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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신년특집] 이승만 배짱에… 美, 정전 열흘후 조약 조인/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3. 1. 1. 18:08

[2013 신년특집] 이승만 배짱에… 美, 정전 열흘후 조약 조인

  • 전현석 기자

     

  • 입력 : 2013.01.01 03:00

    '한미조약' 긴박했던 그날…

    2003년 서울 용산 미8군 연병장에서 열린 한·미 상호방위조약 50주년 기념식.
    정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됐지만, 협상은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됐다. 당시 전황은 이미 현재의 휴전선과 유사한 고정된 전선(戰線)을 따라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6·25전쟁이 북진(北進)통일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전쟁 기간 내내 주장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52년 12월 방한한 당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과 두 차례 회담을 갖고 북진통일과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주장했다.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유엔군의 참전을 줄이고 미국민과 의회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며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 전 대통령은 북진과 조약 체결 모두 어렵게 될 조짐이 보이자,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2만5000명을 직권으로 전격 석방했다. 이에 대해 미측은 이 전 대통령 제거 계획까지 검토할 정도로 격앙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대통령의 '벼랑 끝 전술'로 인해 미국은 결국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동의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제159차 본회의가 열린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식장에 유엔군 수석 대표인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한군 대표인 남일 대장이 입장했다. 이들은 악수와 인사 없이 국어와 영어, 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의 정전협정 문서 정본 9통, 부본 9통에 서명했다. 2년여간 협상이 진행된 정전협정의 서명식은 12분 만에 끝났다. 약 열흘 뒤인 8월 8일 한·미는 서울에서 상호방위조약을 가(假)조인했으며, 10월 1일 워싱턴에서 공식 조인했다. 한·미는 이날을 동맹일로 정해 기념해 오고 있다.

    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국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으며, 이승만 정부는 국가안보를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 한·미는 방위조약 후속조치로 1954년 군사 및 경제 원조에 관한 합의의사록을 교환했다. 이 의사록을 통해 우리 정부는 7억달러 규모의 군사·경제 원조를 받게 됐으며, 미국은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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