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총통의 소방수 [ 6 ]

鶴山 徐 仁 2008. 7. 15. 15:46

august 의 軍史世界

 

총통의 소방수 [ 6 ]

 

 

 

공세적 방어

 

모델이 지휘하여 르제프에서 이룬 놀라운 승리는 잠정적 패배를 공세적인 방어로 반전시켜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만큼 대단한 전과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패배가 확실해 보였고 이런 암울한 예상에 구데리안, 폰 보크, 회프너 같은 명장들이 동조하여 히틀러에게 후퇴를 건의하였을 정도였는데 이를 승리로 이끈 모델의 지휘력은 그만큼 훌륭하였던 것이었습니다.

 

6-1[6].jpg

[ 작전을 숙의하는 모델 (左) ]

 

august는 이 전투를 스탈린그라드전투와 비교하고 싶은데 비록 제9군이 완벽한 포위를 당하지 않아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되었던 제6군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곤란하지만 상황은 상당히 유사하였습니다.  우선 르제프를 중심으로 소련에게 반 포위된 독일군은 제9군 외에 제4군, 제4기갑군 일부를 포함하여 약 25만에 달하였는데 이는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되었던 독일군 33만과 맞먹는 규모였습니다.

 

6-2_Rzhev.jpg

[ 르제프전투는 스탈린그라드전투와 맞먹는 엄청난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

 

소련은 르제프 공략을 위해 3개 집단군 예하 18개 야전군의 약 150만 명을 동원하였는데 이 또한 스탈린그라드의 Operation Uranus 때 소련이 동원한 25개 야전군으로 구성 된 4개 집단군의 200여만 병력과 비슷하였습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길이길이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반하여 제1차 르제프공방전은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독일에서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6-3[2].jpg

[ 그런데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잊혀 진 전투로 기록됩니다 ]

 

그 이유는 첫째, 독일 측 입장에서 볼 때 제1차 르제프 공방전과 비교 할 수 있는 아니 오히려 이를 능가하는 수많은 승리를 이미 경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르제프전투는 적극적 방어를 통한 소극적 승리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소련군을 괴멸시켰지만 전선을 1941년 겨울이 오기 전의 모스크바 공세수준 직전까지 돌려놓지는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6-4[1].jpg

[ 르제프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전선은 고착화되었습니다 ]

 

당시까지만 해도 독-소전 중 소련에게 대패를 당할 번 한 상황에 놓였었다는 자체가 독일 위정자들이나 군부지도자에게는 치욕스런 일이었고 당연히 독일의 패배나 후퇴라는 것이 용인되거나 있을 수도 또한 있어서도 안 돼는 분위기였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놀라운 방어전이 의외로 빛을 발하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6-5_Russian_POW.jpg

[ 놀라운 승리만 경험하였던 독일에게 피 말리는 방어전 자체가 치욕이었습니다
( 독소전 초기 독일에게 생포된 소련군 포로 ) ]

 

소련의 경우는 더한데 그 이유는 압도적 병력으로 공세를 펼쳤으면서도 엄청난 패배를 하였다는 사실자체가 치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소련은 고의로 내용을 감추고자 하였는데 이 전투에 대한 사료가 상당히 부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일부로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알았지만 소련연방의 해체 후 밝혀진 자료에도 그 내용이 명백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6-6[1].jpg

[ 치욕스런 결과를 소련은 애써 은폐하였습니다 ]

 

소련은 이 전투로 약 65만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추정되는데 반하여, 방어자였던 독일은 30만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전투 결과는 6개월 후 스탈린그라드에서 반면교사가 되었는데 독일은 자만을 하여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아 자멸의 길로 빠져들었고, 소련은 철저한 준비를 통하여 회심의 승리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6-7[2].jpg

[ 총통의 소방수라는 찬사를 얻은 모델 ( 손을 들고 있는 이 ) ]

 

모델은 이 전투결과 방어전의 대가, 총통의 소방수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음과 동시에 대장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그 승진속도가 독일군내에서 최고로 빠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히틀러가 동부전선에서의 후퇴를 용인한 1943년까지 제9군사령관으로 이 지역을 훌륭히 방어하여 냈고 그 공로로 오크 잎 기사십자 ( Swords to the Oak Leaves of the Knight's Cross )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