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새벽종소리] 2012년9월21일 QT - 고난으로부터 배우는 교훈 (도서/사진/말씀)

鶴山 徐 仁 2012. 9. 26. 16:02



고난으로부터 배우는 교훈


신자가 겪는 어떤 고난도 하나님의 전반적인 주권적 계획 속에 있음을 깨닫는 것은 그것 자체로 위로를 얻게 된다. 그러나 진리의 편에서, 신자의 삶에서의 지적 지식은 경험적 지식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지적 지식은 진리대로 사는 가운데 어떻게 반응할지를 알기 전에는 아무 가치가 없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신 근본적 이유 중 하나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타당성이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함이다.
-존 맥아더의 [고난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중에서-

우리는 고난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때 위로와 소망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발견하지 못할 때 깜깜한 밤길을 걷는 것처럼 더 많은 어려움을 호소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광야
끝없이 느껴지는 광야.
걸어도 걸어도 달려도 달려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 막막함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장소였음을 고백합니다
글쓴이 : 왕충은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수료
2002년 ~ 2010년 몽골국제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2004년 이후 우우링슈드르쵸글랑(새벽이슬교회) 개척
처녀에게 - 욥 31:1-8
1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
3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
4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5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6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7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8 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출이 뿌리째 뽑히기를 바라노라
욥이 자신의 삶의 은밀한 부분까지 샅샅이 뒤져 하나님 앞에서 재고조사를 한 것처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꼭 필요합니다. 나는 과연 순결한가? 내 마음은 부정한 것들을 단호히 거부하는가? 음욕을 품고 다른 여자나 남자를 바라보지는 않는가? 욥처럼 배우자에 대한 정직한 사랑으로 가정생활에 헌신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맡기신 모든 가정사와 가족들에 대해 신실한 사명자로서의 자기소임을 다하고 있는가?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1절).

분깃, 기업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2절).
우리 주변에는 육체의 정욕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 두 가지 치명적인 암초에 걸려 난파 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욥은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 간음, 즉 어떤 처녀에게도 몹쓸 짓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여자에 대해서도 음욕을 품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욥의 조강지처는 결코 지혜롭거나 덕이 남다르거나 믿음이 깊은 여인이 아니었으나 그는 첩이나 정부를 두지 않았고 침소를 귀하게 여기며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아내로 두고 사랑하며 한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이 명령하신 질서였습니다. 욥은 결혼 제도와 관련한 하나님의 이 명령을 충실히 지켰고, 그 명령을 깨뜨린다는 생각 자체를 깊이 혐오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부정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그 어떤 분깃이나 기업도 없다는 신념에 투철했습니다.

환난, 불행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3절).
어리석은 자는 죄를 우습게 여깁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죄란 젊은 한 때의 실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죄를 아무리 가볍게 여긴다 해도 그로 인해 그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임하므로 결코 환난과 불행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우선 자신에 대해 음란한 눈길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은 더러움이 들고 나는 통로이므로 마음을 청결하게 지키고자 하는 자들은 자신의 눈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정을 통하는 눈>(사 3:16)과 <음심이 가득한 눈>(벧후 2:14)을 경계하며, 사람의 최초의 범죄도 바로 눈에서 시작됐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창 3:6). 은혜와 축복이 아니라 환난과 불행이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내가 어찌 불결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처녀를 주목하랴>고 한 욥처럼 자기 관리에 더욱 근신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내 길, 내 걸음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4절).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부정은 결코 숨길 수 없다는 것, 나의 행위나 생각이 아무리 은밀하다해도 폐부를 감찰하고 계신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는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요셉은 유혹을 받았을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하며 뿌리쳤습니다. 욥 역시도 죄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가 내 길을 살피시고, 내 걸음을 세고 계시다>며 자신을 지켰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시 139:1-4).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