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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공동체
당신의 생각이 옳았고 그 사람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바뀔 수 있는 기회를 주라. 그 다음에 그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게 하라. 만약 그가 변한다면 그것은 팀을 위한 승리다. -존 맥스웰의 [팀워크를 혁신하는 17가지 불변의 법칙] 중에서-
우리가 모여 있는 공동체는 팀웍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족한 자를 향하여 일으켜 세우고 권면하며 함께 걸아 가는 공동체입니다. 변화되어야 할 기대치나 방향을 설명해주고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함께 천국을 향하여 걸어가는 공동체입니다. 누구든 신앙 때문에 변하여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가능성으로 팀원을 바라보고 세워주는 것 또한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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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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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 |
먼 바다를 돌고 돌아, 하루의 노동을 끝마치고 이제 항구에 닻을 내렸다 이제 그 단단한 기둥에 몸을 꼭 매었다. 항구는 쉼, 항구는 안식, 항구는 안정감. 나도 주님께 매여있을 테다. 주님은 쉼, 주님은 안식, 주님은 나의 안정감. 주님은 나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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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은직 스튜디오 올봄, 디자인 피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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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인해 기뻐하였도다 - 욥 20:11-17 |
11 그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12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13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14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15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16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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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다시 과거 자신의 선행과 구제와 적선을 얘기합니다. 남의 높임과 존경뿐 아니라 자신이 남에게 베푼 자선을 고백하며 현실의 고통과 시련을 안타까워 합니다. 자신의 이력을 회고하며 지금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 회의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우리로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지난 세월 나의 선한 삶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시련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빈민과 고아를 건졌다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12절). 가난한 자들이 모진 상처를 입거나 억압을 당해 욥에게 와서 호소할 때 욥이 그들의 탄원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당하게 짓밟히거나 유린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는 <빈궁한 자의 아버지>(16절)였습니다. 욥의 이런 삶은 그대로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구제와 자선>, 힘없고 가난한 자들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야 말로 이 시대 교회들에게도 여전히 소중하고 막급한 대사회적 책무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마 5:13-14)고 하신 것도 바로 그런 의미의 말씀이었습니다.
맹인의 눈이 되고 저는 자의 발이 되었다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15절). 사회적 약자들인 장애인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다는 회고입니다. <맹인의 눈, 저는 자의 발>이 되었다는 진술은 그들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고 그들이 가장 절실하게 여기는 부분에 도움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욥은 정말 자신의 고백처럼 <의를 옷으로 삼고, 정의를 겉옷과 모자>(14절) 같이 여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요즘 우리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이런 욥의 모범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가 과거 우리 사회에 미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기여와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비난과 비판에 직면한 것은 이런 기독교 본연의 대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탓입니다.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자성하고 결단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었다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17절). 과격한 표현이지만 정의와 공의를 위해 그만큼 역동적으로 살아왔음을 원색적으로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욥은 평소 약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송사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그야말로 불의한 자들의 턱뼈를 부술 만큼 강력한 방어력을 동원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지켜왔습니다.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냈다>는 것은 약탈당한 재산을 악착같이 되찾아 그 피해자에게 돌려줬다는 뜻입니다. 정말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1:1)답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이 사탄에게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고 자랑하실 만 한 의인 아닙니까? 그런데도 욥은 처절한 고난을 당했고, 참혹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욥의 친구들의 단정처럼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 연단과 축복이었습니다. 부디 욥을 생각하시며 지금 겪고 계시는 시련을 잘 감당하시고 보란 듯이 이기셔서 결국은 욥처럼 갑절의 축복을 누리게 되시길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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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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