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부터인가 숭의전을 한번 가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수 십년은 된 듯하다.
그러나 교통이 워낙 나빠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국토의 최북단인 연천에서도 서쪽으로 한 3,4십리가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승용차가 없는 나는 뻐스나 전철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 교통편을 알아보니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의문은 언제나
<고려의 창설자 왕건을 비롯한 가장 두드러인 4왕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왜 이 연천 골짜기에 세웠을까> 였다.
조선은 종묘를 세워 제왕들과 공신들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그렇다면 고려왕국은 적어도 개성이나 그 주변에 제왕들의 사당을
지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의문이었다.
어제 나는 이 의문을 풀 기회를 얻었다. 지인이 차를 제공하겠다고 하여 숭의전까지 같이 동행하기로 하였다.
추석 연휴 끝이라 시간적인 여유가 있은데다가 가을날씨가 맑아 고적지를 돌아보기는 안성맞춤이었다.
연천군에는 읍이 두 개 있는데, 군의 초입에 있는 것이 전곡이고 한 50리 북상하면 연천읍이 있다.
지금 남한의 국토로서 연천을 생각하면 국토의 최북단이지만, 한반도 전체를 놓고 보면 연천군은 정중앙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울에 살기 때문에 한강이 가장 가까운 강이지만, 고려왕국으로 봐서는 임진강이 수도를 흐르는 강이었다.
바로 이 임진강이 연천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개성과 연결된다.
당시 수로가 발달되었던 고려왕조에서는 임진강을 따라 수로가 굉장히 발달하였고, 왕건은 철원에 도읍하였던 궁예의 부하였고, 그가 개성과 철원 사이를 흐르고 있는 임진강을 따라 왕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연천은 바로 이 임진강 강변의 천혜의 단애 위에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으 숭의전 터는 왕건이 배를 타고 개성과 철원을 오가면서 치성을 드렸던 즉 원찰이었던 앙암사의 터였다.
기아하게도 숭의전을 지은 사람은 고려의 제왕이 아니라, 바로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자신의 역성 무력혁명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렸으나, 그 자신 고려의 신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망한 전 왕조에 알 수 없는 보은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7왕을 모셨으나, 조선 문종 때, 조선의 종묘에는 5왕이l 모셔져 있는데 숭의전에는 7왕이 모셔진 것은 안된다 하여, 다시 4왕으로 줄였다. 그리고 공신전에는 16명의 공신이 모셔져 있다.
개국공신 신숭겸을 비롯하여, 서희, 윤관, 김취려, 강감찬, 김방경, 정몽주 등 낯익은 인물들이 모셔져 있었다. 60년간 정권을 탈취하였던 무인정권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전주 이씨 정권은 정권을 잡자말자 철저하게 왕씨를 괘멸시켰다. 보이는 족 족 적당한 이유를 붙여 잡아 죽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장님 이흥무의 옥사 사건>이다. 이 사건을 만든 사람은 조선의 개국공신 박위였다. 박위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대마도 정벌 등 큰 공을 세웠으며, 이성계의 행동대장 역을 한 자였다. 최영을 몰아내고,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고 하는데 결정직인 역할을 한 자이다. 이 사람이, 부하장수를 장님점쟁이 이흥무에게 보내, 고려조에서 누가 가장 하늘의 점제를 받아 기운이 융성하겠는가 하고 묻게 했다. 그랬더니 이 점쟁이가 당시 고려의 뛰어난 무장으로서 정권 탈취의 기운이 농후했던 이 성계를 제치고 우 왕의 두 아들을 지명하였다. 이 사건이 알려져 왕씨의 씨를 말리는 대학살로 이어졌다.
조선조 문종이 숭의전을 보수하고, 그것을 지키고 제사지낼 왕씨를 찾았으나 전국에 어디에도 왕씨 성를 가진 자가 없었다. 겨우 충청도 공주에 성씨를 <제>씨로 바꾸고 숨어사는 자를 찾아내 그를 종 3품으로 올려 숭의전에서 제사를 받들게 했다.
연천은 서북쪽에서 임진강이 흘러내리고, 동쪽에서는 한탄강이 흘러내려 연천 읍내 한복판에서 합수하고, 동북쪽에서는 아미천과 차탄천이 흘러내려 역시 연천읍내에서 합수한다.
특히 합수한 임진강의 북쪽 사면이 천혜의 단애가 많아, 숭의전과 고구려의 대남 국경 초소였던 고구려당포성 등 군사 요새가 많다.
찾아간 나그네의 발길 밑에서는 지금도 푸른 임진강이 흐르고 있었다. 인적이 끊어진 숭의전 아래에는 너무나 높고 가파른 단애가 있고 그 아래로 임진강의 푸른 물결이 흐르고 있어서 흘러간 세월의 쓰라림을 되새겨 주었다. 그 임진강 물결에 배를 띄우고 개성과 철원을 오갔을 왕건의 모습이 아련히 떠올라 보였다. 5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라는 시조를 쓴 고려 3은의 한 사람인 야은 길제의 시조가 생각났다.
특기할 사항은 왕건의 청동조상이 그의 무덤에서 발굴되었는데, 처음에 그것은 불상으로 알려졌었다. 일본학자가 아무래도 그가 쓰고 있는 관이 부처의 관이 아니고 왕관같다 하여 이의를 제기하여 정밀 조사한 결과 그것은 왕건의 조상으로 확인되었다. 남서의 그부분까지 완벽하게 조가되어 있어서 천으로 가려놓았다. 우리나라 5000 년 역사에서 자신의 전신을 그림으로서가 아니라, 조각으로 남긴 유일한 왕이 왕건이라고 한다. 사진이 흐려서 미안하다.
고려의 명신인 목은 이색의 영당이 연천에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찾지를 못해 방문을 포기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숭의전, 이제서야 가보고 나니,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듯 알 수 없는 비애의 감정이 흘러 들었다. 고려 5백년 사직이 찰나처럼 여겨지는데, 가냘픈 나의 일생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내 마음을 휩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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