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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동 목걸이>(단편소설,계간 문예지 21세기 문학, 2009년 가을호)

鶴山 徐 仁 2010. 6. 9. 22:53

청동 목걸이(단편소설)

 

정소성

 

 

아침에 부대 막사로 출근했더니 대대장 실로 제 1중대장 김 대위가 들어왔다. 그는 학훈 출신으로 전역의 시기가 지났지만, 연장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재학시 사학과에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좀 박식했다.

그는 거수 경례를 하여 예를 표했다.

“보고드릴 말이 있어서 일찍 들렸습니다. 대대장님!”

“무슨 보곤가? ”

“열 번 이상 부대를 방문하여 6.25 때 잃은 아들을 찾아 달라는 노인이 있습니다.”

“....”

나는 너무나 뜻밖의 내용이라 무슨 대꾸를 금방 할 수 없었다.

우리 부대는 영천 보현산 지구에 주둔한 모 사단 예하 모 연대에 귀속된 독립 대대이다.

이런 우리에게 한국전쟁 때 죽은 아들을 찾아 달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구만. 그런데 1 중대장, 왜 이런 일을 나에게 즉각 즉각 보고하지 않았나? 민원인이 열 번이나 찾아오고 나서야 나에게 보고하다니 근무태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나에게 그간의 간단한 경위서를 써 가지고 오시오.”

내가 김대위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은 사건의 내용을 좀더 상세히 알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모종의 문책에 나름대로 대비하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대대장으로서 주둔지역의 민원을 소홀히 했다는 문책은 인사고가에 결정타가 될 수 있었다.

나는 김대위가 써 가지고 온 경위서를 건성으로 읽어 보고는 노인을 나의 집무실로 모셔오도록 했다.

“부대장님, 나를...나를...만나 조서 고맙십니더. 부대장 만나기가 우째 이리도 어려분지...여기 찾아오길 꼬옥 오늘로 2 년이나 걸맀십니더...”

부관 안중위의 부축을 받으며 내 집무실로 들어오는 노인의 차림새는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양복을 걸치고 있었고, 비록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노인은 무슨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자루를 어깨에 비스듬히 메고 있었다. 6.25 때 중공군이 버리고간 배낭과 비슷했다.

하지만 노인은 그야말로 세월을 느끼게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름 투성이의 얼굴피부에 검버섯이 가득 피어 있었고, 여기 저기에 보기 흉한 흉터가 있어서 그의 일생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치 흑인처럼 검게 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현주소와 직업, 가족상황과 재산 상태는 어떠하신 분인가?”

“현주소는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여기 산정1리의 옆동네인 산정2리 10번지이며, 직업은 농사를 짓는 분이고 아울러 집에서 수공업으로 팔찌 목걸이등 장신구를 만든다고 합니다. 논 열 마지기에 밭 열 다섯 마지기를 부치고 있습니다. 가족으로는 올해 일흔 다섯의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고, 바로 옆집에 둘째 아들의 아들이 분가하여 살고 있습니다. 원래 아들이 둘이었는데, 큰 아들이 6.25 때 참전하여 전사통고를 받았고, 둘째 아들은 역시 전쟁 중 행방불명된 것으로 통고되었다고 하지만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들 둘을 조국에 바친 분이시구만...그래 두 아들의 유족 상황은 어떠한가?”

“맏며느리는 남편의 시신을 찾는다고 전쟁 중 집을 나간 후 사망통지서가 왔고, 둘째 아들의 부인은 지금 아들과 함께 시부모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 나이는 63세입니다.”

“뭐라고요! 내 직업이 농사꾼이리고요! 말도 안되지럴! 팔십노인이 한분 되 보라고! 이 몸둥이 하나 건사하기 힘드는데 무슨 농산교! 나는 원래부터 농사는 모린다고.”

“그래 어르신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이 송갑식이 절대로 농사만 짓는 농사꾼이 아니구마. 송갑식이라카는 이름 들어보지도 못했능교?”

“실례지만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송갑식이, 정조대왕 때부터 3백 명 한양 경공장 중 한명이던 규 자 호 자 경공장의 이래뵈도 그 어른의 직계 십대 손입니더. 정조대왕 때 한양에 경공장 3백명 지방에 외공장 5천명이 있었는데, 우리 규 자 호 자 할배는 경공장 중에서도 왕비와 정경부인들만 애용하던 팔찌 목걸이만 만들었습니더.”

“....”

이야기가 너무나 뜻밖으로 흘러 이 넋나간 듯한 노인의 입을 쳐다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들 어리둥절해졌다.

“김 대위 무슨 소리요?”

나는 1 중대장이 사학과 출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노인이 하는 말의 뜻을 물었다.

“네, 조선시대에 궁궐과 6조 이하 각 사에 딸린 장인들을 말합니다. 이들의 주 업무는 무기제작이지만, 자질구레한 사무도구와 왕비와 궁녀들의 장식품도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숫자가 이 노인이 하시는 말과 좀 다릅니다. 저가 기억하기로는 한양 내 경공장의 종류는 129종이었고, 장인의 숫자는 2795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설치되었던 장인들을 외공장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각 관아에 등록되어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무상으로 공역에 종사하였으며, 혜택이라 하면 공장세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자유로운 수공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즉 물건을 만들어 장시에 내다팔 수도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으음 이 어르신의 십대조가 경공장이었다는 말이군...”

“저의 생각으로는 경공장이 아니고 아마도 외공장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사실이 이 노인의 민원사항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오?”

“저의 생각으로는, 지방 각 관아, 특히 감영같은 데는 상당한 숫자의 외공장들이 등록되어 있었고, 각종 무기 제작과 각종 사무용품 하물며 농기구등도 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린대로 지방 향족의 귀부인들을 위한 각종 장식품도 제작하였습니다. 조선실록에 이들 경공장과 외공장의 이름은 명기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노인네의 10대 조상이 아마도 대구에 위치했던 경상감영이나 경주에 위치했던 경주목 혹은 영천에 위치했던 영천군에 등록되었던 외공장 중 한 분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이 속해 있던 지방관아의 공물을 제작하는 일방 향족 귀부인용 목걸이와 팔찌 혹은 반지를 제작하여 지방 장시에 내다팔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으음...”

그 사이 노인은 해괴하게 생겨먹은 자루에서 빛 바랜 목걸이 같은 것들을 책상 위에 세 개나 꺼내놓았다. 그가 녹 투성이의 목걸이들을 꺼내기 위해 자루의 덮개를 열었을 때 기이하게도 무슨 야전삽같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꼬질 꼬질 때가 묻고 가장자리가 문들어진 노트 여러 권이 보였다.

김대위와 부관이 위험물은 없다고 했으니 안심을 했으나 정말 금방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노인네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목걸이...우리 맏아들 꺼...우리 며느리 꺼...우리 둘째 아들 꺼...꼭 같은 거...”

노인은 헛소리같은 말만을 단절적으로 표현할 뿐 구체적인 내용을 조리있게 설명하지 못했다.

“노인은 똑같은 목걸이 세 개를 만들어 맏아들과 맏며느리, 그리고 형을 찾아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목에 걸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세 개의 목걸이가 노인의 손에 입수된 경위가 무엇인가? 맏아들 것은 전사통지와 함께 배달되었다고 하더라도 며느리와 둘째 아들의 것은 어떤 경로로 노인이 소유하게 되었다는 말인가?”

“노인의 주장에 의하면, 맏아들 것은 군번표와 함께 전사 통지서와 함께 배송되었고, 저기 가운데 있는 색깔이 조금 노란 것은, 전후에 알려진 것인데 남편 찾아 집을 나간 맏며느리는 남편이 멀리 가지 않았다는 전언을 듣고 여기 영천 지구 전장을 헤매다가 적탄인지 아군탄인지 확실하지 않는 총탄을 대퇴부에 맞고서는 친정으로 가서 앉은뱅이가 되어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죽으면서 저 목걸이를 시댁에 전달해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저기 조금 파르스럼한 것은?”

“노인은 세 사람에게 준 목걸이를 자신만이 분별하게 좋게끔 색깔을 조금씩 달리했다고 합니다. 맏아들 것은 납색갈로, 맏며느리 것은 노르스럼한 색깔로, 둘째 아들 것은 파르스럼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노인은 맏아들과 맏며느리의 경우를 겪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을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똑같은 색깔의 목걸이를 두 개 만들어 자기가 하나를 가지고 다른 한 개는 둘째 아들의 목에 걸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 민원인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육군 내에 전물장병 유해발굴단같은 기구는 없었다. 따라서 누구 하나 전몰장병의 유해를 찾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군인은 전쟁에 나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전쟁 때 우리와 함께 싸운 미군의 경우는 우리와 정반대였다.

그들은 단 한 구의 유해라도 찾아내기 위해 주한 미군 전체가, 온 국민이, 정부가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해서 엄숙하게 장례를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희생된 분의 유지를 영원히 기리고자 했다.

미군의 이러한 모습에 자극을 받은 육군의 일각에서는 우리도 6.25 전몰장병의 유해를 발굴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까지 어떤 단안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김대위가 이 노인을 아홉 번이나 돌려보내고 열 번째 나에게 데리고 온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만 했다.

“내 생각으로는 전몰장병 유해발굴을 위한 전담 기구같은 것이 군에 곧 생길 것 같습니다. 국민 여망을 무시하는 군은 진정한 국민의 군이 아니라는 생각들을 군수뇌부는 가지고 있으니까요. 허지만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내가 죽고 나서 생기면 안되지럴...내가 죽기 전에...내가 죽기 전에...”

노인은 혼자말을 중얼거리면서 그 부대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내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김대위와 부관 안 중위가 부대 정문 초소까지 그를 배웅했다. 그를 배웅했던 김대위가 나의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대대장님, 노인이 대대장님에게 전해달라면서 부탁말을 남겼습니다.”

“무슨 말이오?”“자기가 사는 산정 2리로 꼭 한번 금명간 찾아와 달라고 했습니다. 무슨 드릴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드릴 것?...노인이 나에게 줄 것이 무엇이 있겠오...수박이나 한덩이 주시려는거겠지...그런데 그 영감님 좀 괴이쩍은 구석이 있는 사람 아니오? 김대위 생각은 어떠하오? 10대 조상이 무슨 궁중여인들의 장식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느니...군에 나가는 아들들에게 손수 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주었다느니...그럴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좀 허황된 소리같아.”

“저의 생각으로는 반반 이라고 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완전히 날조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다음 주에 대대장님을 모시고 노인의 집에 한 차례 가 보았으면 합니다.”

“으음, 그럼 다음 주에 한번 가봅시다. 멀지도 않은 곳이니까.”

송갑식 노인이 가고 난 후 나는 그를 잊고 대대장으로서의 일상 업무에 열중하였다. 흔히들 군의 전투력은 중대가 좌우한다고 하지만, 역시 전선의 변화는 대대의 운용에서 온다고 보아야 한다.

제대 장병들은 흔히들 중대장을 제일 잊지 못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대장을 가장 존경한다. 중대장이 지근거리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상관이라면 대대장은 전투의 흐름을 지휘하는 상관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고들 한다.

나는 대대원들의 사기와 전투력 향상을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했다. 평화시의 군 관리가 더 어렵다고들 한다. 나의 대령 진급은 대대장 근무실적 평가에 의해서 판가름날 것이다.

그 노인의 민원은 까마득히 머리에서 멀어졌다. 그런 괴상스런 노인도 있으려니 하는 정도로 어렴프시 그를 기억할 뿐이었다.

그런데 한 주가 가고 월요일이 되었다.

노인의 집은 부대에서 지프로 삼십 분도 안되는 거리였다. 열 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노인의 집은 동네 제일 뒤편 야산 아래 위치하고 있었다. 차가 노인의 집 앞까지 가 닿았다.

조그만 몸집의 할머니가 뛰어나왔고, 이어 노인이 비틀거리면서 나왔다.

이어 육순은 되었음직한 할머니가 뛰어왔고, 이어 초로의 장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옆집에 산다는 둘째 며느리와 손자였다. 단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노인의 집은 300평은 됨직해 보였다. 일자로 된 살림집 곁으로 함석지붕을 얹은 토담가옥이 두 채나 있었다. 시골에 흔히 있는 머슴방이나 골방인가 했더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노인의 안내에 따라 그 토담집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각종 연장들에 의해 흠집 투성이가 된 작업대가 한 편으로 놓여져 있고, 그것 위에는 나로서는 처음 보는 갖가지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작업대를 비롯하여 모든 연장들 그리고 방 분위기가 아주 고풍스러웠다.

다른 방은 가구를 만드는 공간인 듯했다. 깨끗한 작업대가 놓여 있었고 공간을 채우는 것들이 다들 그럴 듯한 가구들이었다. 주로 농장들이었다.

“먹고 살려고 농장도 만들구마...”

우리는 농장이 들어선 방에서 여기 저기 가구들에 걸터 앉아 자리를 잡았다.

며느리인 듯한 할머니가 풋고추와 막걸리가 담긴 주전자를 소반에 받쳐 왔다. 오래간만에 마셔보는 시골막걸리가 시큼하면서도 시원했다.

노인이 전번에 그가 부대에 왔을 때 부대자루에서 슬쩍 보여주었던 낡아빠진 대학노트를 가지고 왔다.

그는 막걸리를 한 차례 마시고는,

“이 공책... 내 아들의 뼈가 묻히 있을만한 땅을 적어 놓은 거구마...특히 큰놈이 전사했다고 통보가 온 영천 보현산 지구를 상세히 적어놨구마...삼팔선도 있고예...철원지구도 있구마...내가 저기 저 삽으로 다 안 파봤는교...뼈는 많이 찾아냈는데...내가 목에 걸어준 목걸이를 맨 해골은 없더라고예...”

“....”

나와 김대위 안중위는 기가 차서 무슨 말인들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깨달음이 우리의 뇌리를 때린 것이다.

군인은 어떤 기막힌 일에도 놀라지 않는다. 군인은 오직 적을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기막힌 일도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적의 소행이 아닐까 생각할 뿐이다. 그것 이외에는 별무관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동기생인 옆 대대의 배 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송 노인 이야기를 했다. 자신도 유해를 찾았으면 하는 유족들을 가끔 만나지만 그런 정도의 인물을 대한 적이 없다고 했다. 50년 세월 속에 모든 것은 녹아 없어진지도 몰랐다.

나는 그 집을 떠나면서 노인이 건네주는 목걸이를 받았다. 둘째 아들의 목에 걸어주었던 것과 똑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 것을 받아서는 안되지만, 무슨 유언처럼 살아생전에 이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군대의 최고 높은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라고 하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노인은 아마도 자신의 작업실과 목걸이들의 내력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초청한 것같았다.

과연 노인은 며칠 후 세상을 떴다. 나는 장병들을 보내 장례를 돕도록 했다.

장례를 무사히 치르고 온 김대위는 노인이 유언으로 나에게 남겼다는 부대자루를 건네 주었다. 전쟁이 없는 시기의 군대란 어쩌면 답답한 조직인지도 모르겠다.

군대란 전쟁을 해서 적을 쳐부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조직이다.

얼마 전 가까이 지내던 배 중령이 권총자살을 했는데, 나는 그의 자살 이유를 누구에게든 말하지 못했다. 나의 추측이 맞다고 확신하지만, 나의 확신은 어디까지나 나의 심증에 불과한 것이다.

검은 상복을 입고 하염없이 울어대는 배중령의 부인에게 무슨 이야기든지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배 중령과 나는 2년 전 동기생 일차 대령 진급 5명에서 누락되었고, 올해 2차 진급에서 또 누락되었다.

누구보다 확고한 조국애로 무장되어 있고, 누구보다 투철한 군인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상부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미망인에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사실 배중령의 죽음은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확연히 구별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군 당국에서는 배중령의 평소 성실한 근무 태도를 고려하여 안전사고로 처리하였다. 그래서 그의 유골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나는 동기생인 배중령의 뼈가루를 국립묘지에 묻던 날 대령 진급의 희망을 포기하였다. 대령이건 중령이건 장교묘역에 묻히는 건 마찬가지다. 장군묘역으로 못갈 바엔 조바심낼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달랬던 것이다.

나는 대령이 되고 장군이 되는 길만이 참군인의 길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군사대학에 들어오기 전 고교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냈던 배중령, 나는 그를 친구로서 보다는 투철한 군인정신을 가진 동료로서 존경하였다.

그러나 대대장인 나에 대한 부하들의 충성심은 여전했다. 이것이 군에서 군소 지휘관을 하는 긍지인지도 모른다. 전시가 아니라서 그렇지 전투시라면 전 부대원들은 적 궤멸을 위한 공격과 더부러 나의 생명을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윤 중령, 축하하네. 유해발굴단장으로 전보 발령이 내려왔네.”

“네?...”

“이번에 육본에서 6.25 유해발굴단을 새로 발족시켰어. 벌써부터 논의가 되어오던 사안이었지. 드디어 결실을 본 거야. 그 초대 단장으로 윤중령이 발탁된거야. 육본 발령이 군단장 사단장을 거쳐 나에게로 전달되었어. 본인에게도 곧 전달될 거야. 축하하네.”

“축하?...감사합니다.”

나는 그가 축하한다니 우선 감사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얼핏 생각해도 그것은 축하할 일이 못되었다. 보병대대를 지휘하던 일선 대대장을 육군 방계 사업 부대로 보낸다는 것은 분명한 좌천이었다.

연대장은 나의 군사대학 동기생이었으나, 그가 대령이 되고 나서 그리고 더욱 나의 직속상관이 되고 나서 두 사람 사이의 말투부터 달라졌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당해보면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대령과 중령이 한 계급 차이지만, 그 역할이 너무나 달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지휘관이다. 그것이 군이다. 군의 생리이다. 진급하지 못하는 군 지휘관은 자연적으로 도태되는 것이다.

절망감 속에서 온종일 나의 집무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점심 먹으로도 나가지 않고 부관에게 배달하라고 했다.

이 순간만큼은 나는 배중령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두 눈 팔지 않고 군에만 헌신해온 자에게 군은 냉정하게 상위 입성을 거부한 것이다.

나는 캐비넷으로 가서 권총에 손을 댔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군의 생리에 너무나 철저했던 죄밖에 더 있었나. 그러나 지금 나에게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은 없지 않는가. 나는 권총에서 손을 뗐다. 유해발굴단...으음...

그 순간 나는 같은 캐비넷의 공간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부대자루를 발견했다. 언젠가 송노인이 죽으면서 나에게 남긴 것이다.

기이하게도 목걸이는 분명 아득한 옛날, 적어도 50여년 전에 만들어졌을 텐데 녹이 심하게 끼지 않고 나름대로의 색채를 발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목걸이들을 손으로 집어들어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것들은 나에게 분명히 무언가 귀중한 말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었다.

마침 그 때 김대위가 들어왔다.

심상찮는 분위기에 그는 조금 당황해 하는 표정이었다.

“대대장님,....물러가겠습니다. 그만...”

“아니, 괜찮아. 용건이 뭔가?”

“그냥 퇴근 무렵이라 들러보았습니다.”

“으음, 그럼 말이야 이거 목걸이들...죽은 노인이 나에게 남긴 거 말이야...이거 무슨 쇠붙이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색깔이 있나? 혹시 아나?”

“저가 공대 금속학과를 나오지 않아 잘은 모릅니다만...저의 전공 분야에서 주로 문화재 발굴시 만나게 되는 황동과 청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몇백년, 하물려 몇천년 전의 문화재가 발굴되는데, 검이라든가 그릇 주전자 등은 대부분 황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황동은 구리와 아연으로 된 합금인데, 그야말로 누런 색깔로 되어 있습니다. 구리 7 아연 3을 최고의 배합으로 봅니다. 소위 말하는 신쭈라는 것이지요. 일본말에서 온 것같습니다. 이것이 6대 4가 되면 노란 색갈로 변합니다. 그러니까 노인이 며느리에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은 구리 아연 6 대 4의 배합으로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청동이라는 것도 많은데 그것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입니다. 이것은 푸르게 빛나는데 오히려 황동보다 더 단단하고 오래 갑니다. 둘째 아들에게 만들어주었다는 저 푸른 목걸이가 바로 청동인 것 같습니다. 흔히들 호킹이라고들 합니다. 몇 백년 대대 손 손 여자 장신구를 만들었다는 송 노인의 가계로 보아서 그런 합금 정도는 충분히 만들었으리라 추측됩니다. 사실 얼마전 노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노인의 공방에서 합금작업용 솥을 보았습니다...“

“....”

나는 속으로 김대위의 박식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목걸이들을 손에 든 채 천천히 내 자리로 와서 몸을 내렸다. 그리고는 김대위를 쳐다보았다. 어디로 보아도 군인다운 구석은 없는 얼굴이었다.

“김대위...”

나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나의 심상찮은 태도에 김대위는 조금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네, 대대장님, 하명해 주십시오.”

“그런 뜻이 아니라, 좀 의외의 질문일지 모르지만...자네 군에 말뚝을 박을 작정인가?”

“네? 연장근무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럴 생각까지는...육사출신도 아닌데...”

“으음, 그렇다면...말이야...내가 곧 발족될 유해발군단 단장으로 가게 된다면 자네 혹시 나와 행보를 같이 할 생각은 없나? 군 기밀이지만 이미 공개된 것이라...”

“네!...저의 전공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고...대학 때 발굴한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유해발굴과 문화재 발굴이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만...유해도 문화재니까요...대대장님께서 그런 보직으로 가신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유해도 문화재라...거참 좋은 말이군...으음, 연대장님과 사단장님에게 말씀드려 꼭 성사시켜 보겠네. 사실 내가 오늘 아침 처음 발족하는 국군유해발군단 단장으로 보임되었다는 명령을 받았어. 그래서 망연자실한 상태로 있는 중이었어. 참 다행이구만. 자네가 따라준다면 나는 새로운 세상을 살 것만 같아!”

김대위가 내 방에서 물러간 뒤 나는 푸르스름한 색채를 발하는 그 청동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보았다. 녹 투성이의 목걸이였지만 그 색갈은 살아 있었다. 목걸이는 분명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네 군대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김대위의 합류는 나를 딴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를 진심으로 따라주는 유능하고 젊은 장교가 있다는 사실이 군 지휘관으로서의 내 자존심을 채워주었다. 내가 유해발굴단의 초대 단장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게 했다. 나는 안 중위까지 유해발굴단의 단장 부관으로 데리고 가는 행운을 얻었다. 어차피 5년 후 계급 정년으로 물러날 나를 배려한 사단장과 군단장의 청이 육본에 먹혀들었던 것 같다.

배중령의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 속에서 나는 출구의 희미한 빛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백만원이 넘는 종신 연금이 있어요. 너무 좌절하시지 마세요. 내가 뭐라도 할께요.”

절망에 떨어졌으나 내면을 숨기고 있던 남편의 심중을 알아차린 아내는 안타까움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남자로서의 꿈이 사라지는 지금, 적은 금액의 연금으로 연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배중령의 죽음은 바로 나의 것이었다.

“대대장님, 육심만 대군 중에서, 십개 군단과 50여개 사단병 중에서, 온국민이 열화처럼 원하는 일을 대대장님께서 처음으로 뽑혀 책임을 맡으셨다는 사실에 대해 대대장님을 보필하는 저희들로서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집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전시라면 온 몸을 던져 저의 몸이 산화하는 한이 있어도 대대장님을 지킬 것입니다.”

“좋다, 지금 당장 궤멸시켜야 할 적은 없다. 십만 대군의 중공군에게 포위된 아군도 없다. 하지만 당시 불리한 여건 속에서 포화로 죽어 누구의 인지도 없이 땅 속에 묻혀 있는 유해들을 발굴하여 그들이 누구인지 밝히는 사업에 우리의 총력을 기우리자. 유해발굴단은 유골들의 전선으로 급파된 우리 대대의 다른 모습니다. 대대장 이하 중대장 참모들이 그대로 옮겨간다! 이제 총을 놓고 삽을 들어야 한다. 우리의 전투 대상은 적이 무한으로 뿌리는 포화가 아니라, 유골을 뭉개고 있는 오래고 두터운 시간의 덫이다.”

우리는 정들었던 부대를 떠나면서, 송 노인의 묘지를 찾았다.

마침 현충일이라 우리는 산정리를 떠나 상경하는 중, 대전 현충원에 들러, 송 노인의 맏아들 송필구 일등병의 묘를 찾았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다가 죽었는가를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나는 노인이 나에게 남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나의 주적은 적군이 아니라, 노인장 둘째아들의 유해을 덮고 있는 흙더미올시다. 노인께서 남긴 노트를 근거 삼아 둘째아들의 유해를 꼭 찾아서 현충원에 모시겠습니다. 꿈에 그리던 연대 지휘를 한번 해보지 못한 실패한 군 장교지만 새로이 맡겨진 지휘는 알 수 없는 스릴로 다가옵니다. 나를 믿어 주소서...

동작동 국립현충원 안에 국군유해발굴감식단 청사를 새로이 마련하였다. 국민들의 여망을 수용한 국방부의 배려였다.

국방부는 우리 조직에게 179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발굴단은 발굴반과 감식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대부분이 유해발굴반이고, 감식반에는 DNA전문가 다섯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어서 인력부족 상태이다.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국방부는 각 사단별로 발굴반을 조직하여, 우리 유해발굴반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도록 했다.

발굴단 청사 내부에는, 디지털 X선 촬영기, 유실된 유해를 복원할 수 있는 삼차원 스캐너, 뼈 건조기, 초음파세척기 등 최첨단장비를 구비했다.

김대위와 안 중위는 야전침대를 청사 안에 갖추어놓고 귀가도 하지 않은 채 진두지휘를 했다. 전쟁이 산 자를 죽이는 행위라면, 발굴작업은 죽은 자를 살리는 작업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더한 긴장감과 책임감을 요구했다.

김대위는 3개월간 몸무게가 5 킬로 빠져 버렸다.

“김대위, 무리하지 마시오. 우리의 전투는 장기전이요.”

“중대장으로서 한 사람의 사병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긴 휴전선 전장은 아니잖소!”

“우리의 전선은 전국 모든 산하에 퍼져 있습니다. 전투지구가 너무 넓습니다. 그러니 더 힘이 듭니다. 두 개 중대를 잃고 오직 한 개 중대밖에 지휘하지 못하시는 대대장님을 위해 목숨 바쳐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김대위...”

그의 어깨를 잡은 나는 두 눈이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6.25 전쟁으로 인한 남한 측 사망자는 대략 50만명으로 계산되고 있고 행방불명자까지 합치면 80만명 선이다. 이중 군 사망자는 13만8천명이고 실종자 2만여명으로 대략 16만명으로 본다. 학도병 2000명, 청년단을 포함한 경찰관 3800명도 포함된다.

모든 준비를 갖추고 3개월 후부터 발굴반이 현장에 투입되었다.

수박이 잘 익었나 표면에 삼각형 구멍을 내어보는 것과 같은 수법으로 격전지로 알려졌던 장소를 일단 파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자연 한국전쟁사편찬위원회와 현지주민들의 제보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6.25 전쟁사와 현장을 대조하고, 현지민들의 증언을 들어 어느 정도 심증이 가면, 그 지역에 횟가루로 경계선을 치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한다. 땅 속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56년 전의 군 선배들에게 우리는 일렬 종대로 서서 거수경례를 한다. 나라를 지키다 고혼이 되신 영령들이여, 그 동안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이제 당신을 햇볕 쏟아지는 현충원 잔디밭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유해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국군 16만 명과 미군 5만 8천명이 묻혀 있을 것이기에 땅만 파면 유해가 쏟아질 줄 알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반세기 동안 한반도 남쪽 땅의 모습이 너무나 변해 있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 허리가 절개되어 절반이 잘려나가기도 하고, 거대한 골프장이 들어서서 지형을 가늠할수조차 없는 데가 적지 않았다. 있던 교량이 없어지고 엉뚱한 방향으로 새로운 교량이 들어서 있기도 했다.

게다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연적인 변형, 즉 홍수와 사태 그리고 강줄기의 변형으로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어려운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새로운 강줄기가 나고, 산이 무너지고 뚫리고, 도시가 생기고 마을이 없어지거나 새로 생겼으며, 나무들이 엉뚱한 곳에 너무나 빽빽하게 식수되어 방향과 지형을 분간하기 어려운 곳이 많았다.

우리는 2년 정도 일을 해보고, 나름대로의 통계수치같은 것을 세울 수 있었다. 하루에 평균 한 두 개의 유해를 발견하게 되고, 그럴려면 백 번 이상 발굴작업을 시도하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백 번이라 함은 물론 우리 발굴단을 비롯하여 전군 모든 사단에서 시행하는 발굴작업을 망라해서 하는 말이다. 발굴 첫해 344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꽤 여러해가 흐른 지금 대략 3000 여 구의 유해을 발견했다.

하지만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불과 46구에 지나지 않는다.

최첨단 과학적 방법이라 하여 유가족의 DNA 검사용 혈액표본을 6700개 수집해 놨지만, 유해 신원 확인 46구 중에서 20구만이 이 방범으로 확인되었을 뿐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 군의 존엄과 위신을 내리깎는 한 가지 내용을 밝혀야겠다.

오늘까지 3천 여 구의 유해를 발견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어떤 첨단과학적 방법보다도 송 노인이 남긴 그 낡은 대학노트가 우리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아무리 첨단과학이 고도로 발전했다고 하지만, 사진 한 장으로 땅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유해는 최소한 30여 미터 이상을 파야 존재하는데 무슨 수로 그것을 지상에서 알아낼 수 있겠는가.

당시 격전지의 주민들이나 참전용사들의 나이가 자꾸만 많아져 우리는 적절한 조언을 듣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이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1953년에 발발한 전쟁이 올해로 56년이 흘렀으니, 당시 군입대 나이가 20세라 해도 올해 76세가 된다. 앞으로 5, 6년이 고비다.

우리는 한국전쟁사에 의존하고 현지인들과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귀 기우리지만, 정말 막막할 때가 더 많다.

그럴 경우, 언제부터인가 김대위는 그 대학노트를 들고 오는 것이었다.

“송노인, 정말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휴전하고 56년간 남한 땅 온천지를 쏘다녔다는 이야기인데...그것이 정말 가능했을까...”

“아들의 유해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였겠지요. 각 지역마다 노인이 찾아낸 유해의 숫자까지도 적혀 있습니다. 노인의 주안점은 유해의 목에 걸린 푸른 색 목걸이였습니다. 여길 보십시오. 군번표 이외에 목에 목걸이를 걸었던 유해는 모두 아홉구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다섯구는 미군 유해였고, 두 구는 인민군 유해였고, 한 구는 중공군이었고, 국군으로 판명된 유해는 단 하나의 유해뿐이었습니다. 여기에 적혀 있지 않습니까.”

“철저하게 연구를 하였군.”

“노인이 연필로 휘갈겨 썼는데다가 글씨 자체가 문드러져서 읽기가 어렵습니다. 정식 문장도 아니고, 무슨 암호같은 것도 많아서 해독하기가 퍽 어려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물지도요. 그런데 나라에 따르는 유해의 분별은 어떻게 하고 있소?”

“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유해 근처에 떨어져 있는 단추가 중요 단서가 됩니다. 그리고 탄피와 탄알, 비록 녹은 쓸었지만 각종무기, 철모, 계급장, 전투화, 야전삽, 밥통, 숟가락, 수통, 도장 등이 단서가 됩니다. 한국군은 작은 무궁화 모양의 단추가 유해주변에 널려 있기가 일수입니다. 중공군 유해 주변에는 농구화 모양의 군화가 흩어져 있기가 쉬우며 통일되지 않는 갖가지 모양의 밥통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임표 휘하의 집단군이 도보로 중국남부에서 만주로 이동하면서 그들은 그때부터 심각한 기아에 시달렸고, 민가로 들어가 밥을 훔쳐 먹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인민군 유해 근처에는 무엇보다도 녹쓴 따발총의 탄창이 나딩굴고 있게 마련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 나라 군인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첫 번째 작업은 유해 근처에 떨어져 있는 군번표가 가장 중요합니다. 미군들의 군번표는 가장 크고 튼실하며 알파벳 글자 아래 숫자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목걸이가 흔히 발견됩니다. 그런데 단장님 이것...여기를 좀 보세요...”

“뭐가 있나? 김대위 내가 특별지시한 것은 어떻게 되었나? 별무 효과라면 나도 내일부터 삽을 들고 산야를 뒤적이겠네.”

“푸른색 목걸이를 한 유해말입니까?”

“물론이지.”

“기왕에 말씀드린 것 이외에는 아직 별다른 소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형인 필구의 군번을 추적한 결과 그 소속 부대가 금호강의 지류인 자천강 주변에서 적과 백병전을 벌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필구의 시신도 그 현장에서 수습되었다고 합니다. 전사에 기록된대로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밭으로 변해 있는 이 자천강 변에서 여러개의 목걸이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인민군들의 것이라는 판단이 서길래 단장님에게는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으음, 그중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걸이와 비슷한 색깔과 재질로 된 것도 있었나?”

“네, 그런 것이 서너 개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인민군들의 것이라는 판단이 서서...”

“그런 판단의 이유는?”

“첫째, 목걸이가 수습된 지역에서는 인민군들임에 틀림이 없는 유해가 대량으로 수습되었습니다. 유해 주변에 따발총의 특징적인 탄창과 총알이 흩어져 있었고, 군화가 국군의 그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여타 휴대품도 국군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인민군과 국군은 한 민족이야. 생활습관이 똑같다구. 숟가락이나 밥그릇 도장 따위는 똑 같아. 목걸이도 같을 거야. 그리고 인민군 중에는...특히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10만 인민군들의 절반 이상이 남한에서 징집된 청년이라는 사실을 잊었나?”

“‘가끔 가다가 국군장병의 군화와 녹쓴 M1 소총의 총신이 발견된 것은 그런 뜻일까요?”

“백병전이었다고 했잖아! 서로 섞여서 죽이고 죽어간 거야. 그러니까 동생 필진의 유해를 국군으로만 제한하지 말란 말이야. 가장 치열했던 영천 전투 중에서 보현산 전투는 특히 백병전이 많았다구. 김용배 대령의 5사단이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면서 끝내 영천 탈환을 이룩한 것은 대구 사수의 지렛대였어.”

“단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 뭔가 짚히는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라”

6,25 때 국군 모사단 모 대대는 청진까지 치고 올라간 최선봉 부대였다. 청진 점령을 눈 앞에 두고 후퇴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후퇴길은 함흥에서 막혀 버렸다. 함흥 아래는 벌써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함흥에서 미군 후퇴선박을 타고 강릉까지 내려와 다시 태백산맥을 넘어 원주로 왔다. 잠시도 눈 돌릴 사이가 없는 강행군이었다. 8백명 대원들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치악산 전투에서 대원을 또 백명 정도 잃었다.

연대집결지인 영천으로 내려왔다. 신병을 보충받아 겨우 500명선을 유지했다. 전투예상지인 보현산으로 들어가다가 해가 저물어 자천강 변에 천막을 치고 숙소를 마련하였다.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 대대원 전부가 다들 강변에 널부러졌다. 마침 어둠이 짙어져 그런대로 대대의 전모가 자연적으로 어둠의 장막 뒤로 은폐되었다. 전 부대원들이 심한 허기를 느끼고 있었으나 지금 허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기력이 너무나 달려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없었다. 청진에서 후퇴한 후 근 석달 동안 거의 자지 못했고 거의 먹지 못한 탓이었다.

어둠으로 막혀버린 자천강 변에 소속은 알 수 없었지만 자신들의 부대와 비슷한 꼴을 한 부대가 와서 진을 쳤다. 진을 친 것이 아니라, 그냥 와서 모래바닥에 널부러져 버렸다. 자신들만큼이나 긴 행군을 한 부대인 듯했다. 아니 자신들보다 더한 무기력 상태인 것 같았다.

두 부대는 조용하다 못해 어둠의 장막에 깔려버린 듯 쥐죽은 듯 정막했다.

취사병들만이 어렴프시 움직이는 듯했다.

마침 비가 쏟아져, 어설프게나마 천막을 치고는 다들 막사 속으로 들어가 꿈쩍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밤중 3시경이었다. 늦게 도착한 부대에서 부대원 한 명이 기왕에 진을 치고 있던 부대의 막사로 왔다. 취사병인 듯 총 대신에 무슨 깡통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동무, 동무, 자나? 무스기 부대디? 우리래 XXX 부댄데 거 고추장이나 된장 좀 남은 거 있지비?”

“아니 이 새끼들, 인민군놈들 아냐!”

막사의 입구쯤에 자고 있던 국군 병사 한 명이 놈을 향해 M1을 갈겼다. 적병은 즉사했다. 두 막사 진영에서는 전부대원들이 그제서야 나란히 하고 한밤을 보낸 두 부대가 적군임을 알아차렸다. 총을 쏠 겨를이 없었다. 대검을 빼어들고 그냥 엉겨붙은 것이다. 전부대원들의 사력을 다한 백병전이 벌어진 것이다. 캄캄한 강변에서는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빗줄기 쏟아지는 강변 모래밭에서는 찌르는 기합소리와 찔리는 처절한 비명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이 새끼가 누구야! 더러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야압!”

처절한 살육전 속에서도 아군 전 대원들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들의 대장인 엄 중령이었다.

엄중령의 칼을 배에 맞고 비틀거리는 자는 강이라는 적군 대장이었다. 그는 6.25 전 자신이 지휘하던 대대병력을 이끌고 북으로 간 자였다. 그는 인민군 중좌의 계급장을 달고 있었던 것이다.

강 가는 호르라기를 불었다. 후퇴하라는 신호였다. 적병들은 싸움을 거두고 재빨리 산속을 향해 도망을 쳤다. 국군 병사들은 도망치는 적을 향해 일제사격을 했으나, 어둠이 짙어 정확한 조준을 할 수 없었다. 강 가도 배에 찔린 칼을 뽑지도 못한 채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어둠 속으로 도망을 쳤다.

새벽에 보니 적병 시체가 300구 이상, 국군 사망자가 백여 구가 되었다. 모래를 파고 그대로 쓸어묻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현산 아래 자천강 전투의 개요이다.

생포된 자들을 데리고 적 시체의 신원을 확인해 보니, 놀랍게도 시신 400 여 구 중, 200 여구가 남한 출신 젊은이들이었다.

“필구의 전사 장소가 바로 보현산 아래 자천강 변이란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필진이가 거의 형의 부대가 주둔한 곳 근처까지 접근했다가, 적병에게 사살된 것이 아닌가 봅니다. 그래서 강변을 이잡듯이 샅샅이 뒤적였습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노인이 남긴 비슷한 목걸이를 발견했습니다. 적병의 유해가 무더기로 발견된 곳이라 의심의 여지없이 인민군의 유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목걸이와 함께 인민군 유해들을 다시금 쓸어 묻어 버렸습니다. 전사에 나오는 백병전에서도 국군의 병력이 우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사자들이 압도적으로 인민군이 많았습니다.”

“으음...인민군의 목걸이라 하더라도, 남쪽의 청년들이 인민군에 그렇게 많이 징집되었잖아?”

“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에까지 신경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죽은 인민군 속에 동생 필진이 섞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생각하니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6.25의 특징이 같은 민족끼리 싸운 것이야. 외양은 똑같은 사람들이지. 미군들은 국군과 인민군을 구별하지 못해 아군을 공격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자천강 변의 백병전에서도 적의 지휘관이 남에서 올라간 놈이었다면서...하물며 죽어 해골이 된 마당에 그것이 인민군인지 국군이지 무슨 수로 구별을 하나...거듭되는 전투와 오랜 행군으로 두 부대원들의 군복이 거의 초가 되었을 거야. 그것은 군복이 아니라, 거의 넝마였을거야. 그러니 서로를 적으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지. 아무리 어둠이 깔릴 무렵이라고는 하지만...어둠을 뚫고 멀리서는 보았을 거 아냐! 적이라는 판단은 서지 않았던 거지... 내 생각으로는 동생 필진이 인민군으로 참전한 것 같아. 형의 군번을 들고 형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 현장입대한 거야. 그래서 보현산 전투에 투입된 것같아.”

“그럼 재발굴을...”

우리는 발굴반을 금호강 줄기인 자천강 변으로 급파하여, 한 달 가량 전에 되쓸어 묻은 유해들을 재발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기가 막힐 일이었다. 한달 이상 작업을 하여도 유해들과 함께 쓸어묻었다는 푸른 색 목걸이는 재발굴되지 않았다. 그 사이 몇차례 세차게 비가 내린 적이 있어서 강변이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한번 파헤쳐진 땅은 쉽게 유실되는 것이다.

나는 부하들의 작업결과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내 군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계급정년 날자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삽과 붓을 들고 발굴 현장으로 달려갔다. 삽으로 발굴된 유해는 부수어질까봐 붓으로 흙과 녹을 떨어낸다.

군을 떠나기 전에 그 노인의 소원을 풀어주어야만 한다고 나는 나 자신에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래야만 죽은 배중령을 저승에서 그래도 조금은 떳떳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을 용기가 없었던 자의 변명이라도 있어야만 하지 않겠나.

그러나 참으로 세상만사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강이나 바다에서 잡았다 노친 고기라 해서 다시 잡기에 쉬운 것은 아니다. 나는 결국 그 푸른색 목걸이를 재발굴하지 못하고 군을 제대하고 말았다.

자천강 유해재발굴 소문이 퍼져 지역주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일 차 발굴에서 노친 유족들 중에는 재발굴 과정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해를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울음이 터지고 강변을 딩굴고 야단이 벌어졌다.

그나마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해를 발굴한 사람들의 모습은 그래도 좀 덜 처절해 보였다. 보행조차도 어려울 정도로 노쇠한 할머니들은 한결같이 유해들이 남기고 간 그들의 아내들인데, 그녀들이 유해를 안고 우는 모습은 아마도 지상에서 가장 슬픈 장면일 것이다.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절망을 안고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뿌리면서 군문을 떠났다.

“대대장님, 내일부터는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

“내일? 할 일이란 없어...”

하지만 나는 내 목에 걸려있는 노인의 녹쓴 청동 목걸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넝마같은 부대자루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 안에는 야전삽과 낡아빠진 대학 노트 몇권이 들어 있을 것이다.

 

정소성

서울대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대학 수학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동인문학상 등 수상

<아테네 가는 배>등 단편집 5편

<천년을 내리는 눈><바람의 여인> 등 장편집 15편 간행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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