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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클럽] 캄보디아 킬링필드 보며 북한을 떠올리다

鶴山 徐 仁 2010. 11. 19. 15:46
사설·칼럼
태평로

[태평로] 뼛조각이 굴러다니는 킬링필드 현장에서

입력 : 2010.11.17 22:28 / 수정 : 2010.11.17 23:23

박정훈 사회정책부장

비극의 '킬링필드' 유적지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교외에 자리 잡고 있다. 입장료 2달러를 내고 들어가자 1만명이 파묻혔던 129개의 구덩이 흔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땅에는 하얀 돌조각 같은 물체들이 굴러다닌다. 현지 가이드가 무심한 표정으로 "사람 이빨"이라고 알려준다. 죽은 사람의 유골 조각들이 채 수습되지도 않은 채 방문객들 발에 차이고 있었다.

30여년 전, 캄보디아는 온 나라가 '킬링필드'였다. 공산주의 이상향 건설의 광기(狂氣)에 빠졌던 크메르루주 정권이 200만명을 고문하고 죽였다. 그들은 지식인과 부르주아 반동을 제거해야 다같이 행복한 농업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선동했다. 중앙은행을 폭파하고 화폐를 없애 물물교환 사회로 되돌렸으며, 단지 안경을 끼었으니 '먹물'일 것이란 이유만으로 사람을 처형하기도 했다.

프놈펜 외곽의 유적지는 당시 캄보디아 전역에 있던 수많은 수용소 중 하나다. 중앙의 위령탑엔 구덩이에서 발굴한 유골들을 거대한 유리 납골당 속에 진열해놓았다. 금이 간 두개골이며, 도끼 자국이 선명한 턱뼈 등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 방문객들을 몹시 불편하게 한다.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이것이 피해갈 수 없는 역사의 기록이다.

마당 한쪽엔 '매직 트리(Magic Tree)'란 안내판의 나무가 있다. 이름은 멋지나, 사연은 기가 막힌다. 당시 이 나무엔 대형 스피커가 걸려져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의 비명 소리가 다른 수용자들에게 들리지 않게 음악을 틀었다는 것이다. 죽창과 도끼로 여자와 아이까지 살해하던 처형장 경내엔 아마도 웅장한 혁명가(歌)가 울려퍼지고 있었을 것이다.

캄보디아는 원래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였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앙코르와트 유적지에 가보면 이 나라의 과거가 얼마나 강성했는지 실감하게 된다. 6·25전쟁 직후엔 기아에 허덕이던 한국에 쌀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 후 두 나라 운명이 역전된 것은 결국 국가 리더십의 차이일 것이다. 캄보디아가 정파로 갈라져 내전(內戰)을 벌이고 '모택동(毛澤東)주의'의 관념에 빠졌을 때, 한국은 국가건설에 올인했다. 크메르루주가 킬링필드의 칼춤을 춘 1970년대 후반, 우리는 도로를 놓고 중화학 산업을 일구었다.

친미 론놀 정권과 크메르루주 간 내전이 촉발된 것은 1970년이었다. 그해 7월 우리는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했다. 그 후 40년이 지나도록 캄보디아엔 아직 고속도로가 없다. 경부고속도로처럼 프놈펜과 최대 항구도시를 잇는 첫 고속도로 구상이 한국도로공사의 지원 아래 이제야 겨우 시작됐을 뿐이다.

'잃어버린 40년'을 보낸 캄보디아도 이젠 환상에서 깨어나 "한국을 배우자"고 하고 있다. 그러나 캄보디아가 진저리치며 내다버린 '킬링필드의 추억'이 한반도에선 여전히 살아 있다.

크메르루주가 200만명을 살해했다면, 북한 역시 '우리 식대로'를 외치며 수백만 명을 굶겨 죽였다. '공산주의 지상낙원'의 구호 아래 인민을 죽이는 북한 체제는 크메르루주의 복제판이다. 고문과 학살이 자행된다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아마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북한 인권문제만 나오면 '내재적 접근'을 내세우며 "북한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우기는 세력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캄보디아에 꼭 가볼 것을 간곡히 권한다. 뼛조각이 굴러다니는 스산한 킬링필드 현장에서, 이 땅 종북(從北)주의자들의 위선과 허구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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