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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탈무드 정신의 핵심은 무엇인가.

鶴山 徐 仁 2010. 6. 4. 21:50

탈무드 정신의 핵심은 무엇인가.

정소성(소설가,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탈무드는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유대교의 경전이다.

유대교의 제 일 경전은 구약성서이다. 그렇지만 탈무드는 다소 비종교적인 차원에서 유대인들의 생활을 직접적으로 지배한 삶의 지침서였다.

2000년 이상 나라없이 유랑생활(디아스포라)을 한 유대민족이 1948년 자신들의 고토인 팔레스티나에 국가를 건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들에게 탈무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탈무드는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일까.

탈무드라는 책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은 BC15 세기 경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 팔레스티나로 이주해온다. 원민족은 헤부르인이었다. 일부는 이집트로 건너간다.

500 여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 이집트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족장인 모세의 지도를 받으며 이집트를 탈출하는데 성공하여(BC 1230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그 곳에 있던 다른 종족도 참가시켜 세켐에서 여호와와 계약을 맺고 12지파와 종교연합을 형성한다.

그러니까 모세의 인도를 받고 가나안 지방으로 들어간 유대인들은 그 즉시 왕국을 건설한 것은 아니다. 원주민들과 종교적인 융합이 더 급선무였던 것이다.

그들은 농업문화를 발달시켜 이 지역 고대종교문화를 꽃피운다.

그 후 이 지역 특유의 종교문화를 기초하여, 마침 해안지방으로 침입하는 팔레스테인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왕국을 건립한다. 시조는 바울이다. 2대 다비드왕, 3대 솔로몬 왕 때 전성기를 맞았으나, 솔로몬의 사후, 왕국은 두 개로 분리된다. 북왕국(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되었고(BC722), 남왕국(유대왕국)이 소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한다(BC586).

BC 597년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한 남유대왕국은 소위 말하는 제1차 바빌로니아 포수(捕囚)를 당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억지 정착민이 되어 고통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BC586 년 제 2차 바빌로니아인들의 침입을 받아, 더욱 철저하게 붕괴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제2차 바빌로니아 포수가 되어 조국을 잃은 유민으로 삶을 시작한다.

여기서 포수란 어휘는, 죄수가 포로가 되어 이역의 땅으로 끌려가 억지정착하여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후 소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하고, 이윽고 로마시대에 돌입한다.

로마의 속국인이었던 유대인들은, 봉기하여 역사적으로 유명한 유대전쟁을 일으킨다(AD66-70). 반 로마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유대인들은 항복하였고, 이때부터 근 2000년간 온 세계를 떠돌며 유민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중세 이후 유대인들은 일시 대우를 받은 적도 있었으나, 추방과 개종의 위협은 상존했으며, 크리스트 교단으로부터의 압박도 심했다.

그러나 뛰어난 경제적인 감각과 세계사 속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수많은 천재들의 출현으로 이 민족은 그 존재를 과시했다.

19세기에는 유럽에서 한 때 유대인들에게 선거권과 학교 설립권이 주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다시금 강한 반 유대 바람이 불었다. 이것을 안티세미티즘이라고 한다. 특히 20세기 니치스에 의한 반유대주의는 극심한 것이었다. 민족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유일신 여호와에 의한 선민의식과 독특한 민족 문화에 힘입어 자신들의 고토인 팔레스티나에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을 건립하였다.

팔레스테인 원주민과 기타 아랍인들과의 갈등은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탈무드는 팔레스테인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있다. 양 탈무드의 원문은 헤브라이어로 되어 있다.

보통 탈무드라 하면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말한다. 바빌로니아와 유대인들과의 인연은 제1, 제2차 바빌로니아포수를 당한 유대민족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근 2000 여년간 구전되어오던 탈무드가 책으로 결집된 것은 기원 후 2세기 말, 랍비(유대교의 지도자을 칭함)인 예후다 하나시에 의해서 였다. 그러나 결집되어진 탈무드가 그에 의해서 책으로 묶여졌는지 그의 후세인들에 의해서 집필되어 책으로 출간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탈무드는 모두 6장으로 이룩되어져 있다.

각 장에 담긴 내용을 그 핵심 정신만을 추려서 정래해 본다.

 

제 1장에서는 삶의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길고 긴 고난에 찬 삶의 역사 속에서도 언제나 낙천적인 마음을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고, 사실 그들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낙천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일신인 여호와가 자신들을 선민으로 지상에 보낸 것은 이 세상을 웃음으로 가득채우라는 주문을 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특히 고아와 과부를 웃겨야만 한다는 생각을 뿌리깊이 가지고 있다. 낙관적인 자세에서만 인간의 진보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낙관적인 자세에서만 남을 포용할 수 있고, 강한 민족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사회에서는 자살이 가장 큰 죄악이다. 자살한 사람을 위해서는 무덤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이승도 저승에도 갈 수 없는 인간이라고 보고 있다.

이런 각도에서 유대인들은 지식을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즐거운 인생에서, 자신들의 운명처럼 불의의 습격을 받아 철저하게 약탈당하더라도, 지식만은 빼앗기지 않을 수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인간의 삶을 균형이라고 믿고 있다.

유대인들은 설령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한쪽으로 치우친 맹신을 거부한다. 그것은 행복하지도, 인간답지도 않다고 믿는다.

이러한 낙관적인 인간관과 인간삶의 균형감각 위에서 유대인들은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교육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강조한다.

교육만이 자신들의 존재를 영속시킬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하물며, 생명을 주신 부모와 교육을 시키는 교사 중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서슴없이 교사를 선택한다.

이런 인간관에서 유대인들은 인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것이며,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인간은 인간을 혼자 독차지 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어떤 인간이라도 개인적으로 가까이 하면 작아지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개인 대 개인 간의 일 대 일 관계라고 생각한다.

 

2 장에서는 ‘나’와 나와 관계된 것들에 대해서 사색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무엇보다도 인간은 오직 순간을 살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가령 80세를 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한꺼번에 80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일초 일초를 살아 합계적으로 80 년을 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순간 순간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속담 속에는, “술집여자와 키스했으면, 반드시 자신의 잇빨을 세어 보아라”라는 것이 있다. 순간의 실수를 경계하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에게 이 순간의 철학은 대단히 강하다.

이 순간의 철학에서 그들의 환경순응론이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생각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 시대의 포로다. 그 시대에 태어난 인간은 누구가 그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을 거역하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유대민족이 그 장구한 세월동안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면서도 자신들의 존재를 말살당하지 않고 존속시킬 수 있었던 근본적인 삶의 철학이 된다. 그들은 가능한 그 시대 그 지역의 삶의 여건에 순응하기 위해 인내하면서 노력했던 것이다.

자신을 독단적으로 존재론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시대적인 흐름의 산물로서 파악한 것은 유대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의 근원적인 철학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관의 시각에서, 유대인들은 친구의 선택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은 가장 가까운 친구의 영향을 짙게 받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를 비판할 때는 아주 조심스러워야 하며 절대로 중상모략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에는 무심할 수 있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의 비난은 참을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된다고 한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고, 아이를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절간에서 일한 사람이나 수도원에서 일한 사람이 악인이 되기 어렵듯이, 술집이나 도박장에서 일한 사람이 선인이 되기 대단히 어렵다. 인간은 서로들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툼은 타인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자신의 불필요한 감정의 순간적인 폭발에 의해 야기된다. 자아는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나” 아니라, “우리”다.

이러한 자아관이 곧바로 유대민족의 단결력과 유래없는 그 민족성의 견고성을 야기한 근원적인 철학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 탈무드는 술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여호와가 아끼는 노아가, 악마의 유혹에 빠져 술을 마시더니, 사자처럼 사나와지고, 돼지처람 더러워지고, 원숭이처럼 소란을 피우게 되는 장면을 보이게 된다. 술은 자아와 타인과의 관계를 망가트리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주변의 평판을 대단히 중요시 한다. 평판이 나쁜 사람으로 지혜롭고 선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제3장에서는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사람은 절대적으로 결혼을 해야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신의 은총은 아내를 가진 자에게만 내려진다.

그리고 부부관계를 아주 성스러운 것으로 본다.

일주일 중 제7일을 안식일이라 하여 아무것도 일을 하지 않고 신을 경배하면서 집에 거주하기를 명하고 있다. 이것은 그날에 성스러운 부부관계를 가지라는 말이다. 유대교에서는 부부관계를 ‘기드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성스럽다’는 말이다.

이 성스러운 일은 자손을 퍼뜨리고, 어떤 방법보다도 효과적으로 긴장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여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남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생각이, 안식일에 성스러운 일을 하면서 여성을 만족하게 하는데는 세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성서의 <창세기>에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아주 중시하며, 탈무드에 옮겨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결혼이 성스러운 일이지만, 아울러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유대인들은 결혼하려는 젊은이들에게 다음을 주문하고 있다.

첫째, 이 결혼은 어머니와의 이별을 전제하고서라도 꼭 결행하고 싶은가 자문해보아야 한다.

질투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는데, 이것이 고부간에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도 단 한 사람의 남성과 단 한 사람의 여성이 사는 시대였지만 서로들 질투를 했다는 것이다.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신께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질투 때문에 이브가 매일 밤에 아담의 갈빗대 수효를 세어보았다는 말이 탈무드에 적혀 있다.

둘째, 이 여자와 살다보면 이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는가 자문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결혼만큼 실제와 달리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계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일 대 일 관계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면 두 사람의 진면목이 들어나 서로들 환멸을 느낄 가능성이 아주 많아지기 때문이다. 즉 포장되어져서 잘못알려진 환상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악한 면과 추한 면, 그리고 자아중심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열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자신의 아내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 쉽다는 탈무드의 구절이 있다. 아무리 아내라 하지만 그 한 사람의 내면세계와 성격을 잘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탈무드는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별의 편지를 쓸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여성에게 청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이혼을 인정하고 있다. 두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만 화합을 이루지 못할 때 서둘러 이혼할 것을 권유한다. 결혼은 소걸음으로 하고 이혼은 토끼걸음으로 하라고 말한다.

셋째, 유대인들에게는 탈무드의 이런 교훈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이혼이 적은 셈이다. 그것은 이렇게 중요한 결혼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혼이 적은 이유는, 탈무드에서는 먼저 아내를 맞이할 집을 장만하라고 명하고 있다. 다음에 포도를 가꿀 수 있는 포도밭을 일구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아내를 맞이하라는 것이다. 이 순서가 바뀌어도 안된다고 못박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을 환상적으로 보지 않고 현실적으로 보는 것이다. 현실적인 여건을 완전히 갖춘 후에야 아내를 맞이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혼이 적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는 기독교처럼 정신적인 생활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결혼생활을 영위하는데 실제적인 여건을 더 중시한다.

파탄되어 이혼에 이르는 가정은 대부분 자신의 책임을 가볍게 여기고 생활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혼생활을 원만하게 이끌어가는 것은 애정이 아니라, 얼마만큼 주어진 의무사항을 잘 지켜나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유대인들은 결혼생활을 시기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첫 3주간은 서로들 관찰하고

다음 석달 동안은 사랑에 불타고

다음 삼년은 서로들 싸우는데 보내고

다음 30년은 서로들 용서하는데 소비한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탈무드는 결혼생활에 있어서 사랑의 중용, 즉 절제를 명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인생경영을 중용으로 할 것을 주문하는 탈무드의 기본정신에 부합한다. 과도한 열정은 금방 열기를 식게할 염려와 아울러 전소해버릴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제 4 장에서는 가정과 가족에 대해서 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노예라든가 하인이라는 개념이 없다.

설혹 그런 신분의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신분의 사람이나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랍비나 똑같은 질의 술을 마시고 같은 반찬의 식사를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유대인들의 속담에는 ‘사람의 몸은 비누로 닦고, 사람의 마음은 눈물로 닦는다’는 말이 있다. 사람에게는 기쁨 슬픔 노여움 희망과 절망이 같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런 갖가지 인간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인간의 행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당의 한쪽 구석에는 눈물로 마음을 닦는 사람의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각각 자신의 인생을 수놓는 손님이라는 것이다. 이들을 극진하게 대접하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탈무드에는 아들에게 예절과 근면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아들이 도적이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아들게게 예절과 근면 그리고 자신의 금고를 잠글 수 있는 자물통과 열쇠를 간직하라는 명을 하고 있다. 자물통과 열쇠는 도적으로부터 자신만이 자신의 재물을 보호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그 금고의 열쇠가 없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열려고 한다.

탈무드는 어머니는 신이 창조하였다고 하였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사람은, 문고리가 없는 아이와 같다고 한다.

어느 어머니든지 어머니에게는 자신의 자식은 세상에서 가장 잘나 보인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아버지가 육친으로서의 의미보다도 교사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 교사와 아버지가 같이 감옥에 갇혔다면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 물으면 유대인들은 압도적으로 교사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답한다.

교사는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아버지와 교사를 구분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교사의 구실을 하라는 뜻이다.

자식이 성장하여 결혼하고 부모를 떠나감으로써 부모를 점차적으로 잊는 것은 부모의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탈무드는 가르치고 있다.

교사로서의 아버지의 권위는 스스로 교사이고자 하는 데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가 비바람 피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하고 식량을 구해오는 데서 만들여진다고 탈무드는 일깨우고 있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끝없이 배워야 하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50세, 60세, 70세가 되었다 하더라도 배울 것이 하늘처럼 많은 늙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은 유대교의 교리이다.

이런 어린아이들이 열심히 배우지 않으려고 하면 교사에게 큰 고통을 준다. 그러나 이들 어린아이들은 어느 순간에 훌쩍 자라난다. 그들이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났을 때, 그들은 부모들에게 고통은 덜 주지만 어느 순간 더욱 심각한 심통을 주게 된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이미 늙어버린 부모에게 경건한 존경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경노사상은 탈무드의 핵심 정신의 하나이다.

노년이 청년들에게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왕성한 활동을 하여야 한다. 어리석은 자에게 노년은 겨울이지만, 현자에게 노년은 황금기이다.

탈무드는 한 가정에 찾아온 손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손님과 생선은 사흘이 지나면 냄새가 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서 중용과 절제를 강조하는 탈무드는 남의 가정에 가서는 오래 머물기를 적극적으로 말리고 있는 것이다.

탈무드에는, 이 세상의 모든 갈대가 붓이고, 세상의 온 바다가 잉크이며, 그리고 온 세상사람들이 글을 쓸 줄 안다고 하더라도,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일년 동안 겪는 고통을 종이 위에 적을 수 없을 정도라는 말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사멸하지 않고 지금껏 존재하는 것은, 유대교의 규율을 엄격히 지켜왔기 때문이고, 유대인 다운 관습을 엄격히 지켜왔기 때문이다.

흔히들 유대인들은 올리브 나무에 비유된다. 올리브 나무는 누를수록 더많은 기름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제 5장에서는 지혜와 지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현자라고 한다. 그러나 부자는 돈만 많았지 지식과 지혜의 필요성을 모르는 자를 일컫는다.

사람은 자신이 행복한지 않은지를 잴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을 잃어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방법 말고는 자신의 행복 불행 여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율법의 종교인 유대교는 금하는 것도 많다.

음식도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 부지기 수로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돼지고기다.

하자만 탈무드의 명을 어기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면 안될 경우가 되면, 아주 유쾌하게 먹어라. 낙천적으로 사는 것은 곧바로 신을 경배하는 것이다.

인간이 지녀야 하는 가장 바람직한 지혜는 바로 친절과 겸허이다.

겸허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남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만을 내세우며 남과의 공존을 거부하면서 주변을 배려하지 않는 자는 가장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런 자세로는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제대로 된 자세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결점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은 타인의 결점을 찾지 않으며, 남의 결점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은 자기 결점을 찾지 못한다는 말이 탈무드에 적혀 있다.

탈무드에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취해 남들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라고 적은 것이 있다. 다들 현자가 아니기 때문에 겪게 되는 착각이다. 현자는 자신이 왜 친절해야 하며 왜 겸허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숫자 7과 유대인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주일 중 7일째는 안식일이다.

7년째 되는 날에는 땅을 갈지 않고 묵혀 쉬게 한다.

49년째되는 날에는 모든 채무가 무효로 돌아간다.

일년에 두 번 열리는 축제인 패스오버(출애급기념일)와 스코트(추수감사절)는 일주일간 계속된다.

회계연도나 학교의 시작연도도 모두 7월에 시작한다.

 

탈무드에는 인간은 강철보다 강하며 파리보다 더 약하다 라는 말이있다. 인간의 양면성을 지적한 것이다.

인간은 명성을 쌓고 부를 축적하면 자신도 모르게 오만스러워진다. 지혜를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여 지혜를 언제나 지녀야 한다.

잘익은 무거운 포도송이일수록 아래로 늘어진다. 오만에 떨어지지 않도록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 허리를 굽힐 줄 아는 사람이 곧바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탈무드에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 네가지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것은 금, 은, 철, 구리인데, 이것들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곧바로 ‘착한 사람’이다.

인간은 어디서건 공동체적의 삶을 산다. 자기 혼자만이 사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남과의 관계를 잘 이루어갈 수 있는 사람이 현자이다.

탈무드는 인간은 노력하는만큼 발전하는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람은 매일 다르게 태어남으로 결코 지금의 좋지 않은 여건에 좌절해서는 안된다. 내일 또다른 나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오늘의 걸끄러운 여건에 신경질적으로 대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곧바로 희망의 내일을 거부하는 것과도 같다.

인간이 현재의 여건에 만족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은 태생적으로 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수를 써도 다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생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실을 깨치는 자가 현자인데 그것은 오직 교육 즉 배움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므로 배움은 곧바로 신의 시킴이다. 여기에 저항하는 자른 가장 우둔한 사람이다.

탈무드에서 기도는 간단히 하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도는 인간이 신에게 하는 말이므로 간단명료해야 하며, 배움은 신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오래 오래 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책에서 지식을 얻지만, 가정에서는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가정 교육을 중요시 하는가를 알 수 있다.

AD 70년 유대인들이 로마군에게 깨어졌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교육이 잘못된 탓이었다고 믿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살아가면서 유대민족처럼 유머를 즐기는 민족도 없다. 유머와 기지, 해학은 유대민들의 전매특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유머를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가 너무나 성실과 율법을 강조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직되고 협소한 사고의 틀에 갇힐 가능성이 있음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우매의 틀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자신을 끊임없이 살피는 것은 지혜를 가지는 지름길이다.

현명하고 슬기롭다는 말은 자신이 어떤 어려운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그것을 직접 처리하는 사람의 능력을 말함이다.

탈무드는 세상에는 우둔한 자로 분리할 수밖에없는 세 가지 타잎의 인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첫째가 성급하게 화를 내는 사람

두 번째가 쉽게 용서하는 사람

세 번째가 너무 완고한 사람이다.

 

살아도 사는 맛이 없는 세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첫 번째가 남의 동정으로 사는 사람

두 번째가 아내에게 속박되어 사는 사람

세 번째가 항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탈무드는, 참으로 현자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울 줄 아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줄 아는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고,

남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자신의 가슴을 남을 칭찬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우는 사 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 6 장에서는 부와 금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속담에, ‘세상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일이 있는데, 첫째가 돈, 둘째가 돈, 셋째가 역시 돈이다’라는 것이다. 이 속담이 곧마로 유대인들이 얼마나 돈을 중시하는 가를 말하고 있다.

돈의 힘을 실로 막강하다. 돈 앞에서는 저주와 욕설도 잠잠해진다.

돈은 어떤 더러움도 씻어주는 비누와 같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물건들은 써본 뒤에 가치를 알 수 있지만, 돈은 자신이 직접 벌어보지 않으면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이 돈의 큰 특징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한결같은 돈의 찬양자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돈을 찬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독교도처럼 그것을 멸시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돈의 힘을 인정한다. 그 기본되는 이유는 돈은 인간으로 하여금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돈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돈에 대한 기본 입장이다.

유대인들은 기나 긴 2000 여년 유랑생활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압박과 고통을 강제당했다. 그들은 그들만이 살아가야 하는 제한지역으로 강제이송되기가 일수였으며, 걸핏하면 자신들이 터를 닦아 살고 있는 지역으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도처럼 돈을 죄악시하거나, 악의 씨앗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존경해 마지 않는 랍비의 설교보다도 단돈 10 달라를 더 중하게 여긴다.

돈만이 닫혀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장사를 하여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자신이 가진 물건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파는 것을 진정한 장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지 않는 것을 별로 필요로 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파는 것을 장사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철저하게 중개상인으로서의 체질과 기술을 터득했다. 유대인들이 세계 무역계와 금융계를 장악하게 된 동기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부자를 칭송하는 것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부자를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돈을 칭송하는 것이다.

필요한 돈을 빌리는 것은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같이 피상적인 임시방편이다. 돈을 빌릴 수 있다고 좋아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것을 갚을 때의 고통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부자에게는 상속인은 있지만, 진정한 자식은 없다는 말이 있다. 부자의 자식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부를 물려줄 사람으로만 알고, 자신을 낳아서 키워준 사람으로는 아는 정도는 약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자를 아버지로 알지 않고, 아버지가 가진 돈을 먼저 의식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육체는 욕망의 덩어리이므로, 육체에는 죄악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인간의 육체는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이므로 이를 귀하게 여겨야 하고, 육체는 스스로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여기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유대인들은 무엇이든지 중용을 취함으로써 어떤 위기의 대상도 자신의 절제와 중용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인생의 실제 현장에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인간의 육체도 돈도 얼마든지 그 위험성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며 실제 그것의 위험성을 억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인생의 어떤 면에서도 항상 지나쳐서는 안되는 유대교의 율법을 그들은 철저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탈무드의 어느 구석에서도 청빈함을 찬양하는 구절은 없다. 반대로 가난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구절은 너무나 많다. 그들에게는 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좋다는 철학이 가슴 깊이 간직되어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유대인들에게만 돈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서만 이자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의 가치를 인정하는 유대인들은 남의 돈을 공짜로 쓰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돈을 버는데는 아주 철저하다.

창부의 직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직업의 하나이다. 창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하면서 웃는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돈 버는데 얼마나 철저한가를 말해주는 탈무드의 한 구절이다. 돈의 가치를 철저하게 터득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연출할 수 없는 것이다.

유대경전은, 돈을 빌려줄 때는 필히 증인을 세우고, 적선을 할 때는 누구도 보지 않게 하라 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절약을 강조하여, 절약을 모르는 상인은 털이 나지 않은 양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털이 나지 않은 양은 외부기후에 대해 자신의 체온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제대로 생존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장사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 유대인들끼리의 협동심을 강조한다. 그들의 속담 중에는 ‘사람은 식사는 혼자할 수 있지만, 일을 절대로 혼자 할 수 없다’라는 것이 있는데 이 구절이 바로 이 사실을 말한다. 개 두마라가 모이면 사자를 죽일 수도 있다는 유대속담도 있다.

타인과의 관계가 중시되는 유대인 사회이고 보면, 탈무드에서 ‘물고기는 물이 없어지면 죽고, 사람은 예의범절이 없으면 죽는다“라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만하다.

 

제 7장은 침묵에 대해서 명령하고 있다.

 

탈무드에는 인간의 혀, 그리고 말을 하는 입에 대해서 많은 언급이 있다.

사람들은 입 밖으로 내보내는 말의 화를 많이 당하고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실제 행동에 의한 화보다 조금도 적지 않다.

탈무드는 먼저 사람의 혀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먼저 <모른다>라는 말에 익숙해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모른다고 자인하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며, 그것은 그가 지성적인 인간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행동과 이론은 언제나 다를 수 있다. 그럴 경우 언제나 행동이 한 사람의 일생을 조각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유대인은 매사에 호기심이 매우 많은 민족이다. 그래서 한 가지 일에도 수많은 말을 쏟아낸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은 대문이 없는 집과 같다.

탈무드는 유대민족의 강한 호기심으로 인해 한 사람이 일생 도저히 읽어낼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책자가 되고 말았다.

새장에서 도망친 새는 다시 잡을 수 있지만, 한 번 입 밖으로 나간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오만 가지 비밀은 마치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같이 도저히 오래 붙잡아둘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을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겐가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사람은 도저히 억제하지 못한다.

혀를 교육시키기는 대단히 어렵다.

아무리, 말조심 하라, 수다떨지 마라, 비밀을 엄수하라 고 다짐해도 혀는 금방 잊어 버린다. 낙천적이고 호기심 많은 삶을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속담에는 ‘혀에는 뼈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혀는 제2의 얼굴이다’라는 속담도 있다.

그리고 탈무드에는 언제나 귀를 혀보다 상석에 앉히라는 명령의 말이 있다.

듣는 것은 지혜를, 말하는 것은 뜻밖의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경우에는 침묵이 훨씬 나은 효과를 발할 때가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면전에서 칭찬해서는 안된다고 탈무드는 가르치고 있다. 사람을 칭찬하고자 할 때는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해야한다.

탈무드의 교훈 중에는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이 부지기수로 많다.

가령, ‘진실을 말하되 진실이라고 무조건 말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

가령 얼굴이 못생긴 여자에게 ‘참 못생겼군요’라고 진실을 말로 표현해서는 안되며,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인간의 병사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진실도 거짓말과 똑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면도날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유대인은 매우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적이다.

그들의 이런 점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나라가 없는 그들은 현실적이지 않으면 안되고, 이해타산적이지 않으면 당장의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삶의 지표로 삼고 있는 모세의 십계명도, 그것이 진리라기 보다도 지금 당장의 그들 자신의 생존을 가능케하는 생존전략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강하다.

어렵사리 주거가 허용되어 타민족 사이에 끼어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살인을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다거나, 옆집 여자와 간통에 빠진다면 절대적으로 그들의 주거와 생존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매우 현실적이며 이해타산적이기 때문에 기독교도처럼 추상적이고 애매한 도덕보다가는 율법에 의한 구체적인 인간행동지침을 정해서 교육이라는 방법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수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도덕관념이 높아서라기 보다도 그들의 절박한 생존전략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탈무드는 특히 인간의 혀를 조심하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남의 비밀이건 자신의 비밀이건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말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우월감에 젖어있기가 십상이며, 인간은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누구나 혼신의 힘을 다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남으로부터 따돌림당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비밀을 발설함으로써 인간 속으로 끼어들고자 하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유대인들에게 배움은 신에게 봉사하고 기도하는 것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그들 자신의 불완전한 여건에서의 생존전략이다. 그들은 남보다 더 많이 배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유전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서 천재가 유난스레 많은 이유이다.

남을 중상모략하는 것은 어떤 무기보다도 무서은 것이다. 화살은 보이는 곳까지만 쏠 수 있지만, 중상은 시간과 장소까지도 뛰어넘어 한 인간을 매장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중상모략으로 노한 사람의 마음을 끌 수 있는 방법은 좀처럼 없다고 탈무드는 가르치고 있다. 불타는 장작을 끌 수 있는 물줄기는 있지만 중상을 받은 사람의 노여움을 끌 수 있는 물줄기는 없다는 것이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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