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의 軍史世界
총통의 소방수 [ 5 ]
총통의 명을 받들어
위기를 느낀 독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폰 보크는 전선을 축소하여 부대를 재편한 후 일단 겨울을 넘기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히틀러에게 전략적 후퇴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의견에는 최 일선에서 부대를 지휘하여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스트라우스, 회프너, 구데리안 같은 예하 야전군 사령관들도 대부분 동조하였습니다.
[ 전략적 후퇴를 건의한 중부집단군 사령관 폰 보크 ]
그러나 모스크바를 코앞에 두고 후퇴한다는 사실을 용납 할 수 없었던 히틀러는 노발대발하며 이들 지휘관들을 해임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대답을 합니다. 히틀러의 주장은 오로지 현지사수였습니다. 히틀러는 가장 위험에 쳐해 있던 제9군 사령관으로 평소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던 모델을 승진시켜 임명하였고 현지로 부임시킵니다.
[ 모델 (左) 이 히틀러의 낙점을 받아 독일 9군 사령관으로 영전합니다 ]
1942년 1월 15일 스트라우스를 대신하여 사령관으로 부임한 모델은 도착하자마자 전선의 상황부터 시찰하였는데 상황이 상당히 나쁘다는 것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선봉인 제22, 29, 39군이 배후 100Km 까지 치고 들어왔음에도 그들도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 독일 9군에 대한 완전한 포위망이 완성되지 못하자 깊이 파고들어 온 소련군도 진퇴양난의 형국이 되었습니다 ]
비록 제9군이 반 이상은 포위당하고 현실은 암울해 보였지만 공세를 펼치고 있던 소련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진격 한 달 만에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소련 또한 50년만의 혹한이라는 1941년 겨울날씨가 커다란 장애물이었는데, 혹한으로 인하여 르제프를 외곽에서 포위하기 위해 멀리 진군하였던 소련군의 보급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던 것이었습니다.
[ 소련군도 혹한으로 인하여 보급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
히틀러의 옹고집으로 독일 제9군이 어쩔 수 없이 현지를 사수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되었지만 혹한의 기온은 동시에 소련 제22, 29, 39군 뿐만 아니라 르제프 남부에서 진격하던 소련 제5, 20, 33군의 선봉부대들도 더 이상 전진을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직시한 모델은 히틀러에게 현지를 사수 하겠다고 보고합니다.
[ 모델은 현지를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총통에게 보입니다 ]
모델로부터 보고를 접한 히틀러는 대단히 흡족하여 제9군을 지원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고 배후의 통로를 확보한 제4군과 제4기갑군에게 최대한의 협조를 하라고 명령합니다. 악몽 같은 겨울이 서서히 끝나가기 시작하자 소련의 공격이 재개되었는데 이때는 제9군도 돌파를 허용하지 못할 만큼 참호를 깊이 파두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 겨울이 끝나가자 소련의 공격이 재개되었지만 진격이 어려웠습니다 ]
1942년 4월까지 장장 100여 일간 계속된 소련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제9군은 끄떡없이 현지를 사수하였고 이제 급해진 것은 소련군이 되었습니다. 독일 제9군을 완전히 포위하지도 못하였고 그렇다고 이를 무시하고 앞으로 더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르제프 남부에서는 제4기갑군과 제4군의 반격으로 소련은 점점 밀려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 르제프를 공격하였던 소련군은 일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
7월 2일 드디어 제9군은 참호를 박차고 나와 지난 6개월 내내 르제프를 압박하던 소련 칼리닌집단군의 제22, 29, 39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 Operation Seydlitz ) 그와 더불어 반대편에 있던 제3기갑군이 협공을 가하였고 7월 12일이 되자 르제프를 포위하기 위해 남하하였던 소련군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