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새벽종소리] 2012년04월21일 QT - 힘이 최고라는 유혹 (도서/사진/말씀)

鶴山 徐 仁 2012. 4. 23. 00:46



집으로 돌아가라


새로운 시작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출발점과 목적지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토미 테니의 [돌이킴] 중에서-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떠나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 머물러 있던 하나님 품에 더 오랜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 누려야 합니다. 신앙은 아버지의 품 안에 더욱 친밀하게 안기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빌닷의 비유 -욥 8:8-15
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

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11.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세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12.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 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듣는 행위를 가리키지 않고 상대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보다 적극적인 경험을 뜻합니다. 빌닷은 상처 입은 사람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는 아주 부정적인 예를 대표합니다. 상대방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며 진솔한 언어로 그를 격려해야 함에도 도리어 정죄하기에 급급해 위로자는커녕 욥을 더욱 힘들게 하는 가시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왕골과 갈대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11절).
왕골이나 갈대는 진펄이나 물에서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위선자의 어떤 거짓이나 부패한 행동들도 우연이 아니라 반드시 그 환경과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토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골이나 갈대는 잠시 푸르고 좋아 보이지만 가볍고 속이 비어있어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화문석과 같은 돗자리를 만들었으나 요즘은 그나마도 거의 수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이같이 무너진다>(13절)고 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욥의 <길>과 <희망>이 왕골과 갈대에 비유되면서 결국은 그가 위선자요 저속한 자여서 그렇게 왕골과 갈대의 운명처럼 무너지고 말라버렸다는 것입니다. 잠언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12:18)고 했습니다. 말 속에는 말하는 사람의 삶과 신앙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성숙한 인격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의 삶, 특히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만 일방적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부디 자신의 말과 생각에 대해 좀 더 책임적이고 신중하길 바랍니다.

거미와 거미줄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14절).
거미줄은 결국 걷히고 끊어집니다. 거미가 제 아무리 튼튼한 거미줄을 친다한들 그게 얼마나 견고하겠으며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그런데 위선자와 저속한 자의 운명, 희망 또한 그렇게 허무할 뿐이라며 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빌닷은 지금 착하고 진실한 사람은 잘 되고, 악하고 저속한 자는 망한다는 철저한 이분법적 잣대로 욥을 단죄하고 있습니다. 네가 굳이 잘못한 게 없다면 이 고난은 금방 끝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회개해야 할 죄가 많다는 논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은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고, 또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겪고 불행 당한 사람들을 대할 때 그의 아픔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섣불리 규정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보다 깊이 깨닫고 더욱 충실히 하나님의 이끄심을 감당할 수 있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며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나무와 뿌리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16절).
지금 한창 연두빛 잎을 내밀며 화사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벚나무들을 보십시오. 흙이 주는 자양분을 마음껏 빨아들이고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다투어 눈부신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벚나무는 갈대와 왕골처럼 진펄이나 물이 아니라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기에 더없이 든든해 보이지만 그러나 여름철 강력한 태풍이 닥치면 가지가 찢기거나 부러질 수도 있고, 뿌리째 뽑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빌닷의 편견과 완고함은 차라리 선두주자였던 엘리바스보다도 더 강고합니다. 욥이야말로 지금까지는 그 어떤 경우에도 부러지거나 뽑힐 것 같지 않던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린>(17절) 나무 같아 보였지만 이제 이렇게 뿌리째 뽑힌 걸 보니 그도 역시<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요 <저속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욥이 교만하고 무모하여 끝까지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므로써 이렇게 그의 인생이 뿌리째 뽑히고 꺾이는 최후를 맞게됐다는 극단한 해석입니다. 빌닷의 이런 과격한 말들을 듣고 있자니 <입 속의 부드러운 혀가 도끼보다 더 무섭다>는 옛말이 절로 생각납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힘이 최고라는 유혹


미래의 크리스천 리더십은 사랑 대신에 힘을, 십자가 대신에 지배력을 이용하여, 인도받기보다는 인도하려는 유혹을 끝까지 이겨내어 참 소망을 주는 데 있다. 힘이 최고라고 믿는 유혹을 이기려면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꺼이 이끌려갈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유성준의 [세이비어교회] 중에서-

현대는 힘을 중요시 합니다. 사람들은 힘을 가지려고 합니다. 거기에 바로 다른 사람을 이끌고 가려는 자기 욕심이 숨어 있습니다. 자기의 힘을 과시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힘이 아니라 수치와 조롱이었으며, 자신을 다 내어놓는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빌닷의 확신 - 욥 8:20-22
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기본적으로 빌닷은 욥이 지금 범죄하여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고 있다고 규정했던 엘리바스의 입장에 깊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빌닷의 문제였습니다. 말은 많이 하고 또 그럴 듯 했지만 그 내용과 논리의 요지는 전체 문맥 속에서 대단히 신중하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절반의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진리가 아닌 것은 거짓일 뿐입니다. 당신도 당신의 친구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당신에게 하는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깊이 살피며 냉정하게 판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 주변에 마음의 지혜를 얘기하는 친구들을 둬야 당신 인생이 복되다는 사실도 꼭 기억해 둘 일입니다.

너를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20절).
빌닷은 여기서 삶과 죽음, 복과 저주를 욥 앞에 제시하며 그가 순전한 의인이라면 곧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고, 악한 죄인이라면 완전히 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주장은 옳습니다. 악한 자를 심판하신다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이분법적 도식이 모든 경우에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 또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의인도 얼마든지 고난을 당할 수 있고, 죄인도 얼마든지 형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23:17).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 24:1). 그 사람의 최후 운명이 어떠하냐가 중요하지 현실 속에서는 징계와 연단그리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 얼마든지 이럴 수도 혹은 저럴 수도 있음을 간과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언제나 경직된 어떤 율법이나 법칙이 아니라 역동적인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을 결정할 뿐입니다.

너를 기쁘게 하실 것이라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21절).
빌닷이 지금 자신의 충고와 조언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욥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베풀 것이라고 합니다. 빌닷은 확실히 극단하며 선언적입니다. 흑백논리에 강합니다. 자주 양단간에 선택을 강요하고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지지하고 따르면 살고 외면하거나 부정하면 죽는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자기의 말을 지지하면 웃음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빌닷은 상처 입은 사람의 가슴에 계속 못을 박는 행위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련 중에 처한 사람을 대할 때 당신이 상대의 입장이나 말을 지배하려들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가 말하게 하고 당신은 그 내용에 충실히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훌륭한 친구요 진정한 상담자입니다. 빌닷처럼 상대방의 말을 무리하게 끊거나 함부로 끼어들지 말고 상대가 자신의 고통과 아픔과 생각을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십시오. 당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 그의 말을 방해하는 것은 그에게 오히려 더 큰 좌절감을 안겨 줄 수 있습니다.

너를 지켜 주실 것이다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나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22절).
거듭 얘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맞습니다. 의인을 이유 없이 핍박하고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고, 또 그런 악인들의 장막은 어디에도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그들이 처할 최후 운명이 영원히 불행하다는 뜻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은 지금 하나님에 의해 의인의 고난을 당하고 있는 만큼 빌닷이 말하는 악인의 장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욥이야말로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시 84:10)고 할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을 가지십시오. 욥이 이렇게 빌닷의 공격에 시달리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욥을 이렇게 격려하고 계셨을 겁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할 것이라>(사 43:1-2).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