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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정희의 독도, 김일성의 백두산

鶴山 徐 仁 2011. 12. 21. 17:37


박정희의 독도, 김일성의 백두산

 

● 박정희의 독도

 

 

박정희는 일본으로 하여금 독도를 포기하게 만든 게 사실이다.

지난달 말 한·일 기본조약(한·일협정) 조인 46주년에 즈음한 심포지엄이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나는 한·일협정 속의 독도문제와 문화재 반환문제에 대해 발표한 후 토론을 벌였다. 특히 한·일협정을 마무리하는 ‘분쟁해결을 위한 교환공문’ 작성 과정에서 일본은 사실상 독도영유권을 포기했다는 경위를 설명했다.

 

    예를 들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독도문제를 한·일회담의 의제에서 제외하라”고 도쿄에 있던 이동원 외무부 장관에게 지시하면서 “본건은 한국 정부의 안정과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이므로 만약에 한국 측이 수락할 만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한·일회담을 중지해도 좋다”고까지 훈령을 내린 사실 등을 발표했다.

 한국 정부의 이런 단호한 방침에 일본 정부가 양보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하겠다는 안을 거두어들였고, 독도 명칭을 교환공문에서 삭제했으며, 한국 측이 제시한 구속력이 없는 ‘조정’으로 분쟁을 해결한다는 내용의 최종안이 마련되었다. 내 발표문의 취지는 박정희 정권이 독도문제만큼은 처리를 잘했고 이 협상 과정에서 일본이 사실상 독도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심포지엄 내용을 보도한 어느 인터넷신문이 내 발표문을 크게 왜곡해서 보도했다. 박정희 정권이 독도문제를 심하게 망가뜨렸다는 취지로 내 발표문을 소개한 것이다.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발표문과는 완전히 반대인 내용을 사실인 양 써서 보도했다. 이처럼 심한 왜곡은 그동안 내 의견에 악성 댓글을 썼던 일본인들도 하지 않은 처사였다. 오히려 일본인들 몇%는 내 독도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내에서 자신들의 취지나 노선에 맞지 않는다 해서 주제발표자의 발표내용을 심하게 왜곡해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다니 기가 막혔다. 더구나 이번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지도급 인사들이다.

 한·일협정 협상 당시 독도문제가 한국 측 잘못이라는 왜곡된 결론을 내면, 국제법상 독도의 위치가 위태롭게 된다. 그런 중대한 상황으로 확대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왜곡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은 나라를 망하게 할 가능성을 내포한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이 짧은 것이다. ‘나’라는 한 개인이 화가 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곡해서 쓴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 개인이 사회에서 신뢰를 잃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로지 자신들의 주장이 부정당하는 것이 두려울 뿐인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의 관건은 바로 ‘박정희’였다. 아마도 ‘박정희’가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 독도문제에서 박정희가 뭔가 잘했다는 주장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1965년도의 환경 속에서 박정희는 일본으로 하여금 독도를 포기하게 만든 게 사실이다. ‘박정희’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진실은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신념을 관철시키고 싶다. 나는 한 정치가를 두둔한 것이 아니며 있는 그대로를 판단해서 알렸고 내 신념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일본학 / 박정희의 독도, 김일성의 백두산 >

 

한일협정이 물밑에서 논의되던 시기 일본은 한명의 특사를 박정희에게 보낸다.
고토 마사유키...일본육사의 박정희선배이며 일본정계와 재계를 연결하던
최고의 우익로비스트이자 다혈질적인 기질로
스스로를 쇼와시대 최고의 사무라이라고 자칭하던 자이다.
거한의 체구와 특유의 거친 말투.
그리고 매서운 눈빛으로 어떤 상대도 협박하여 설득시키고야 마는 사람이였다.

고토의 임무는 단 한가지였다.
731부대에서 기인하는 미도리제약회사의 신기술을 이전하는 댓가로 독도를 뺏아오는것. 이 고토를 보냄으로써 독도문제는 해결됐다고 보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정계에 팽배해졌다.

고토는 술을 먹으면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하였다.
"/ 죠센진토 이우 모노와 곤죠가 타리나이."./ 조선놈들이라고 하는것들은 근성이 없어.

이런 고토가 드디어 박정희와 독대하게 되었다.

먼저 포문을 연것은 고토였다.
".. 장군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는 별로 없소..아마 조용한 생도였는 모양이군요.

,, 당신이 나에대한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오늘 내가 여기에서 당신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요..
본론을 이야기 하시요.. "

.. 역시 듣던대로 시군요.
아뭍든 장군.바보같은 놈들이 다케시마같은 하잖은 문제로
우리의 발목을 붙잡을려고 하오 .
조국을 부흥시킬려면 무엇보다 의약관계의 최신기술이 필요할것이요.
내일당장 신문을 이용해 선전하시요
일본의 최신기술을 이전박기로 했고 공장도 지을거라고 말이요..
그러면 민심을 쉽게 잡을수 있을것이요..
그리고 다케시마같은 것은 바보같은 놈들에게 고기나 잡으라고 주어버립시다."

",, 이봐 당신 , 나는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한 사람이요.나에게 명령하는것이요.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내 조국과 함께 하기로 결심한사람이요.
그것이 독도이던 돌한덩이던 내 조국의 것이라면 나는 목숨을 걸고 지킬것이요.
군인인 내가 조국에 할수있는것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것외에 무엇이 있겠소."

순간 박정희의 기세에 이 거한의 고토는 기가 질리고 만다.
수많은 야쿠자들.수많은 정치깡패들을 상대하면서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두려움을
고토는 이 작고 깡마른 체구의 사나이에게서 받은것이다.

..장군 흥분하지 마시요 장군의 조국에 대한 충정은 나도 이해를 하오 하지만
작은것을 보느라고 큰것을 보지 못한 다면 그것도 장군답지 못한것 아니요 대의를 보시요
자칫하면 모든것이 물거품이 될수도 있소.

,,이봐 당신 아까부터 자꾸 나에게 훈계를 할려고 하는데
그 태도를 나는 용서하지 못하겠소.
당신도 사나이라면 나와 술한잔 하며 사나이답게 이야기를 합시다.
서로 술이 취해 싸움이 된다면 덜맞은 자의 말을 따르기로 하면 될것아니겟소
어차피 당신은 나와 싸우기 위해서 온사람아니요..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고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와 부하들에게 가장 즐거운일이 무엇인지 아시요..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난 덕분에 우리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요. 사나이로서 이 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있겠소.

 

선생.돌아가서 전하시요
다들 목숨을걸고 조국을 부흥시켜 일본못지않는 나라를 한번 만들어 볼려고 하는데
계집애같이 앵앵거리지 말자고 말이요.. "

이 말을 들은 고토는 웃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말았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면전에서 자신에게 계집애처럼 앵앵거리지 마라고 말하는 박정희의
눈빛에서 사나이의 진짜 미학을 찾았다는 유쾌함과 비장함이었다고 한다.

동경으로 돌아온 고토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이.. 장군은 조국을 위해서 죽기로 했다고 말했소 ..
당신들 면상을 보아하니 어느 누구도 죽을 각오를 하고 다케시마를 찾을 수는 없겠서 .
돌아가서 마누라엉덩이 이나 두드리던지 아님 긴자의 네상들이나 안고 한잔하자고...

해산 ..해산...

박정희가 암살되던 날..아카사카의 한국술집에서 술을 먹고있던 고토는 술에 취해
다음과 같이 부르짓었다고 한다.

빠가야로 ,,조센진토 이우 야쓰라와 쇼가나인다나..
지분의 오야붕을 고로시테 도우 스룬다요..오야지토 잇쇼쟈나이가요...
아...다노시미가 낫구낫데 시맛다요..
메오사멧다 조센토라가 고노 고미타라케노 사루도모오 미코토니 깃데 후쿠슈스루...
고레가 밋다갓다요..
빠가야로..사이고노 사무라이가 신다요..신지맛다요...

병,신들...조선놈이라고 하는것들은 어쩔수가 없구나..
자신들의 두목을 죽여버리면 어쩌냔 말이야..아버지와 같은것이잖아...
아...즐거움이 없어지고 말았구나..
눈을 뜬 조선호랑이가 이런 쓰레기같은 원숭이들을 훌륭하게 단 칼에 베어 복수하는...
이것이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병,신들...마지막 사무라이가 죽었단다..죽고말았단다.

놀라운 수출과 경제발전으로 일본과 경쟁하였으며
핵으로 힘을 가질려고 했던 박정희의 꿈은
마지막사무라이가 죽고말았다는 고토의 울부짓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사랑하던 손녀를 교통사고로 잃은 충격으로 자살한 고토가
마지막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박정희가 써준 우국충정이라는 친필휘호가 든 수석이었다고 한다.

金日成의 백두산 

 



간도협약으로 간도지방은 분실되었지만 백두산은 틀림없는 우리민족의 영토였다.
하지만 남침했다 혼이난 김일성을 도와준 중공은
1950년말에 이르러 참전대가로 백두산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57년 주은래는 참전댓가로 백두산 영토 250킬로미터를 중국에 지불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58년 천문봉에 기상대를 설치하고 60년에는
백두산전역을 장백산자연보호구로 지정한다.
이것에 북한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주은래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독대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의 국경수비대원들과 일부 조선주민들의 불법월경으로 긴장상태가 조성되어
양국간에 시비가 벌어진다면 이것은 옳지 못한니 조치를 취해주시요. "
이말에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동무들이 원한다면 우리는 평양도 나누어 가질수 있소.
양국간에 존재하는것은 영원한 혁명적 동지애 뿐이며
남조선에서 미제가 물러나는날 우리는 진정 하나가 될수도 있소. "

그리고 68년 12월부터 69년 3월까지 중국측은 전 백두산지역에서
북한의 국경수비대와 일반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가하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결국 김일성은 북위 42도선을 경계로 백두산을 중국에 할양할것을 승인하고
"조중우호보다도 중요한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이 심지어 조선의 영토이던 바다이던 피로 나눈 혁명적동지애로 맺어진
조중우의보다 위에 설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로써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양분되고 말았다.

 

 < 필자 : 호시카 교수 / 세종대 교수 일본학 >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여정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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