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명박 대통령이 국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논란에 스스로 불을 지폈다. 청와대는 그동안 “아프간 파병은 정상회담 의제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이 대통령은 지난 20일 여야 대표 회동에서 한·미 정상 간 아프가니스탄 파병 관련 논의가 있었다고 공개했다./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이(李)대통령, 아프간 파병 관련
오바마와 '비공개 대화' 공개 논란
"국방부는 교관·공병 등 400여명선 은밀 검토"
이명박 대통령과 여야 대표 회동을 계기로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버락 오바마(Obama) 미국 대통령과 나눈 얘기를 소개한 것이 발단이 됐다.이 대통령은 20일 여야 대표들에게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정치현실에 비춰볼 때 (아프간에) 파병요구를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다만 한국 정부가 (파병을) 스스로 결정해주면 모르지만…'이라고 얘기하더라. 그래서 오히려 조금 미안했다"고 밝혔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간 파병을 요청했고, 이 대통령은 전투병력 파병은 불가능한 만큼 평화유지군(PKO) 방식의 파병을 고려한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즉각 "이 대통령은 '평화유지군'이란 말을 한 적이 없다. '전 정부 때의 평화사업과 재건사업을 조금 확장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을 뿐이다"고 반박했다.
청와대와 선진당 간의 엇갈린 설명은 대충 수습된 분위기지만, 정부 관계 부처에선 두 정상 간에 어떤 형태로든 아프간 파병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 자체에 난감해하는 분위기다. 양국이 모두 비공개로 진행했던 파병 논의가 우리 쪽에 의해 먼저 공개됐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한미 정상회담 직후 "아프간 파병 문제는 (정상회담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 않았다"고 했었으나, 21일에는 "파병에 대한 원론적 얘기는 오갔지만, 미국 쪽에서 매우 민감해하는 사안이어서 자세히 공개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상 한국에 대한 파병 요청이라고 외교가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스스로 결정해주면 모르지만…"이란 단서는 부시 행정부 때의 일방주의적 외교를 지양하는 오바마식 '외교적 수사(修辭)'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4월 초 2만1000명의 병력 증강 등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아프간 전략 구상'을 밝혔지만 동맹국들이 적극 참여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어 애를 태우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미국의 속내를 아는 우리 정부는 이미 미국측의 파병 요청에 대비한 대응책을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고위 소식통은 "그동안 한미 간 실무협의에서 아프간 파병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만약 파병을 하더라도 미국이 요청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 자발적으로 하는 형태로 하기로 정리가 됐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다만 시기는 한국 내 정치상황 등 여건을 고려해 가며 수면 위로 올리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국방부에선 정부의 파병 결정에 대비해 1개 대대(400여명선)급으로 교육훈련(교관)·공병·경계병력 위주의 파병 가능성을 은밀히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6·25 전쟁 이후 국제사회의 군사·비군사 지원의 혜택을 크게 본 우리로서는,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된 상황에서 국제 이슈에 적극 참여 안 할 명분이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한국은 지난 2002년 의료·공병 중심의 동의·다산부대(약 300명 규모)를 아프간에 파병했으나 2007년 탈레반의 한국인 인질사태를 겪으면서 그해 12월 전원 철수했다.
정부가 파병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기는 아직 불투명하다. 국내 정치상황을 고려해 공론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병 논의가 점화되면 야당과 좌파 시민단체의 반발로 정국 불안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정국을 살얼음판 걷듯이 지나온 정부로선 '제2의 촛불시위'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파병안을 통과시키려면 국회에서도 야당에 많은 양보를 해야 한다. 미디어법·금산분리법 등 여당의 중점 법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새로운 논란거리를 만드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