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정식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은 정문·정전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문묘란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한다.
문묘는 크게 제사를 위한 건물들이 있는 대성전 구역과
학문을 갈고 닦는 건물들이 있는 명륜당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정종 2년(1400)에 불에 타 없어졌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도 임진왜란 때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성전 서우(보물 제141호) 북쪽에는 제사 때 쓰는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잡다한 것을 두는 잡사가 있다
영조의 생모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1882)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원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줄여서 원단이라고도 한다.
세조 2년(1456)에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원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원구제는 중단되었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에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부터이다.
현재 원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 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원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史跡 171호 서울종로 고종즉위 40년칭경 기념비
고종(재위 1863∼1907)이 왕이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고종 27년(1890)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이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과 지하2층만이 남아있었으나,
1973년에 복구되었다. 한쪽에 탑을 세웠으며, 정문은 개선문 양식이다.
일본군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세자와 함께 피신하여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적인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고종이 거처했던 방의 내부는 건물과 같은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을 했다.
현재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어 이곳에서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는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으며,
궁궐과 운현궁 사이의 왕래를 쉽게 하기 위해 직통문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 이강(1877∼1955) 공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안뜰은 영벽지와 폭포가 있으며 바깥뜰은 송석과 연못이 있는 지역이다.
서쪽 아래 지역에 고여한 늪이 있고, 북쪽에는 물길을 파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더하여 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것이다.
명동성당은 코스트(Coste) 신부가 설계하였고
파리선교회의 재정지원을 얻어 건립되었다.
본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으로,
블랑주교가 김 가밀로라는 한국인 명의로 사들였다.
그후 1887년 한국과 프랑스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1898년 완성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로 쌓은 교회이며, 순수한 고딕식 구조로 지어졌다.
평면은 십자형이며 본당의 높이는 23m, 탑의 높이는 45m이다.
고딕양식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면서 그대로 본떴고,
공간의 고딕적 느낌은 외부보다 내부에서 더 강하게 주어졌다.
고종 광무 2년(1898)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신교 교회건물이다
본래는 십자형으로 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1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史跡 276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UnderwoodHall)
지금의 연세대학교, 옛 연희전문학교의 건물로 학관(學館)이라 불러왔다.
1921년 짓기 시작해 1924년 완성된 돌로 지은 4층 건물로서
아펜젤러관과 함께 연세대학교에 두 번째로 세워졌다.
연희전문학교의 창설자인 언더우드(한국이름 원두우) 박사의
업적과 인격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그의 형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지은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의 장남인 원한경 교수가 초석을 놓았고
당시 화학과 교수인 밀러가 공사를 감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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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인 1931년에 준공된 옛 경성제국대학의 본관으로,
1945년 이후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서울대학교가 1972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문화예술진흥원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경성제국대학은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이상재 선생을 대표로 한
조선민립대학 기성회가 결성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경성제국대학령을 공포하고 예과(豫科)를
모집하여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개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대한제국 순종 융희 2년(1908)에 건립된 이 건물은 본래 기계시험소가
있던 터에다 1906년 공업전습소가 생김에 따라 그 본관으로 지은 것이다.
광복 후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이 되었고,
지금은 한국방송통신대학 본부로 쓰이고 있다.
2층의 목조건물로 벽은 독일식 비늘판을 붙였으며 외형은
르네상스 양식을 모방했으며
구한말 탁지부가 설계한 몇 안되는 현존건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본 건물은 1910년대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건물이다.
일본의 제일은행 경성지점이었으나
옛 조선은행이 설립되기까지 중앙은행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행 본관이 되었다.
지하1층 지상3층의 철골 콘크리트 구조로 외벽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붙였다.
일본사람이 설계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내부가 불에 타서 1956년에 보수하였다.
그 후 1987년 신관을 건물의 뒤쪽에 건립하고
이 건물은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르네상스시대 성 건축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정교하고 우아한 건물이다.
1923년 10월에 준공한 2층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에 불에 탄 옛 본관의 왼쪽에 지어 서관과 쌍을 이루고 있다.
건물구조는 T자형으로 서관과 동일하며 1920년대의
순수 민간인이 세운 사립학교 건물로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건물이다.
우리나라 20세기 전기 건축양식의 기념비적 건물이다.
또한 3·1운동 이후 조선 소년군 창설,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1922∼192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재가 혼합된
벽돌식 역 건물이다.
1층은 르네상스 궁전건축 기법으로 처리하고,
1층 윗부분과 2층은 붉은 벽돌로 쌓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장식하여 마감하였다.
현재 이 건물은 여객전용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 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경영을 맡았던 김성수가
1933년 공사를 시작하여 1934년에 완성한 본관건물로 박동진이 설계하였다.
3층(중앙탑은 6층)이며 화강석을 주재료로 한 좌우대칭의 고딕양식으로 되어 있다.
건축 당시에는 내·외부가 호화스럽고 웅장하여,
국내의 학교 건축물로서는 유례가 없는 훌륭한 것이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도서관 건물이다.
193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에 완성한 5층 건물로
설계는 본관을 설계한 박동진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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