rising Sun'으로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던 그는 왜 80세를 바라보던 1991년에 '혐오스럽고 지루한' 전쟁을 다시 들여다보기로 한 것일까?
그것은 6 · 25전쟁을 보는 시각의 변화 때문이다. 공산권 붕괴를 지켜보며 톨랜드는 그 원동력이 6·25전쟁이라는 뒤늦은 자각을 했다고 털어놓는다. "비록 미국 국민에게는 인기 없는 전쟁이었지만, 6·25전쟁은 미국이 더 많은 번영을 구가할 수 있도록 국민경제에 큰 활력소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경제적·군사적 힘이 남아 돌만큼 국력이 신장됨으로써 어떠한 국제분쟁도 미국의 관여 없이는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6 · 25전쟁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책은 이런 거창한 분석틀보다는 6·25전쟁과 관련된 인물들의 고심과 결단 그리고 오판이 한데 어우러지는 드라마처럼 전개된다. 때로는 반나절 동안 미국과 한국, 북한과 소련 · 중국의 지도부 깊숙한 곳에서 이루어진 논쟁과 결정이 한 장(章)을 이루기도 하고, 일주일, 열흘, 한 달, 반년이 한 장을 이루기도 하면서 시간 순서에 따라 6 · 25전쟁 3년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책이 나온 지 이미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1991년 당시 입수 가능했던 중국과 소련의 비밀자료 및 관련인사들의 인터뷰까지 방대하게 자료를 수집해 지금의 시점에서 보아도 크게 낡아 보이지 않는다. 맥아더·트루먼·아이젠하워로 이어지는 미국의 전쟁지도자들에 대해서도 특정 성향은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그들의 전략적 성패를 그려낸다. 그는 워커와 리지웨이 장군의 전속 조종사였던 마이크 린치 장군의 말을 빌려 6 · 25전쟁에서 미국이 저지른 잘못을 이렇게 요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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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왼쪽)와 이승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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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우리는 적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얄궂게도 휴전협상이 시작될 무렵부터 우리는 적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우리의 능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타협이 불필요한 사항들까지도 타협했다."
이런 평가는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그리고 이승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들도 상황의 한복판에서 전략적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용감한 애국자이자 비타협적인 반공주의자인 동시에 성마른 독재자" 라고 평한다. 김일성에 대해서는 "일부 미국인들이 묘사한 그의 모습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촌뜨기였지만 그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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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화이(왼쪽)와 김일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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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에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이 참전해 1950년 11월 25일 평양폭격 때 사망한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졌다. 그러나 책은 전쟁 후반 미국 대통령이 되어 종전 과정을 책임지게 된 아이젠하워의 아들, 워커 장군의 아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장군의 아들도 6 · 25전쟁에 장교로 참여했던 사실을 전한다.
미국인 입장에서 바라본 6 · 25전쟁에 대한 균형잡힌 저술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직도 6 · 25전쟁에 대해서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류의 수정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학계의 저술능력에 대한 반성이고, 또 하나는 전쟁 기간 동안 한국과 미국, 북한과 중 · 소 (中蘇)가 주고받은 협력과 갈등에 대한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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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왼쪽)과 아들 마오안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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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25전쟁이 관련국들에 남긴 유산에 대한 평가는 특히 눈길을 끈다. 미국의 번영은 앞서 언급했다. 또 다른 큰 수혜자는 소련이었다. "미국과 중국 본토의 화해 가능성이 6 · 25전쟁으로 사라졌다는 것이 소련이 얻은 가장 큰 성과였다." 전쟁이 끝나자 김일성은 평양에서 대규모 환영대회를 열어 자축했지만, 이승만은 통일된 자유대한의 꿈이 날아가 버린 데 크게 실망했다. 대만의 장제스도 운이 좋았다. 중공의 대만 점령 계획이 6 · 25 전쟁 참전으로 수포가 됐기 때문이다.
민간군사저술가 남도현씨의 '끝나지 않은 전쟁 6 · 25' 는 6 · 25전쟁 중에서 주목해야 할 대규모 전투들을 중심으로 6 · 25전쟁의 단면을 소개한다. 전쟁 초기 거둔 춘천 대첩 같은 승전의 역사뿐 아니라 미군의 자만심이 빚어낸 죽미령전투 등 패전의 기억도 파헤친다. 또 북한의 선봉부대 제6사단이나 국군 제1사단처럼 눈부신 전과를 올린 부대 이야기도 흥미롭다. 우리 군의 전사 (戰史)를 중심으로 해서 지나치게 군 (軍)의 시각이 강조됐고, 전쟁 전반을 살필 수 있는 시야가 부족한 것은 아쉽다. 그러나 딱딱하게 전쟁을 소개하는 책들에 비하면 젊은 세대들의 눈높이에 맞춘 이야기들이라 널리 읽힐 수 있는 강점이 있다.
기억으로서의 6 · 25전쟁은 점차 끝나가고 있다. 6 · 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올해는 어쩌면 기록으로서 6 · 25전쟁의 원년(元年)이 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톨랜드가 책을 맺으면서 한 말이다. "전쟁의 역사에 관한 책은 그 어떤 것도 결정판이 될 수 없다."
※ 존 톨랜드의 6·25전쟁(존 톨랜드 지음) /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남도현 지음)
“한국전은 오판 때문.. 맥아더는 마마보이”
“핼버스탬 44년간 집필 ’콜디스트 윈터’ 출간”
미군의 베트남 주둔에 의문을 제기한 보도로 1964년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1963년 한국전에 참전했던 군인들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이 ‘잊힌 전쟁’ 을 책으로 엮어내기로 했다. 그는 이후 시중에 나와있는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보병 수백 명을 인터뷰한 끝에 2007년 봄 책을 완성했다. 그러나 퇴고 후 닷새 만에 그는 또 다른 취재를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핼버스탬의 유작 ’콜디스트 윈터’(원제 The Coldest Winter)는 73세의 나이에도 취재를 나서다 숨진 한 저널리스트의 44년간 집념이 담긴 책이다. 책은 1950년 10월 20일 미군 제1기병사단의 평양 입성과 5일 후 벌어졌던 중공군과의 첫 교전, 그리고 연이은 패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와 함께 1950년 8월 낙동강방어선전투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등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전쟁의 비극적인 순간을 전한다. 무엇보다 참전 용사 수백 명과의 인터뷰는 전투 속 병사 개개인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거대한 역사에 가려 눈에 띄지 않았던 병사들은 저자의 저널리즘적 서술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저자는 한국전쟁이 오판에서 벌어진 전쟁이라고 설명한다.
첫 번째 오판자는 소련이었고 원인제공자는 미국이었다. 1950년 1월12일 워싱턴에서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일명 ’애치슨 선언’ 을 발표했고 소련은 이를 한반도에서 어떤 무력도발이 있더라도 미국은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두 번째 오판자는 김일성이었다. 1950년 4월 소련의 전쟁 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박헌영은 이때 ’북조선에서 첫 신호’ 를 보내면 남조선 인민들이 집단적 으로 봉기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결국 그(김일성)는 자신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그에 반해 이승만은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리고 남조선 인민들이 얼마나 그의 침공을 손꼽아 기다리는지를 터무니없이 부풀리며 남침을 부채질한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셈” 이라고 비판한다.
미국도 오판했다. 그들은 한국전쟁 초반 미 육군의 전투력을 과대평가했다. 그 결과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왔을 때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주요 군(軍) 사령부 요원들과 정부 고위 관료들, 미군들 대부분은 현재 육군의 상태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그들을 막아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 저자는 거듭된 오판들의 배경을 살피고자 주요 인물들의 성격 분석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맥아더를 ’마마보이’ 로 평가한 점이 눈에 띈다. 1918년 별을 단 이후 수십 년을 장군으로 지내온 그는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맥아더 본부에서는 맥아더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상대방은 듣기만 하는 것이 비공식적인 규칙이었을 정도로 그는 ’듣는 법’ 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자기 과신에 찬 인물이었다.
이런 성격은 한국전 판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중국(中共)을 지나치게 얕잡아봤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중국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중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며 머릿속에 있는 중국의 모습은 마오쩌둥 이전의 19세기 중국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는 1950년 12월 말 중공군의 본격적 공격을 앞둔 시점에서도 중공군의 총지휘관이 누구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이런 그의 뒤에는 어머니 펑키 맥아더가 있었다. 자신의 야망과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아들의 경력관리에 몰두했다. 심지어 아들이 육군사관학교에 다녔던 4년 동안 근처 호텔에서 머물면서 아들을 지켜볼 정도였다. 저자는 이를 두고 맥아더가 “역사상 그 어떤 인물보다도 마마보이였다” 고 평가한다.
맥아더의 오판에는 그의 눈과 귀를 막은 참모들도 한몫했다. 참모들은 맥아더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저질렀고 그의 예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요소들은 최소화하기에 바빴다. 특히 정보 참모였던 찰스 윌로비는 의도적으로 미리 손을 본 정보들만 맥아더에게 전달했다. 1950년 10월 말이 되자 한반도 최북단에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졌지만, 그는 중공군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소규모 지원군일 뿐이라고 무시했으며 그 결과는 압록강 근처에서 처절한 패배로 이어졌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전투는 물론, 당시 주변국들의 정세와 주요 인물들까지 치밀하게 퍼즐을 짜맞추던 이야기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폴 맥기라는 퇴역군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옳은 일이었다고 확신했다. 본인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고 지평리 전투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겪긴 했지만 한 번도 참전 자체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 후 5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중략) 다들 그곳에서 모진 고생을 하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인민군이 두 번 다시 남한을 넘보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정당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중략) 맥기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 꽤 잘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누군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참전하는 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1천13-1천15쪽)
※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 정윤미ㆍ이은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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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합니다.
1. 파리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
파리 세느강 마레다리 근처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기념비
2. 호주캔버라 Korean War Memorial, Canberra
한국전쟁 가평전투에 참가한 호주군인들
3. 캐나다 Wall of Remembrance(Brampton, Ontario, *- 한국전쟁기념비 -*
4. 워싱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링컨기념관 인근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의 기념 조형물은 미국 성조기를 향해서 우비를 입은 한 소대가 전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각상 양쪽으로 서 있는 벽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2, 500명의 얼굴들이 레이저로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 150만 명이 참전하여 5만 4000명이 사망하고 11만 명이 잡히거나 부상당했으며, 8, 000명이 실종되었다.
가운데 게양되어 있는 성조기! 아래에는 "조국은 그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조국의 부름에 응한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라고 적혀 있다.
5. 맨하탄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는 장소가 뉴욕 맨하탄의 최남단 배터리 파크 내에 있다. 배터리 파크 내에는 수많은 기념물과 기념탑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이 군인 형상의 구멍 뚫린 조각물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 (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다.
6. 미국 Connecticut (컨네티컷) West Haven의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7. 미국 Atlantic City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8. 미국 Staten Island에 위치한 Korean War Veterans Parkway
9. 보스톤의 한국전쟁기념비
☞ Korean War Veterans of Massachusetts, Charlestown Navy Yard
10.남아공의 케이프타운 한국 전쟁 참전 기념비
11.터키 한국전쟁 참전기념탑
한국전쟁 참전 토이기(터키)기념탑에 있는 참전 희생자 명단 터키 수도 앙카라 한국 공원에 있는 높이 9m의 4층짜리 ‘한국전쟁 참전토이기(터키)기념탑’ 서울-앙카라 자매결연을 계기로 1973년 11월, 1년여간 시공을 거쳐 세워진 탑이다.
12.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촌(한국마을)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유엔군의 일원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에티오피아군은 화천, 금화, 양구, 철원 등 강원도의 최전방지역에서 공산침략군과 싸웠다. 한국전 참전 16개국 중 유일하게 포로가 없을 정도로 에티오피아군은 가장 용맹스러운 군대였다고 한다.
춘천시는 국가보훈처의 후원으로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아픈쵸베르 공원에 참전용사회관과 기념탑을 건립했다.
국내 6.25 참전 기념비
1. 유엔군 참전기념비(경기 오산시)는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시 유엔군의 일원 으로 1950년 7월 5일 미군 제 24사단 소속 제21보병부대 및 제 52 야포대대 소속 1개 중대로 편성된 스미스 전투부대 406명의 장병이 북한과의 최초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1955년 7월 5일 미군 제 24단과 장병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2. UN 묘지 (부산 남구 대연동 779번지 일대)
남구 대연동 779번지 일대의 면적 144, 146㎡로 유엔(UN) 묘지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도발에 의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16개국의 전투지원국과 5개국의 의료지원국의 유엔군 장병의 전사한 영령을 안치한 곳이다. 1951년 1월 18일에 묘지를 조성 설치하고, 1955년 11월 15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에서 오직 하나 뿐인 유엔 관리의 묘지로, 1959년 유엔과 우리정부 사이에 묘지의 영구적인 관리 및 사용을 위한 협정이 성립되었으며, 1974년에는 관리권이 영령을 안치한 참전국 11개국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기념관리위원회에 이관되었다.
현재 이곳에 안치된 영령은 영국 884, 터어키 462, 캐나다 378, 오스트레일리아 281, 네델란드 117, 프랑스 44, 뉴우질랜드 34, 미국 19, 남아프리카공화국 11, 노르웨이 1, 한국 36, 무명용사 4, 비전투원 11기로서 총 2, 282기가 안치되어 있다.
처음 이곳에 묘지가 설치될 때 묘의 수는 미국 등 16개국 11, 000기 이었으나 이디오피아, 태국, 그리이스,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등 5개국 전몰장병 묘를 이곳에서 본국으로 이장해 갔기 때문에 현재의 기수(基數)로 줄었다.
▲ 묘역내 기념관 내부
3.유엔군 참전기념비. 높이 12.05m, 16개의 기둥으로 탑신을 이루고, 기둥의 중간부분에 각국 의 특색을 살린 군인상을 청동으로 조각해 붙였으며, 기둥끝에 각국의 국기를 게양토록 했다. 세계유일의 유엔군 묘지인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건립된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APEC정상회의 참석차 부산을 찾은 뉴질랜드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 을 가졌다.
한국전쟁 유엔군 자격 참전국 현황
한국전쟁 참전군은 UN과 중공군 모두 합해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부상자들과 그 가족까지 합하면 몇 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한국전쟁 으로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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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
내용 |
북한군의 남침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웅진반도에서 시작된 전쟁은 곧 38선을 연하여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북한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한군을 격파하며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다. |
유엔군 참전 |
미국은 6월 26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하였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회원국들에 대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조치를 추후승인하기에 이르렀다. |
인천상륙작전 |
한달여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게되자 연합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15일 서울에 진입하게 된다. 서울을 완전히 회복한 뒤에는 38도선을 지나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
중공군의 개입 |
유엔군의 공세가 가속화되자 중공군이 개입하게 되어 전세는 다시 역전이 되고 장기화활 조짐이 나타났다. |
1.4후퇴 |
중공군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군은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하였다. 이때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
정전제의와 휴전회담 |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유엔연설을 통해 1951년 6월 23일 휴전을 제의하였다. 종전을 원하던 중공과 북한은 휴전을 지지의사를 표명하였고, 미국도 긍정적인 입장을 밝힘으로써 7월 개성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되었다. 이후 정전협상이 체결될때까지 38선 부근에서는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
판문점 접촉 |
유엔군사령관은 양측전선 중간지점에서 회담을 가질 것을 제의하면서 판문점이 새로운 회담장소로 결정되었다. 미국의 실질적인 의도는 적을 유엔군 관할지상에 끌어들임으로써 발언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으나 이것은 개성을 잃게 된 원인이 되었다. |
휴전협정 서명 (1953.7.27) |
전쟁 당사자인 한국을 제외하고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공군은 전문과 5조 60항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이로써 3년 1개월 동안 지리하게 이어졌던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태로 남과 북이 대치되어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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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한국 전쟁 참전 21개국 (전투 16 + 의료 5)
-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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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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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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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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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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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프리카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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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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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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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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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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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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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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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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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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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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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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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료지원단 5개국 :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탈리아-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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