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릉 벌초 현장 가보니
지난 7일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으로 수학여행을 온 서울 계상초등학교 아이들은 뜻밖의 '장관(壯觀)'을 만났다. 추석을 목전에 두고 무열왕릉이 벌초를 시작한 날. 일반 무덤과 달리 왕릉을 벌초하는 방식이 이채로운 데다, 경주 토박이라고 해도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 추석을 앞둔 지난 7일 오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무열왕릉에서 인부들이 예초기를 이용해 벌초를 하고 있다. 무열왕릉은 신라 29대 왕인 김춘추의 능이다. /남강호 기자
무열왕릉뿐 아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경주 시내에 있는 왕릉 35기(문무왕릉 제외), 고분 114기는 일제히 벌초작업에 들어간다. 첨성대, 무열왕릉, 대능원, 안압지, 불국사, 오릉 등 모두 6개 지구로 나뉘어 실시된다. 이날도 무열왕릉을 비롯해 박혁거세의 무덤인 오릉, 첨성대지구의 석탈해릉에서 동시에 벌초가 시작됐다.
벌초에 드는 인력은 80여명. 대상 면적이 96만8000㎡(29만여평)라 예초기도 30여대 투입된다. 높이 22.6m, 남북 길이 120m, 동서 지름이 80m로 규모가 가장 큰 대능원 황남대총은 예초기 3대를 동원해 5~6명의 인부가 꼬박 이틀을 매달려야 한다. "산 하나 갖다놓은 것만 하니까요. 한 바퀴 도는 데 15분이 걸리니 기계가 두세 대 올라가도 하루에 다 못 깎지요." 왕릉 벌초 경력 15년의 베테랑 인부 배종도(66)씨의 얘기. 대능원 고분들은 아직 풀이 덜 자라 추석 지나고 나서 벌초에 들어갈 예정이다.
경주 왕릉과 고분의 벌초는 1년에 세 차례 진행된다. 5월과 8월 그리고 추석이 지난 무렵에 무덤의 형편에 따라 시행한다. 웬만한 고분 1기의 풀을 깎는 데 평균 5명의 인부가 투입된다. 예초기를 잡는 남자 인부 1명과 여성들로 구성된 보조 인부 3~4명. 무덤의 풀만 깎는 게 아니다. 무덤 주변 잔디를 비롯해 화단에 심은 꽃, 나무들의 전지작업도 동시에 진행한다.
왕릉 벌초의 최대 관건은 '안전'이다. 거대한 무덤을 깎는 전용 기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평지의 잔디를 깎는 예초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기계의 칼날 돌아가는 속도가 무지하게 빠르니까 손이나 발이 끼어 들어갔다가는 그대로 날아가 버리지요. 그래서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에요. 사적공원 관리사무소에서도 일의 진척은 더뎌도 좋으니 무조건 안전수칙을 지키라고 하지요." 예초기를 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료가 휘발유라 무덤을 서너 바퀴만 돌아도 기계에 열이 발생해서 20분에 한 번씩 쉬어주어야 한다. 인부들이 한숨 돌리는 시간이다.
안전을 위해 인부들은 완전무장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게 발. 그냥 걸어올라가기도 힘든 경사진 무덤을 종일 빙글빙글 돌면서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분이 23기나 되는 대능원처럼 일이 많은 곳은 1주일 내내 무덤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날은 인부들 발이 죄다 부르트지요." 발을 보호하기 위해 인부들은 맨발에 붕대를 겹겹이 감은 뒤 양말을 기본 두세 켤레씩 겹쳐 신는다. 신발은 등산화. 그 밑에 아이젠을 부착한다. "미끄러지면 결딴나거든요. 저 날쌔게 돌아가는 (예초기의) 칼날 좀 보세요. 꼭대기에서 줄 잡아당기는 인부가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저 칼날 밑으로 직행하는 거예요. 한눈팔면 큰일 나지요."
올해로 8년째 고분 벌초를 하고 있는 김혜자(63)씨는 "노가다 중에 상노가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벌초하기 가장 힘든 고분으로 황남대총을 꼽았다. "쌍분인데다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아주 힘들어요. 봉분이 2개이니 이 봉분에서 저 봉분으로 뛰어다니기 바쁘지요." 벌초가 고됐던 날은 밤에 앓아눕기 일쑤다. "늘 비틀어져 있는 발목,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힘을 주는 종아리, 관절이 아프지요. 풀먼지의 독성도 만만치 않아서 얼굴을 잘 감싸지 않으면 벌겋게 피부가 일어나요." 인부 황태분(62)씨 말이다.
모두 일용직 근로자인 이들은 노동 강도에 비해 인건비는 낮은 편이라고 입을 모았다. 남자의 일당은 4만6000원, 여자는 3만7000원. 3~4월에 시작해 11월 중순이면 고분작업이 마무리되는 탓에 겨울에는 실업자로 살아야 한다. "이번 여름은 비가 와서 특히 낭패를 봤지요. 비 오면 작업이 취소되니까. 생업으로는 절대 못할 일이죠. 노느니 떡 사먹고 술 사먹을 돈이라도 벌자 하는 심정으로 나오지요. 보세요. 젊은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웃음)"
인부들의 작은 기쁨이라면 왕의 무덤을 보살핀다는 자부심이다. "만날 보는 게 왕릉이고 고분이라 웬만한 구경거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관광객들의 출입이 엄금된 고분 위에 퍼질러앉아 가을 햇살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인부들만의 특권.
경주 왕릉의 벌초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일부러 일정을 수소문해 방문하는 사진작가들도 많다. 경주시청 산림개발과 직원이기도 한 권영만씨는 경주의 왕릉과 고분을 수십년간 카메라에 담아온 사진작가. 권씨가 일러주는 왕릉 벌초 관전 포인트가 재미있다. "무조건 크고 웅장하다고 벌초 광경이 멋진 건 아니에요. 이를테면 천마총보다 쌍분으로 이뤄져 일명 '낙타등 고분'이라 불리는 황남대총이 훨씬 근사하지요. 벌초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으면 고분을 중간쯤 깎고 있을 때 찍으세요. 크고 작은 고분을 겹쳐서 찍으면 훨씬 멋지죠. 물론 왕릉 관광은 가을이 최곱니다. 벌초 후 짧게 자란 잔디가 노란빛으로 물들면 정말 아름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