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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그놈들의 쓸데없는 분기탱천 ?

鶴山 徐 仁 2009. 5. 31. 10:36

august 의 軍史世界

 

그놈들의 쓸데없는 분기탱천 ?

 

 

 

전쟁이라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살상을 만들어내지만 이와 더불어 종종 필요이상의 학살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제2차 대전 당시의 독일, 일본, 소련 등은 전투로 인하여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살상 외에도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인류사에 용서받지 못할 대량학살 같은 범죄행위를 서스럼 없이 저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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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과 살상은 피할 수 없는 명제지만 필요이상의 학살도 자행됩니다 ]

 

그중 가장 악랄한 범죄행위를 주도한 집단 중 하나가 SS 라고 불린 나찌 친위대입니다.  원래 이놈들은 히틀러 경호를 위한 사조직으로 출발한 무장조직이었는데 수용소관리 및 학살 같은 악명 높은 테러 임무도 수행하였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무장친위대 Waffen SS 처럼 최대 90만 병력을 거느린 군대아닌 군대로 성장하여 전투에도 적극 뛰어들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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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찌의 무장친위대는 또 하나의 거대한 군사조직이었습니다 ]

 

제2차 대전 종전 후 친위대는 독일국방군 Wehrmacht 과 달리 전범을 일삼은 범죄조직으로 낙인찍혀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을 만큼 異論의 여지가 없을 만큼 나쁜 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놈들이 전투에 나섰을 때 감탄사가 나올 만큼 싸움하나는 기똥차게 잘하였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38개 사단까지 늘어났던 무장친위대 중 LSSAH, Das Reich 같은 부대들이 특히 그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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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식중인 토텐코프 소속 무장 친위대원들 ]

 

이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던 이유는 상부의 명령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격하였을 정도로 광신적이라 할 만큼 정신무장이 잘되었고, 평소 학살을 밥 먹듯이 자행하여 적을 사람이 아닌 살육의 대상으로만 보도록 내성을 키웠기 때문에 전투에 망설임이 없었으며, 여타 부대에 비해 우선하여 좋은 장비를 공급받았기 ( 특히 전쟁 말기로 갈수록 )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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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텐코프 같은 무장친위대 일부 부대의 전투력은 상당히 뛰어났습니다 ]

 

1939년 11월 1일 창설되어 이후 여러 차례의 부대개편을 거쳐 최종적으로 제3친위전차사단 ( SS Panzer Division ) 이 되었던 토텐코프 Totenkopf 도 그런 부대 중 하나였습니다.  인상적인 해골문양답게 적군포로, 유태인, 피점령지역민의 학살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악명도 높았지만 전투에 돌입해서는 미친 듯이 싸웠습니다.  이 부대를 탄생 때부터 이끌어온 사람은 나찌 중에서도 골수라 할 수 있는 에이케 ( Theodor Eicke 1892~1943 )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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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텐코프 사단장 에이케 ]

 

비록 에이케라는 인물은 룀 ( Ernst Rohm 1887~1934 ) 숙청사건처럼 나찌 정권의 창출당시부터 테러 행위의 행동책으로 깊숙이 참여하였고 이후 반인륜적인 유태인 수용소 업무도 관장하였을 만큼 두말할 필요 없는 악질 1급 전범이었지만 그가 통솔하였던 부대의 부하들로부터는 엄청난 충성을 받았을 만큼 전장에서 가장 선두에 서서 극렬하게 부대를 지휘하였던 정열적인 지휘관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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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케는 부대원들로부터 인기가 높았습니다 ( 전선을 시찰하는 모습 ) ]

 

예를 들어 1941년 겨울에 있었던 데미얀스크 Demyansk 전투에서 본인도 부상을 당하고 부대원의 70% 이상을 잃었을 정도였지만 거점을 끝까지 고수하여 독일 북부집단군이 소련의 포위망을 허물고 반격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였을 정도였고  ( 관련글 참조 ), 1943년 2월 유명한 제3차 하르코프 Kharkov 공방전에서는 독일이 놀라운 대승을 거두는데도 선봉장역할을 다하다가 생을 마감하였을 정도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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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르스크전투 당시의 토텐코프 ]

 

그런데 하르코프 전투에서 에이케가 전사한 것과 관련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943년 2월 26일 적진을 관측하기 위하여 사단장 에이케는 Fi-156 관측기를 타고 직접 적진정찰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저고도로 정찰하던 에이케의 정찰기는 소련의 대공포에 피격을 받아 적진 한가운데인 오리욜 Oryol 에 비행기가 추락하였고 이 사고로 에이케는 전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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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케가 정찰에 사용한 Fi-156 관측기 ]

 

그런데 사단장의 전사소식을 접한 토텐코프 친위대원들이 분기탱천하여 단지 사단장의 유해를 찾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선을 박차고 나가 적진으로 달려갔습니다.  의외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전선의 한축을 담당하던 토텐코프 사단전체가 움직이자 당황한 하우저 ( Paul Hausser 1880~1972 ) 친위기갑군단장은 회군을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눈이 뒤집힌 그들은 소련군의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을 뚫고 들어가 사단장의 유해를 찾아오는데 성공하였고 정식으로 장례식을 거쳐 매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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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장의 전사 소식을 듣고 사단 전체가 돌발적으로 움직였습니다 ]

 

기록에는 곧바로 유해를 찾았기 때문에 부대가 즉시 원위치하였고 이후 하르코프전투가 독일의 대승으로 끝났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넘어갔지만 유해 수색과정에서 적진으로 달려간 일부 부대원들의 손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부대원들의 이성을 잃은 행동 때문에 자칫하면 살얼음판 같던 전선이 어처구니없는 사유로 구멍이 날 수도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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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데없이 위험을 자초하는 행위를 용기라고 칭하기는 곤란한 것이 아닌지요 ? ]

 

결론적으로 토텐코프의 이런 무용담은 질책을 넘어 처벌을 받아야 할 만큼 우매한 행동입니다.  지휘관에 대한 부대원의 충성심도 전투력 제고에 중요한 요소이고 평소 부대원들을 그렇게 관리하여야 하지만 이것이 도를 넘어 작전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돌발적인 형태로 작용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직접 정찰을 나갈 정도로 열정적인 지휘관이었던 에이케도 아마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그의 부대원들을 분명히 나무랐을 것입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