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직격탄' 김문수 경기도지사
"DJ, 북(北)주민 고통 침묵 박정희는 독재자지만 국가의 장래 내다봐"
"이념은 현실을 반영 현실 모습이 변했으니 이념도 바뀌는게 당연"
"민주당, 육식동물이지만 한나라는 초식동물 같아 웰빙정당 소리 들어서야"
"내가 말하는 게 상식 아닌가" 하고 김문수 경기지사는 말문을 열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상체를 똑바로 세우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는 편한 자세로 '상식'을 말할 수 없다는 듯이.
그의 발언은 연일 '뉴스'를 생산하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북한 도발 즉시 격퇴해 통일까지 이루는 강력 대응을 하자"고 해 시끄러웠다. 한때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두번이나 수감됐던 그의 젊은 날을 떠올렸다. 세월의 힘인가.
―이런 발언까지 하게 될 날이 올 줄 그때는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회주의 운동을 할 때도 북한을 동경한 적은 없다. 세습이나 독재 체제에는 생리적으로 반대였다. 처음부터 선을 그었다. 상대가 도발하는데 가만히 있는 게 상식인가. 침략을 못하도록 단호하고 강력한 대응을 하자는 것인데 북침통일론이라고 한다. 난 궁극적으로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바란다. 그게 헌법정신에도 맞다."
―정치적으로 보수 쪽을 의식한 발언은 아닌가?
"좌와 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좌우를 넘어 나라가 가는 방향을 나는 생각한다."
―교수 등 각계의 시국선언에 대해서도 "뭘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시국선언을 하는 사진을 보니 아는 얼굴들이었다. 내가 '운동'할 때 같이 했던 사람들이다. 그분들의 머릿속에 든 생각을 난 다 안다."
―왜 이들이 릴레이로 시국선언에 나선다고 보나?
"현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고, 이제 맹렬한 활동을 할 시기가 왔고, 조건이 성숙됐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오판이다. 이들은 '민주주의 후퇴' '독재'라고 주장하는데, 민주주의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막연히 '반(反)MB'로 정권을 흔들겠다는 것인데, 우리 사회의 전체 흐름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나서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지 말자.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그분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평생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왔다. '고속도로 반대' '수출입국 반대' 다 반대해왔다. 그런데 북한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분이 북한의 핵에 대해 침묵한다. 진정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면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의 신음에 대해 무슨 말씀을 했는지 듣고 싶다. 한쪽엔 과도한 비판을 하고 다른 쪽엔 침묵한다."
―얼마 전 강연에서는 "박정희 정권 시절 자동차 공장, 포항제철 설립,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한 것은 그때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고해성사'를 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독재자인 것은 틀림없다. 그 독재를 통해 근대화를 이뤘다. 국가의 앞날을 내다보았고 중요한 전략적 과제를 잘 택했다. 그걸 지속적이고 강력하게 추진해 지금의 기반을 만들었다."
―당시 정권에 맞서 데모하던 분이 어쩌다가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나?
"1987년 러시아와 동구권이 무너진 게 계기가 됐다. 그때는 감옥에 있었다. 충격이었다. 내가 매달려온 사회주의는 더 이상 내 길이 아니라는 걸 느꼈지만,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그는 1990년 이재오 등과 함께 '민중민주주의'를 내건 민중당을 만들었다. 현실에서는 실패했다. 그는 서울 구로동 노동인권회관에서 노동상담 일을 하다가, 1994년 민자당으로 갔다.
―하필 왜 민자당이었나?
"현실적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당시 강삼재 기획조정실장의 제의가 있었다. 김영삼 정권이 '하나회'도 숙청하고 국민들의 박수를 많이 받을 때였다. 주위 사람들과 상의해보니, 적어도 군사독재 청산과 자유민주주의 길을 여는 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민주당 사람들은 '왜 그쪽으로 들어갔나'고 비난했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은 민주당에 있어야 한다는, 독선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자기들에게 안 오면 '변절'이었다. 난 두 정당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봤다."
―현실에서의 잇단 실패가 결정적으로 이념을 바꾸게 한 것인가?
"마르크스 말처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면, 그런 점에서 맞다. 그때 나이는 들어가고 현실적으로 하는 것마다 깨졌다. 만약 현실에서 성공했다면 생각이 달랐을 것이다."
- ▲ 관사(官舍)에서 만난 김문수 지사는 “젊은 시절 극단적인 좌파였지만 그때 내 생각은 짧았다”고 말했다./이진한 기자magnum91@chosun.com
―인간의 일생에서 보면 젊은 시절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매달렸던 사회주의 가치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때까지 자신이 걸어온 삶을 부인하는 것이 아닐까.
"땅이 꺼지고 연옥(煉獄)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념보다 강하다. 이념은 현실의 '바다' 위에 떠있는 '파도'다. 현실이 정확히 드러난 마당에 '파도'는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학 시절(서울대 경영학과)에는 왜 그런 '현실'을 따라가지 않았나?
"현실은 인식해야 내 현실이 된다. 정보가 제한된 상태에서 학내분위기와 이념서클 선배들로 인해 현실을 보는 눈이 좁아진 것이다. 난 고3 때 '3선 개헌'에 반대하다가 무기정학을 받았지만, 그때는 이념에 물이 든 게 아니었다. 권력을 사유물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민주주의의 신념에 따른 것이다. 대학 2년부터 이념서클에 들어가면서 바뀌었다. 내 서클은 주로 '행동' 쪽이었고, 김근태 선배는 '이념'을 생산하는 쪽이었다."
―당시 민자당은 3당 합당으로 만들어졌고, 5·6공 세력들과 함께한 것이다.
"나를 잡아넣은 사람과도 같이 있었다. 처음 들어와서 갈등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이념적으로도 정리가 안 됐다. 나는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한나라당은 '영혼'이 없는 집단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어떤 영혼을 말하는가?
"안락한 봉급쟁이로서의 국회의원, 정치적 배지로서의 국회의원으로 지낼 것인지…. 여전히 '웰빙' 소리를 듣고 있다. 집권당이라면 우리 민족의 장래에 책임을 가장 많이 져야 한다. 그 역사적 소명이 무엇인지, 이 나라의 진로가 어떻게 돼야 하는지,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자기 성찰과 모색이 있어야 한다. 말과 실천으로, 조직으로, 혹은 이벤트를 통해 치열하게 헤쳐나가야 한다. 민주당 의원들이 '육식동물'이라면, 한나라당은 마치 '초식동물'이 모인 것 같다."
―한나라당은 당 쇄신과 친이와 친박계 갈등으로 시끄럽다. '한지붕 딴 방'이라고 비유한 적 있는데, 이럴 경우 이혼하는 게 옳다고 보나?
"부모가 이혼하면 남은 자식들이 문제다. 지금 어느 쪽도 이혼은 원치 않을 것이다."
―김 지사의 당내 지지기반은 어떤가?
"별로 없다."
―눈치도 융통성도 없어 정치에 부적합한 성격이라고 스스로 말한 적이 있다.
"나이가 드니까 모가 깎이긴 했지만, 쉽게 되지는 않는다. 타고난 근본이 있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 스타일에 대해 "우유부단한 것이 문제" "소심해졌다"고도 했다.
"경제·외교·국방에서 잘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리더십'이 약하다. 국회를 중시하고 야당도 라이벌도 중시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표의 경우, 경선이 끝났으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 큰 리더십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안 하겠다는 것인지, 당신의 위상을 잘못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불도저'가 아니라 오히려 겁이 많다고들 한다.
"가령 대운하 등 주요공약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당당하게 내세우고 비판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치다. 그런데 입장도 안 내세우고 비판에도 가만히 있다. 그러니 국민들은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리더십이란 당당하고 공명정대해야 한다. 작년 도심 촛불시위를 보니, 현 정권은 집권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소를 잡을 때 닭 잡는 칼을 쓰고, 닭을 잡을 때 소 칼로 대처한다. 권력을 잡고도 권력을 어떻게 쓰는지 그 기술을 모른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을 경영에 복귀시켜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과거 재벌에 맞서 노동운동을 하더니 이제 재벌 옹호까지 나서게 됐나?
"이건희 회장은 삼성반도체를 세계적인 대표기업으로 만들었다. 이런 분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게 맞나, 아니면 요즘 같은 경제 위기 때 구원투수로 나서는 게 맞나. 나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본다."
―젊은 시절에도 이처럼 재벌 기업에 대한 이해가 있었나?
"내가 노동운동을 할 때 저임금은 말할 것 없고 그 임금조차 제때 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그때는 기업인이 노동자를 수탈·착취하는 개념이었다. 지금은 어느 기업이 노동자를 천시하고 착취할 수 있나. 우리 사회 전체가 기업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지 않았나."
―그러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점거농성에 대해 어떻게 보나?
"길이 없고 어차피 끝장이니까, 이들이 저항하고 반발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불법이다. 그러나 아직은 기물파손과 거리투쟁의 불법까지는 가지 않았다."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쪽인가, 아니면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쪽인가?
"…크게는 법대로이지만, 민감한 사안이니 높은 수준의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전체적으로 잘 해결될 것으로 본다."
―김 지사가 공개적으로 사상 전향(轉向) 선언을 한 적이 없다고 일부 우파들은 의심한다.
"전향? 수백번이나 했다. 극단적인 좌파 생각에서 나는 많이 바뀌었다고. 아직 불신한다면 그건 내 숙명이다."
―골프를 안 친다고 들었다.
"골프를 안 쳐서 큰 정치인이 되겠느냐는 말도 들었다. 큰 정치인은 분수에 넘치고, 올바른 정치인이라도 되고 싶다. 골프를 안 치면 사교에 불편은 있다. 하지만 사교하는 것이 제일 좋은 정치라고 보지는 않는다."
부인과 함께 노동운동… 국회의원 3선 지내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 이듬해 청계천의 드레스 미싱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조운동을 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제적을 당했다. 그는 환경관리기사 등 국가기술자격증 8개를 땄다. 1986년 인천 5·3사태로 검거돼 2년5개월간 수감되는 등 두 차례 수감 경력이 있다.
1981년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설난영씨와 결혼했다. "만인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사람인데 한 여자를 못 살리겠느냐"며 결혼에 반대하는 처가 쪽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 뒤 노동운동을 하면서 생계를 위해 서울대 앞에서 '대학서점'을 열기도 했다. 당시 그 부근에서 이해찬은 '광장서점' 김부겸은 '백두서점'을 운영했다. 유시민과는 개인적으로 각별한 사이였지만, 지난 정권에서는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민자당에 입당해 경기도 부천 소사에서 15·16·17대의원을 거쳐 2006년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몇 달 전부터 택시운전사 자격증을 따 주말에는 영업용택시를 몰기도 한다.
그는 내년에 임기를 끝낸 뒤 차기 대선을 준비할 것인지를 놓고, "하반기쯤 결정하겠다"고 답변했다. 아직은 지지도가 2% 안팎이다. 그는 "내 인생이 여론조사에 따라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참고는 한다. 또 이인제, 손학규 전 지사의 실패도 참고자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