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대 정권과 노동의 관계: 국가코포라티즘 이후 새로운 모색의 장정(長程)
정병기 『진보평론』 제38호(2008년 겨울), 201~226쪽 1. 머리말 노동법적으로 노동조합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ㆍ개선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ㆍ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1)를 말한다. 여기에서 “주로 정치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는 제외된다(동법 제2조 4항 마호). 따라서 노동조합의 목적은 근로조건의 개선을 주요 목표로 하고 그밖에 근로자의 처지와 관련되는 경제적ㆍ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로” 정치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제외될 뿐, 실제 현실에서 정치적 조건들은 근로자의 처지및 그 경제적ㆍ사회적 지위 향상과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전개는 정치적 투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으며 실질적으로도 그러하다. 특히 의회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나라일수록 직접적인 근로조건의 변화조차 정치적 갈등으로 현상하며 그 노사갈등에 정부가 깊숙하게 개입한다. 노정관계 역시 이러한 현상을 간과해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특히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 과정을 밟아온 한국의 경우, 노사관계는 오히려 노정관계를 통해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제나 국가경제와 관련된 사항이 아닌 한, 노사 자율교섭이 보장되는 범위에서 정부가 조정자로 개입하는 의회민주주의 국가들과 달리 한국 노동문제는 노동자와 사용자의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와 정부의 관계를 통해 더 크게 규정되어왔다. 노동문제에서 정치의 역할이 중요했던 만큼 한국의 노정관계를 연구한 문헌들은 물론 적지 않다. 노동법의 변천을 추적하면서 노정관계를 파악한 법학 연구들과 ‘노동체제’나 노동정책을 연구한 정치학ㆍ사회학 문헌들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러나 노동법 연구들은 법적 범주 내에 머물러 정치적 역학관계나 노동운동의 움직임에 소홀했다.2) 그리고 정치ㆍ사회학 문헌들은 ‘노동체제’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등 노정간의 관계를 깊이있게 다루기는 했으나 역대 정부들을 포괄하는 장기적 관점이 아니라 개별 정권3)이나 한두 정권에 국한해서 다룬 것들이 대부분이다.4) 따라서 이 글은 노동운동의 전개와 정부의 노동정책을 노정간의 갈등을 통해 분석하고 이를 유형화함으로써 향후 노정관계와 노동문제의 전망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무엇보다 이 글의 핵심 목표는 역대 정권의 노동정책을 분석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분석을 통해 노정관계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대 정부를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보다는 노정관계의 특성에 맞추어 유사한 정권들을 묶어 시기별로 구분하여 고찰하는 것이 더 유용할 것이다. 그래서 글의 순서는 먼저 주요 시기구분과 분석틀을 설명하고 각 시기별로 분석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2. 시기구분과 분석틀 분석을 위한 시기는, 노동운동의 발전과 정권의 성격을 기준으로 크게 ‘노정관계의 정초(定礎) 모색 시기’와 ‘통제ㆍ동원ㆍ저항의 시기’ 및 ‘전환과 새로운 모색의 시기’라는 세 단계로 구분한다. 구체적으로, 해방 이후 근대적 노사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1961년까지를 정초의 모색기로 보고,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1987년까지를 개발독재에 의한 노동 통제와 동원 및 그에 저항하는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시기로 규정하며, 민주화 시기인 1987년 이후 2007년까지를 노정관계의 전환과 새로운 모색기로 구분한다. 정부 수립 이전의 미군정기와 제2공화국의 짧은 시기는 노동문제와 관련해서 정초 모색이라는 의미에서는 다른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별도의 시기로 구분하지 않고 첫 번째 시기에 포함시켜 간략히 언급하는 데 그친다. 통제ㆍ동원ㆍ저항의 시기는 1972년 유신정권 등장을 기점으로 보다 강화된 통제로 다시 구분하며, 이 시기를 국가코포라티즘의 시기로 규정한다. 또한 전환과 새로운 모색기는 민주화에 맞는 새로운 노정관계로 전환하는 시기인 1987~1997년과 노사정위원회를 도입해 사회코포라티즘을 시도하는 새로운 모색기인 1997년 이후로 구분한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를 표방하고 실제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했으므로 노동문제와 관련해 자본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노정관계를 분석의 대상으로 하지만 자본의 역할을 잠정적으로나마 염두에 둘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노사정 삼자관계를 토대로 하여 노정관계를 고찰한다. 또한 개발독재 시기의 노동정책이 역사적으로 국가코포라티즘과 가장 유사하며 김대중 정권 이후로는 사회코포라티즘적 시도를 해왔다. 그러므로 코포라티즘의 관점에서 노정관계의 구체적인 변화를 고찰할 것이다. 또한 한국은 산업화 단계를 압축적으로 거쳐 민주화를 이룩한 국가이며,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경제 문제가 가장 큰 정치ㆍ사회적 관심사로 남아 있다. 이른바 ‘지속적인 산업화 비상 질서’(PINO: Permanente Indutrielle Notstands-Ordnung; Link 2002 참조) 체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업화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정치ㆍ경제적 질서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을 노정관계의 주요 배경으로 하여 정치ㆍ산업ㆍ경제적 조건을 살펴본다. 또한 노정관계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하므로 자본의 흐름도 역시 이 배경 속에서 함께 고찰할 것이다.5) 궁극적으로 노정관계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노동운동의 발전도 중요한 축의 하나이므로 노동운동의 주요 범주를 둘러싼 노정간의 갈등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체적인 분석 요소는 단체교섭과 노동쟁의, 정치ㆍ사회적 협약의 발전, 노동조합의 정체성이다. 단체교섭과 노동쟁의는 노조의 주요 요구사항과 정부의 정책 및 노동계 요구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고, 정치ㆍ사회협약의 발전은 노조의 정치ㆍ사회적 요구와 이에 대한 정부의 정책과 대응을 고찰하며, 노동조합의 정체성은 노동조합운동의 기조와 정부의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과 정책 및 대응을 분석할 것이다. 이때 정치ㆍ사회협약의 발전은 국가코포라티즘 시기에는 중요한 분석의제가 되지 않으며 민주화 이후 새로운 노정관계 모색기에서 사회코포라티즘 시도와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노동조합의 정체성은 노동조합의 이념노선과 자기 규정성, 그리고 파트너성 인정 같은 정부의 노동조합관을 의미한다.
3. 노정관계의 정초 모색: 1945~1961 해방 정국의 몇 해는 변혁지향적 사회주의 노조로서 정치투쟁의 병행을 주장하는 정치주의적 전평과, 노사간 친선과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반공과 정부의존성(‘어용’)을 띠는 대한노총의 대립으로 각인되었다(김성중 1993, 61~62).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은 조선민주청년동맹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양대세력으로 1945년 11월에 건설되어 1947년 미군정의 전국적 탄압에 의해 지하로 잡입했다가 1948년 5월 총파업 이후 소멸되었으며, 대한노총은 전평에 대항하는 우익조직으로 미군정에 의해 1946년 3월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으로 결성되어 1948년 8월 임시전국대의원대회에서 대한노동총연맹으로 개명하였다(이원보 2005, 99~130 참조). 이와 같이 해방정국의 노동진영은 좌우대립 속에서 각자 새로운 노사관계와 노정관계를 정초하려고 다투었으며, 그 결과는 전평의 소멸과 대한노총의 합법적 전국조직화로 결판났다. 전평은 최저임금제 확립, 14세 미만의 아동노동 금지, 부인노동자의 산전산후 2개월 유급휴가제 실시 등을 주장하며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대중조직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가 파괴당했으며, 대한노총은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합법화되고 대한노총 위원장 전진한이 초대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임명되는 등 정부의 동원조직으로 기능하였다. 1949년 말 대한노총은 683개 단위노조와 12만 8천명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 단체협약을 체결한 노조는 2개에 불과하였다(이원보 2005, 144~145). 그렇지만 이후 대한노총은 전진한 위원장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갈등하면서 노조의 역할을 일정하게 수행하기도 했고, 사업장 단위에서는 굵직한 노동쟁의들이 일어났다. 대한노총은 철도연맹과 조선전업노조 건설을 지원했으며, 전쟁 중인 1951년 12월과 1952년 2월에도 각각 부산조선방직 쟁의와 석탄공사 산하 광산노동자들의 쟁의가 있었고, 1952년 7월에는 부산 부두노동자 파업이 일어났다. 그 결과가 1953년 휴전 직후 최초로 한국 노사관계를 제도화한 노동관계법의 제정이었다. 노동관계법은 기업별 노조체계에 토대를 두기는 하지만 노조의 자유설립주의를 보장하고 협약자치를 최대한 존중하는 등 집단적 노사관계의 원칙에 비교적 충실한 법이었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의 노사관계와 근로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사용자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개별적 노사관계가 지배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 법의 실효성은 기대하기 어려워 명목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김성중 1993, 49). 노동쟁의는 이후에도 절대적으로는 낮은 수준이었지만 개별 사업장 단위로는 꾸준히 확대되어 1953년 9건에서 1959년 95건으로 증가했으며, 참가인원은 각각 같은 해 2,271명에서 49,813명으로 증가하였다(김낙중 1982, 186~189). 노조와 조합원의 수도 꾸준히 증가하여, 노조 수는 1955년 562개에서 1959년 558개로 확대되었고 같은 기간 조합원 수는 205,511명에서 280,438명으로 늘어났다(이원보 2005, 149).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전근대적인 후견주의적 동원을 가미한 배제로 나타났다(손호철 2006, 216~222).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남미와 달리 한국전쟁과 농지개혁을 통해 반대 세력이 몰락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노동자들과 연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곧 이승만 정권은 대한노총이 지원한 철도연맹과 조선전업노조에 대해서조차 이 분야 종사자들이 공무원 혹은 준공무원이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다른 부문의 노동쟁의와 마찬가지로 탄압하다가, 정권 창출 기여도와 반공 기조를 명확히 확인한 후에야 시혜적으로 승인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노총에 반대하고 정부로부터 벗어나려는 전국적인 움직임은 1950년대 말에야 가능했다(이원보 2005, 160~161). 대한방직 같은 대구 지역 사업장에서 ‘대한노총 경북지구’와 별도로 ‘대구지구 노동조합연맹’을 만들고 이를 모체로 하여 1959년 10월 대한노총에 대항하는 조직체로서 전국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결성되었다. 전국노협은 대한노총의 파벌싸움과 관계있는 간부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하지만 정부의존적(‘어용’)이 아닌 민주노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대한노총과 자유당 정권의 억압 아래에서 활동을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고 4ㆍ19혁명 이후에 비로소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4ㆍ19혁명 이후 민주화 시기에는 노조민주화투쟁, 조직확대와 전문지식인 노조 결성, 노동쟁의 격화라는 세 가지 방향으로 노동투쟁이 발전했다. 대한노총도 이승만 정권과 결별을 선언하고 전국노협과 통합 논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다시 단절되었다. 해방 이후 5ㆍ16군사쿠데타 이전까지의 시기는 정파노조가 파괴되고 통합노조로 전환된 시기였으며 일반노조주의가 약화되고 조합원노조주의가 사실상 실천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전체의 대표로서 노동자 일반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일반노조주의와, 조합원들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대변하는 조합원노조주의가 대당개념이라면, 정치적ㆍ종교적ㆍ이데올로기적으로 정파성을 띠는 정파노조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며 조직 내에 다양한 정파들을 포괄하는 통합노조가 대당개념이다. 사회주의 정파노조인 전평과 그에 대항하는 반공적 자유주의 정파노조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 소멸하거나 변하고 노동조합주의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대한노동총연맹이 유일한 합법조직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노동자 전체를 단일한 계급 혹은 사회집단으로 세우려는 움직임도 사라지고 노조와 조합원의 직접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흐름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조합원노조주의로 행동하는 대한노동총연맹은 강령상으로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기는 하지만 더 엄밀히 말하면 모든 정파를 아우르는 통합노조라기보다는 정파성 자체를 배제하고 정부에 의존하는 이른바 ‘어용’노조로서 반공을 국시로 받드는 또 다른 의미의 정파성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노정관계는 전근대적 후견주의로써 어용노조를 동원하고 정부와 사용자로부터 독립적인 ‘민주’노조를 배제시키는 후견주의적 배제를 특징으로 한다. 해방정국 몇 년 동안 이어진 정파노조들간 노정관계 정초 싸움이 반공ㆍ어용적인 명목상 통합노조의 승리로 귀결되어갔지만 전반적으로는 대한노총 내의 갈등이 상존함으로써 정초 모색이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통제와 동원 및 저항: 1961~1987 1961년 5ㆍ16군사쿠데타 이후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한국 정치는 국가주도의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추진하는 개발독재형 파시즘 통치로 유지되었다. 더욱이 이 파시즘적 통치는 1972년부터 더욱 강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서유럽의 파시즘 체제가 평화적 방법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노동자들을 일정하게 포섭하는 정책으로 시작된 것과 달리 한국의 개발독재 파시즘은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민중들의 다수인 노동자를 포섭할 수 없었다. 더욱이 분단 상황에서 반공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함으로써 포섭이 배제된 통제 위주의 국가코포라티즘(최장집 1988; 손호철 2006)으로 나타났다. 이때 국가코포라티즘은 “전체주의적 국가정당의 통치전략이자 파시즘 체제의 운영 원리와 과정”(정병기 2004, 329)을 말하지만, 서유럽의 초기 파시즘 체제와는 달리 통제위주의 동원체제를 의미한다. 즉, 개발독재 파시즘은 전체주의적 국가정당으로서 산업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철저히 규제하고 통제하는 강제적 동원기제를 처음부터 사용했다. 노동의 측면에서 국가코포라티즘은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 외에도 국가가 인정하고 승인하는 단일한 노동자대표기구를 통해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통제하는 특징을 갖는다.
1) 국가코포라티즘: 1961~1972 군사쿠데타 후 군사정권은 노조를 해산하고 중앙집권적인 산별노조를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반공주의와 정치적 중립원칙을 기본방향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과거와 다를 바 없었지만, 통제에 보다 유용한 형태의 산별노조체계를 도입하고 복수노조를 금지하여 ‘노동자들에 의한 노동자 통제’를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노조의 재건은 처음부터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김성중 1993, 49~50; 박승두 1996, 243~245). 1961년 8월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하여 노조의 허가주의를 규정한 후 군사혁명정부가 직접 각 산별노조의 조직책임자를 지명하고 한국노동단체재건조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에 따라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15개 산별노조를 건설하고 한국노총(한국노동조합총연맹)을 설립했다. 그러나 전국노협을 비롯한 저항 세력들은 이에 반대해 전국노동단체재조직연락위원회(연락위원회)를 구성해 민주노조의 재건을 시도했으며 1963년에도 한국노총결성대회의 무효소송을 제기하고 한국노동조합총연합회(한국노련) 결성준비위원회를 설립해 저항했다. 그러나 정부는 1963년 개정 노동조합법에 따라 주요 인물들을 모두 체포했고, 한국노총 내에도 독자적인 정당세력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으나 역시 탄압으로 무산되었다. 1963년에 개정된 노동관계법은 노동조합 설립 허가주의, 행정관청의 노동조합 해산 및 결의의 취소 변경 명령권, 노동조합 정치활동 금지, 복수노조 설립 금지, 노동위원회 공익위원 증원, 노사협의회 설치, 공익사업의 범위 확대, 노동쟁의 사전 적법판정제도, 노동쟁의에 관한 긴급조정권 등을 규정해 통제에 초점을 두었다(이원보 2005, 177~178). 그리고 이러한 통제는 1970년 ‘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개정된 노동관계법에 따르면, 산별노조는 무늬만 있을 뿐, 조합원의 참여를 쟁의행위 가부투표에 한정하고 모두 간접선거와 대의제도로 규정하여 중앙집권적 조직체계를 강제했으며 단체교섭은 사실상 기업별로 분산된 체계로 구성되었다. 한편,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은 임금노동자 수의 급증을 가져와 노동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이원보 2005, 179, 194~196). 1963년 상시 임금노동자는 93만 4천 명(전체 취업자 12.2%)에서 1971년 147만 8천 명(전체 취업자의 23.0%)으로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전체노동자 수도 241만 2천 명(전체 취업자의 31.5%)에서 395만 5천 명(전체 취업자의 39.3%)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법 개악과 지속적인 탄압은 단위사업장에서는 의도된 통제와 달리 단체교섭과 쟁의의 확산을 통해 저항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1964년 철도노조의 생활급 확보 쟁의, 1965년 외기노조의 노동조건 개선 쟁의, 동신화학 노동자들의 권리확보 투쟁, 1967년 광산노동자ㆍ전남제사ㆍ심도직물ㆍ동양기계의 휴폐업반대ㆍ노조결성보장요구ㆍ인금인상요구, 1968년 외국인투자기업 쟁의, 대한조선공사 파업, 1969년 대한조선공사 쟁의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와 같이 당시의 단체교섭은 기본적인 요구인 임금인상 외에도 통제에 저항하는 권리확보도 주장하였다. 이처럼 제3공화국의 노정관계는 국가코포라티즘에 의한 엄혹한 통제와 강제된 동원으로 진행되었으며, 상급노조의 차원에서는 반공주의와 노사협조주의를 기조로 하여 어용과 순치로 일관하였으나 그러한 가운데에도 단위 사업장에서는 저항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 시기가 끝날 무렵에 세계 유가파동과 경제위기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 신화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노동운동은 1970년 전태일의 분신 이후 한국노총 중심의 노조운동에 반성이 촉구되었다. 1972년 유신정권의 등장은 이러한 정치ㆍ사회ㆍ경제적 위기에 대한 정권의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강화된 국가코포라티즘: 1972~1987 1970년대 산업화의 중점은 종전의 노동집약적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닉슨 독트린으로 상징되는 주한미군 철수에 대응해 자주국방을 이루기 위한 조치이자, 경제개발의 대가인 외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를 위해 박정희 정권은 외국자본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수출자유지역 같은 투자자유지역을 설치했다. 그에 따라 제3공화국 시기의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직접투자 유치를 추구함으로써 종속적 산업화를 초래한 “중화학공업화를 통한 수입대체의 심화”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손호철 2006, 227), 이러한 정책은 전두환 정권 때에도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박정희 정권은 소시민적 민족주의를 재가동시키는 한편, 1970년대 초반의 전반적인 위기상황에 대처하고자 1971년 12월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이듬해 ‘10월 유신’을 발표함으로써 국가코포라티즘 통제를 강화했다. 그에 따라 노동관계법도 더욱 통제적으로 바뀌었는데(박승두 1996, 248), 특히 ‘공익사업 노동자’의 범위를 확대하고 이들의 노동3권을 심각하게 제약하였다. 또한 산별체계를 포기하고 기업별체계를 입법정책적으로 유도하고 노사협의회를 더욱 체계화하여 기업별노조의 대체 경쟁세력으로 만들며 사업장 차원에서 협조적 노사관계를 진작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한번 물꼬가 터진 노동운동의 저항도 더욱 거세져 갔다(신광영 1994, 204~206 참조). 1969년 12.1%였던 노조조직률은 1979년에 16.8%로 상승하였고 같은 기간 조합원 수도 41만 3천 명에서 108만 8천 명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을 뿐 아니라, 1961년을 제외하면 1960년대 내내 매년 20회 이하에 머물렀던 노사분규 수가 유신정권 내내 해마다 100회를 상회했고 1975년에는 133회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1970년대에는 노조의 노동쟁의 외에 지식인과 종교의 노동운동 지원과 참여가 확산되었으며, 자연발생적 미조직노동자들의 투쟁이 함께 이루어지면서 변혁적 노동운동이 다시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미조직노동자들의 자발적 투쟁은 민주노조운동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원풍모방, 인천동일방직, 반도상사, YH무역, 콘트롤데이타, 청계피복 등의 싸움이 1970년대 노동운동의 대표적 양상이었다. 제5공화국의 노동정책 기조도 유신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초기에는 오히려 더 강화된 통제를 보이기도 했다. 1980년 하반기 ‘노동조합 정화조치’와 노동관계법 개정으로 노동운동 탄압의 강도를 높였던 것이다(이원보 2005, 272~273). 우선, 노조 정화조치를 통해 한국노총과 산별노조 상층을 지배해온 어용 간부들조차 축출하고 지역지부를 해체했으며, 197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해온 민주노조들을 파괴했다. 노동법을 한층 더 개악하여 기업별체계를 공식적으로 강제하고, 제3자 개입을 금지하며, 조합설립에 필요한 최소인원수를 규정하고, 노조임원의 자격을 제한하는 등 노조설립을 위한 파격적인 조항들을 신설하였으며 임금가이드라인을 도입했다. 또한 노사협의회법 제정으로 노사협의회 설치를 강제하고 노조활동을 정권안보 위협으로 규정하여 치안유지 차원에서 제약하기 위해 노동대책회의를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블랙리스트를 활용해 노조활동가들의 취업을 금지시켰다. 그런 한편, 과거의 다른 정부들처럼 정부의 통제를 따르는 한국노총 간부들은 국회의원, 장ㆍ차관 등으로 임명하고 한국노총에 재정을 지원했다. 이러한 신군부의 탄압으로, 1980년 한때 407건에 달하던 노사분규가 1981년에는 186건으로 급감했고 1982년과 1983년에는 각각 88건과 98건으로 다시 하락했으며, 조합원 수도 다시 1백만 명 이하로 감소했고, 노조조직률도 14% 대로 떨어져 1987년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해 1986년에는 12.3%에 불과했다(신광영 1994, 204~6).6) 1983년 말부터 1984년 중반까지 일정기간 유화국면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1984년 9월부터는 다시 탄압국면으로 전환했다. 제5공화국의 단체교섭과 노동쟁의는 기업별 노사관계의 강제와 전국적 탄압 및 한국노총의 국가코포라티즘적 역할로 인해 상급노조 차원의 노동운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상급노조의 전국적 운동이 형성되지 못한 틈새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지역노동운동과 변혁적 노동운동으로 성장해갔다(이원보 2005, 313). 19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7)가 결성되어 노동운동의 주체성과 통일성 및 연대성을 위한 새로운 노동운동을 추구하는 공개기구로 주목받게 된 것을 필두로 하여, 1985년에는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노투),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연합(구민연), 서울노동자연대투쟁연합, 안양지역 노동3권쟁취위원회(안양3권위), 성남노동자생존권확보투쟁위원회, 인천의 노동3권쟁취위원회 등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 중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연합, 서울노동자연대투쟁연합 등은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했고, 1986년에도 인천지역노동자복지협의회와 노동3권쟁취위원회와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을 결성했다. 이와 같이 유신정권과 제5공화국의 노정관계는 통제의 측면이 더욱 강화된 국가코포라티즘의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통제와 배제의 측면이 강화된 저편에서 저항도 함께 강화되었으며, 그 저항의 특징은 한국노총이라는 국가코포라티즘 기제와는 별개로 지역노동운동과 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새로운 민주노조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1987년 민주화를 생산영역으로 확장’(노중기 2007b, 129)한 7~9월 노동자대투쟁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1987년 민주화 운동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1987년 10월의 노동법 개정으로 이어져 노조 설립과 파업의 자유가 인정되고 최저임금제의 도입 등을 통해 근로조건의 기준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개정 법안도 제3자개입 금지 조항, 공익사업의 직권중재 조항 등 위헌 시비가 있었던 쟁점조항들을 존치시키고 복수노조 금지 조항은 오히려 강화하여 여전히 미봉책에 그쳤다. 결국 노동문제 개혁과 노정관계의 새로운 모색은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적인 과제로 남게 되었다.
5. 노정관계의 전환과 새로운 모색: 1987~2007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노조의 합법화 외에 노정관계에 있어 특히 중요한 변화는 김영삼 정부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와 김대중ㆍ노무현정부의 노사정위원회 시도이다. 정부의 공식 언급에도 등장하듯이 이 기구들은 사회코포라티즘적 시도로 회자되고 학계에서도 그에 관한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이 기구들을 사회코포라티즘적 시도로 보기에는 한국의 여건과 기구의 내용이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사회코포라티즘은, 강력하나 전체주의적이지 않은 국가와, 수와 기능이 한정되고 구조화된(총체적으로 통제되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은) 이해관계집단(사회단체)이 존재하고, 이 이해관계집단이 국가의 일부로 기능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Wiarda 1997, 7; 정병기 2004, 330~331). 그리고 사회코포라티즘은 주요 당사자인 노동과 자본 간에 타협을 통해 장기적 이익을 고려하는 정치적 교환(Pizzorno 1978)이 이루어져야 가능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필요하다(김인춘 2002, 175~176 참조): ① 단위노조와 기업 및 노동과 자본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노사 양측에 권위 있고 중앙집권화된 포괄적 정상조직이 존재해야 하고, ② 협상이 가능할 수 있을 만큼 노동의 정상조직과 자본의 정상조직간 일정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며, ③ 양자의 협약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중재하고 협약 준수를 보장하며 협약에 따르는 단기적 희생을 복지 및 사회안전망 등 사회정책을 통해 보상해줄 수 있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④ 그러한 구체적 국가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으로 ‘친근로자적 국민정당’8)이 집권해야 하며, ⑤ 마지막으로 양보와 타협의 문화가 정착된 합의 민주주의가 발전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한국에는 아직 사회코포라티즘이 정착될 만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굳이 사회코포라티즘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노사정위원회는 유사 사회코포라티즘 기구에 불과하며, 민주화 직후의 시기인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은 그러한 시도에조차 미치지 못한 전환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곧, 민주화 이후 전반적 변화와 맞물려 노정관계의 전환과 모색이 새롭게 이루어져온 1987년 이후 시기의 공통된 특징은 아직 어떠한 형태의 노정관계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 ‘1987년 체제’: 1987~1997 ‘1987년 체제’는 임영일(1997, 1998a), 노중기(1997)의 입장에 따라 1987년 이후 10년간의 체제를 과도기적 성격에 주목하여 파악하기 위해 차용한 개념이다. 즉, 임영일(2003, 24)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정한 자본축적 체제에 조응하여 형성되는 노동통제, 노동시장 그리고 노동운동의 특정한 유형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구성되는 포괄적인 계급(정치)관계”라고 ‘노동체제’9)를 정의하고 1987년 이후 10년간의 체제를 이러한 노동체제의 전환기로 규정했다. 즉 ‘1987년 체제’에서 과거 ‘억압적 국가조합주의’ 체제에 비해 미미하나마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체제는 노사간 일정한 힘의 균형을 이루기는 했으나 정치적ㆍ사회경제적으로 노동자 권리가 확보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단히 불안정한 과도기적 체제”(정영태 2005, 52)에 불과했다(정병기 2007, 44). 1987년 민주화 이후 출범한 노태우 정권은 아직 명실상부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아니었다. 노태우 정권의 성격은 제5공화국 파시즘 체제의 핵심을 유지한 채 정치적 민주주의 형식들이 대폭 가미된 “이완된 파시즘체제”로 규정할 수 있다(김세균 1997a, 276~277). 과거 파시즘 체제의 핵심 세력들이 여전히 국가권력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고, 국가보안법 체계가 온존해 있으며, 국가의 물리적 폭력장치들이 사실상 국민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초법적 기구로 군림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한 규정을 뒷받침한다. 그에 따라 노태우 정권의 노동정책은 민주노조운동을 인정하되 ‘경제적 조합주의’ 또는 ‘노동조합주의적’ 노동운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물론 이러한 성격은 정권 수립 초기에는 강압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국민들의 민주적 요구의 분출이 여전히 강력했고 3저호황이라는 유례없는 물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 초기에는 ‘분배와 균형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면서 임금가이드라인 철폐, 최저임금제 실시, 임금채권 최우선 변제제도 신설, 변형근로시간제 폐지, 근로기준법 적용대상 확대, 국민주 보급, 종업원지주제, 주택조합 및 주택마련 지원제도, 사내복지 기금제도, 기숙사 등 복지시설의 확충, 노동조합의 장학사업 지원 등을 실시했다(김세균 1997a, 280). 이로써 국가의 노동정책은 기존의 국가코포라티즘적 통제정책으로부터 적어도 기업수준의 노조운동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탈정치화된 노사협조주의 노조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법적-경제주의적 정책’으로 변모하였다(김세균 1995, 427~428). 그러나 1988년 말까지 지속된 3저 호황국면이 끝나고 노동자들의 요구가 ‘이완된 파시즘체제’의 수용 범위를 넘어서자 탄압국면으로 돌아섰다. 곧, 1988년 말에 풍산금속과 모토롤라 사업장 등에 공권력을 투입하고, 1989년 서울지하철노조와 현대중공업 노조의 쟁의를 강제 진압했으며 임금가이드라인을 부활시켰다. 정부는 여전히 자율적 노사교섭과 쟁의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민주노조운동의 합법화도 사실상 거부했다. 정부의 노동정책은 초법적-강압적 성격에서 법적-경제적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통제의 측면이 강했었던 것이다. 이러한 ‘법적-경제주의적 통제정책’은 김영삼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물론 김영삼 정부를 노태우 정부와 같은 파시즘 체제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완전히 전환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때문에 노태우 정부를 ‘이완된 파시즘 체제’라고 한다면, 김영삼 정부를 위해서는 ‘파시즘적 자유민주주의 체제’(김세균 1997b, 294)라는 다소 모순적 개념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노동정책에서 나타나는 차이도 이러한 수준을 넘지 못한다. 김영삼 정부도 역시 집권 초기에는 새로운 노사관계의 정착과 노동복지의 증대를 핵심으로 하는 <‘신경제 5개년 계획’ 노사관계 재정립(안)>이라는 개혁정책을 내놓았다. 그 내용은 기업에 대한 규제완화와 노동배제 정책의 개혁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다(인수범 1996, 42~43). 실제 노동부는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의 사실상 사문화’, ‘해고자 전원 복직’, ‘전노협 합법화’, ‘무노동 부분임금’, ‘경영권ㆍ인사권 참여 인정’ 등 개혁적 방침을 제시했다. 그러나 1993년 후반기부터는 노태우 정권 후반의 노동통제전략을 그대로 답습하여, 1993년 현대그룹 쟁의에 강경하게 대응하고 노동법 개정 방침을 철회했으며, 1994년에는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에 공권력을 투입해 탄압했고, 1995년에는 한국통신노조에 대해 억압적으로 대응했다(인수범 1996, 43). 한편, 김영삼 정부는 정치경제적 배경의 특수성으로 인해 민주노조운동 진영과의 격돌이 불가피했다. OECD 가입과 더불어 ILO 권유에 따라 노사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압력을 받은 정부가 1996년에는 민주노총까지 포함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수립해 사회적 합의를 통한 개혁을 시도한 것은 사회코포라티즘 시도에 대한 관심을 틔우기도 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개정을 핵심으로 하는 정부의 시도는 노동계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그에 따라 정부와 의회는 1996년 말에 이를 기습통과시키기까지 했다. 결국 이러한 조치는 1996/97년 총파업을 야기했고 노정관계는 극단적 대립으로 치달았다. 다른 한편 이 극단적 대립에는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성장이 크게 작용했다.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전평 이후 최초의 전국적 상급단체로 건설되어 민주노조운동을 이끌었으며 정부의 물리적 탄압 속에서도 1995년 업종별회의와 통합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물론 전노협도 결성된 후 곧 정부의 탄압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자본의 신경영전략으로 현장권력이 약화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1995년 통합 건설된 민주노총은 1996/97년 총파업을 계기로 실체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민주노총은 변혁지향적 민주노조로서 사회개혁 투쟁을 임금인상 투쟁과 결합해 중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등 전국중앙조직으로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노동자정당의 설립에도 주체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민주화와 변혁적 움직임 속에서 한국노총도 과거의 어용성을 탈피하고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정부와 직접 관계를 갖기보다 선거과정에 개입해 정당과 연계를 시도했고 이후에는 독자적인 정당설립도 시도했다(최영기 외 2001, 543~548 참조). 그러나 여전히 보수정당들과 연계를 시도하거나 노사협조주의적 정당 설립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어용성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또 다른 형태의 정파노조 지형이 시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럽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지형이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변혁적ㆍ사회주의적 정파노조와 실용적 개량주의 정파노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곧, 체제 전환기인 ‘1987년 체제’에서 노정관계는 두 정파노조로 분리된 독립적 노동파트너와 자유민주주의적 정부의 관계로 이행하고 있었다.
2) 유사 사회코포라티즘: 1997~2007 1997년 이후는 ‘1987년 체제’라는 과도기가 끝나 새로운 노정관계의 정립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노정관계는 정부의 시도와는 달리 사회코포라티즘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아직까지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사회코포라티즘의 요건들이 대부분 갖추어지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의 집권이라는 요건이 갖추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기 집권당의 성격은 사민주의 정당 같은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국민정당의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정치ㆍ경제적 배경 면에서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1998년 이후에는 신자유주의가 공세를 취하면서 ‘1987년 체제’조차 노동자들에게 더욱 불리한 형태로 전환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지극히 미미한 수준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조차 다시 후퇴했으며, 핵심노동자와 주변부노동자의 분리라는 특징이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절반 이상의 노동자가 민주화의 이름으로 민주화 이전 세상을 살아가는 역설”이 생겨났다(노중기 2007b, 126). 이러한 역설은 IMF 관리체제에 따라 외부로부터 강제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성격 자체에 기인하기도 한다. 김대중 정부의 국정 철학은 공개적으로 미국형 모델을 선택하여 세계화 전략을 추진했고, 결국 세계체제적 위상과 관련해 한국을 ‘종속적 신자유주의’로 몰고가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손호철 1999, 172). 이러한 선택은 노동정책에도 그래도 구현되었으며 노무현 정부에게까지 이어졌다. 사실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1998년에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노사정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999년에는 전교조와 민주노총이 합법화되는 등 단결권이 확대되고 정치적 자유도 신장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은 전국적인 연대투쟁을 계속했으나 정부의 개입은 과거와 달리 전면화되지 않았고 특정 사업장에 대한 제한된 통제에 주력했으며, 2000년 상반기에는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양보조치도 병행되었다. 또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여타 사회보장제도의 신설과 적용을 확대하는 생산적 복지 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명백히 야누스적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이면에는 종속적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는 노동배제전략이 자리하고 있었다(노중기 2007a, 88). 다시 말해 제한적 개입과 양보정책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위한 보조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은 정리해고제 도입과 민영화에 있었다. 특히 노동기본권 보장이 이행되지 않은 채 정리해고와 파견노동자제도가 신속히 법제화되어 노동계가 배제됨으로써 1998년 9월에 이미 노사정위는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그해 12월에는 결국 민주노총이 노사정위를 탈퇴하였다(노중기 2007a, 76). 노무현 정부도 출범 당시에 12대 국정과제 가운데 하나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축’을 노동정책 기조로 천명하고, 이를 위한 정책과제로 ‘중층적 구조의 사회적 파트너십 형성‘을 제시했다. 곧 전국-산업-기업을 잇는 중층적 노사관계 구축을 시도함으로써 과거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김유선 2006, 24). 복지정책에서도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를 효율적으로 이어가되 더욱 효율적인 맞춤형 복지라는 참여복지를 주장하면서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사회통합적 노동시장정책이 병행되지 못함으로써 결국 김대중 정부의 전철을 밝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으로 귀결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5월 노사정위의 합의없이 독자적으로 ‘노사관계제도 선진화위원회’를 구성한 뒤 9월에 서둘러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여 교섭창구 단일화 의무를 강제했다(김유선 2006, 27). 뿐만 아니라 이미 그해 8월 2차 화물연대 파업을 강제 진압하고 구속과 수배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되풀이함으로써 이 선진화방안이 개혁과는 거리가 먼 새로운 노동통제정책이 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했다. 결국 9월에 발표된 이 방안은 ‘사용자 대항권’이라는 새로운 법조항을 대폭 도입해 노동쟁의를 법제도적으로 봉쇄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노중기 2006, 6). 2004년 2월에는 노사정위에서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협약도 총선을 염두에 둔 일시적 양보의 혐의가 짙었으며 상황은 이미 정책입안과 결정의 중심이 서서히 노사정위에서 노동부로 넘어오고 있던 국면이었다. 게다가 대통령 탄핵정국이 거의 지나간 2004년 하반기에 정부는 지하철노조 연대파업, GS칼텍스노조 파업, 코오롱노조 파업을 강경 진압했고 공무원노조 특별법을 통해 6급 이하 공무원으로 노조 가입을 제한하고 단체교섭 의제에 심각한 제한을 가하며 단체행동을 금지했다(노중기 2006, 7). 결국 이후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은 초기의 ‘사회통합적 노사관계’에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전환되었다(조돈문 2005). 이후 노무현 정부의 노정관계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는데, 이것은 일정기간 동안 한국노총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는 사회적 합의 시도를 궁극적으로 중단하지는 않아서 2004년 초 이후 노사정위는 노사정대표자회의로 확대되어 중단과 속개를 되풀이했으며 2006년에는 로드맵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그러나 이 노사정 교섭은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공회의소, 노사정위원회, 노동부 5자의 합의로 끝났으며, 그것은 민주노총 배제라는 절차적 문제 외에도 복수노조 금지 폐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다시 3년 유예함으로써 내용적으로 선진화 방안의 이름을 무색케 했다(노중기 2006, 9). 게다가 2006년부터 시작된 한미FTA 추진은 정부와 민주노총의 첨예한 대립으로 귀결되었다. 정치와 노동의 측면에서 노무현 정부 시기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민주노총을 중요한 사회적 토대로 하는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했다는 것이다(2000년 창당, 2004년 국회 진출). 그에 따라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 맞설 수 있는 주요 동맹군을 확보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노동문제에 있어 열린우리당은 종속적 신자유주의 정책과 배치되는 정책까지 수용하지는 않았다. 한미FTA와 비정규직 법안 통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민한 노동정책에서 열린우리당은 민주노총뿐 아니라 민주노동당과도 동맹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사회코포라티즘의 두 요건인 노자간 힘의 일정한 균형과 포괄적 정상조직의 존재는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에 따라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나머지 세 요건들은 갖추어지지 못함으로써, 한국의 사회코포라티즘은 유사물에 머물렀고 그것조차 종속적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보조정책으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의 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국내외 자본들로부터 정부의 상대적 자율성이 약했으며, 노사정간 사회적 양보와 타협의 문화가 정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6. 맺음말 한국의 역대 정권과 노동의 관계는, 통제가 때로는 강화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약화되어 왔고 그에 대항하는 노동의 움직임이 전평 소멸 이후 다시금 끊임없이 강화되는 양상을 띠어 왔다. 정치적으로 한국은 권위주의 독재에서 개발독재 파시즘으로 억압체제가 강화되다가 민주화 이후 점차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으며, 산업ㆍ경제적으로 산업화를 거쳐 OECD에 가입하는 등 성장을 지속해오면서 복지정책도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치ㆍ산업ㆍ경제적 배경에서 역대 정권과 노동의 관계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수입대체 산업화를 추진하던 권위주의 정부였던 이승만 정부와 그 앞뒤의 시기는 정파노조가 파괴되고 통합노조로 전환된 시기였으며 일반노조주의가 약화되고 조합원노조주의가 사실상 실천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사실상 조합원노조주의로 행동하는 대한노총은 현실적으로는 정부에 의존하는 이른바 ‘어용’노조로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또 다른 의미의 정파성을 띠었으며, 전국노협 결성 등 통합노조 지형내 갈등은 상존했다. 이 시기에는 해방정국 몇 년 동안 이어진 정파노조들간 싸움이 반공ㆍ어용적인 명목상 통합노조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전반적인 노정관계는 여전히 지속적인 정초 모색 과정이었다. 제3공화국 박정희 정권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에 중점을 둔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추진한 개발독재 파시즘 정부로서 국가코포라티즘에 의한 엄혹한 통제와 강제된 동원을 특징으로 한다. 상급노조 차원에서는 반공주의와 노사협조주의를 기조로 하는 한국노총이 어용과 순치로 일관하였지만, 단위 사업장에서는 저항이 이어졌다. 특히 1970년대에 박정희 제4공화국과 전두환 제5공화국은 중화학 중심의 종속적 수입대체 산업화까지 추진하는 강화된 개발독재 파시즘 체제로서 역시 강화된 국가코포라티즘을 통해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강제 동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 속에서 노동운동의 저항은 오히려 더 거세졌으며 변혁지향적 민주노조운동을 태동시켰다. 곧, 이 시기 노정관계의 성격은 통제와 동원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저항이 강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화 직후 시기인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은 각각 이완된 파시즘 체제와 파시즘적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서, 종속적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과도기였다. 민주화의 영향으로 변혁적 민주노조가 성장했고 한국노총도 개혁을 통해 어용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실용적 개량주의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또 다른 형태의 정파노조 지형이 형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 가서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한층 더 발전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발돋움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종속적 신자유주의로 전환을 완성하고 사회경제적 복지정책을 시도했다. 노조진영에서는 변혁적 정파노조인 민주노총과 실용적 개량주의 정파노조인 한국노총이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으며,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을 통해 정당세력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시기에 노정관계는 ‘1987년 체제’라는 과도기를 지나 사회코포라티즘을 추구했지만 정치사회적 여건의 미비로 유사물에 그쳤으며 그러한 시도도 종속적 신자유주의의 보조물로 추진되었음이 드러났다. 한국의 노정관계는 어용성을 탈각한 정파노조 지형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보인다. 그러나 유사 사회코포라티즘에서 보인 것처럼 정부는 변혁적 정파노조를 종종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한나라당이 집권한 현재 그것은 더욱 요원해 보인다. 이와 같이 아직 한국의 노정관계는 정치경제적 배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상태로서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채 긴 모색의 장정(長程)을 남겨두고 있다. 이 장정의 끝은 노자간 힘관계뿐만 아니라 노정간 힘관계에도 달려 있다. 정치경제적 배경도 주시해야 하지만 노자간ㆍ노정간 힘관계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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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제정 1997.3.13 법률 제5310호, 일부개정 2008.3.28 법률 제9041호), 제2조 4항. 2) 한국노동연구원의 경우는 문무기ㆍ윤문희(2007), 문무기 외(2006), 한국노동연구원 편(2005) 등과 같이 노동문제에 초점을 둔 연구들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노동현장의 문제나 개별 노동조건과 직접 관련된 주제들만을 심도 있게 다루었을 뿐, 노정간 역학관계에 초점을 두지 않았다. 다만 노동법을 둘러싼 노정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노동법 개론서들이 노동법 제ㆍ개정을 둘러싼 갈등을 단편적으로 소개하는 수준이었다. 3) 정권과 정부의 개념은 엄격히 다르지만(무엇보다 정권은 정부와 의회 및 사법부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지만), 이 글은 정권과 정부의 개념적 구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국 역사에서 대부분 그래왔지만 특히 노동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의회 및 사법부가 대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여소야대 상황에서 나타나는 갈등이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혹은 정부와 사법부의 갈등이 있을 수 있고 또 예외적인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정부만을 정권으로 간주한다. 4) 김세균(1992), 노중기(1997, 2006, 2007a), 임영일(1997, 1998a, 1998b, 2003), 김유선(2006), 인수범(1996) 등이 대표적이다. 그밖에 민주화 이후 각 정부 초기의 노동정책을 다룬 것은 시기적 한계를 이유로 언급하지 않았으며, 노동운동사를 기술한 역사학 문헌들도 노정관계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므로 제외했다. 5) 그러나 자본의 흐름은 이 글의 직접 분석대상이 아니므로 필요한 부분에서 한정적으로만 언급할 것이다. 6) 조합원 수는 1983년에 다시 101만 명으로 상승해 이듬해까지 증가추세를 보였다. 이것은 1983년 말부터 이듬해 중반까지 단기간 유화국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률은 민주화 시기까지 다시 상승하지 않았는데, 신광영(1994, 204)에 따르면 그것은 신규 취업자들이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신규 취업자들은 기존 취업자들보다 탄압에 대한 저항민감도가 낮다고 볼 수 있다. 7) 1989년 한국민주노동자연합으로 개칭하여 이후 노동법개정운동을 주도했다. 8) 노동자 계급정당(classparty)은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해 자본주의를 전복하고자 하므로 근본적으로는 코포라티즘적 합의체계를 거부한다. 반면 국민정당(Volkspartei)은 특정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표방하는 정당이다. 따라서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은 ‘근로자’(계급적 함의를 담고 있는 ‘노동자’란 개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의 입장을 대변하지만 계급화해와 국민통합에 기여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정당이다. 유럽의 국민정당화된 사민주의 정당이 대표적인 예이다. 9) 노동체제 개념에 대해서는 이종래 2005, 38~56쪽을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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