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문화재로는 국보 1점 과 보물 7점이 있다.
홍화문(보물 제384호)
창경궁의 정문으로 성종15년(1484)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때
불에 타고 현재의 문은 광해군8년(1616)에 다시 세운 것이다.
명정문(보물 제385호)
명정전을 둘러싼 월랑 중 명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동월랑의 중앙부에 있으며,
창경궁의 외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명정문(2)
옥천교(보물 제 386호)
옥천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다.
궁궐의 정전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궁궐의 정문과
정전의 정문 사이를 흐르게 한 금천을 건너게 된다.
이 다리는 1483년 조성되었다.
옥천교(2)
명정전(국보 제226호)
창경궁의 정전으로 조선 9대 성종때 건축되었으며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임금이 신하들의 하례를 받거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명정전 현판
일월오악도
일월도(日月圖)·일월오봉산도(日月五峰山圖)·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고도 한다.
비교적 큰 규모로 궁궐 어좌 뒤,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모신 진전(眞殿)이
혼전(魂殿) 등에도 비치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항간에서도 일종의 장식화로 민화의
범주에서 그려지기도 하였다. 화면의 대부분을 점하는 다섯 개의 큰 봉우리와 그
아래 소나무·폭포·파도, 상단 좌우에 해와 달을 포치시켜 좌우균형을 갖춘 그림이다.
숭문당(1)
숭문당(2)
이 건물은 조선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을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양화당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춘당지
춘당지는 1909년에 조성된 원지(苑池)이다.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다.
춘당지(2)
춘당지(3)
춘당지(4)
춘당지(5)
환경전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익종이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경춘전
창경궁의 내전으로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다.
식물원
함인정
21대 영조는 특히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함
주목
문정전
문정전은 창경궁 창건 때 편전으로 건립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명정전과 함께 중건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