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총통의 소방수 [ 4 ]

鶴山 徐 仁 2008. 7. 12. 20:15

august 의 軍史世界

 

총통의 소방수 [ 4 ]

 

 

 

독일의 失期와 소련의 반격

 

바바로사 작전 초기, 신나는 진격만 계속하던 독일은 당시에는 몰랐지만 몇 번의 실기를 하게 됩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그랬다는 것이지 그 선택의 결과가 이후 전쟁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전의 여러 에피소드에서도 몇 번 언급하였지만 독일은 진격도중 스몰렌스크 Smolensk, 민스크 Minsk , 키에프 Kiev 등지에서 대 포위섬멸전을 독일은 실시하여 무려 200만 이상의 소련군을 제거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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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소전 최초 3개월은 일방적인 독일의 승리였습니다 ]

 

그런데 이런 승리는 애초 소련 침공이전 준비한데로 진격을 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엄명에 전략적 후퇴를 하지 못하여 독일군 점령지역내 고립되어 이미 전의를 크게 상실한 소련군 패잔병을 소탕한 것에 불과합니다.  히틀러는 물밖에 튀어나와 서서히 죽어가던 고기를 잡고자 너무 서둘렀고 임기응변으로 주력을 우회시키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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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을 소탕하는데 독일은 몰입합니다 ]

 

배후에 적을 남겨두고 전진한다는 것이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특히 키에프 공략을 위해 독일의 중부집단군 주력이 우회진격 하였던 것이 반드시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었다라는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사가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우회공략으로 애초 목표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같은 전략적 목표물을 점령하는데 시간을 지연시키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대부분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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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속에 반쯤 들어온 키에프를 완전히 소화시키고자 독일은 주력을 우회시킵니다 ]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도 그러하였지만 쓰나미같은 진격이 한번 멈추고 전선이 고착화 되면 이를 차후에 돌파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더구나 계절은 상대적으로 소련에게 유리한 동절기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겨울에 러시아 평원을 정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라는 역사의 교훈을 잠시 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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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진격이 둔화된 틈을 타서 소련의 방어선이 강화됩니다 ]

 

소련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군을 고립시킨 후 즉시 포위 섬멸전을 실시하지 않고 일단 전선을 분리하여 전선을 서쪽으로 계속 몰아붙여 고립지역과 전선의 간격을 넓힘으로써 스스로 말라죽게 만들었던 예에서 보듯이 ( 관련글 참조 ) 독소전 초기 독일도 고립 되어 어차피 천천히 소탕해도 되는 적을 굳이 서둘러 섬멸하기 위해 주력의 방향을 틀어 시간과 자원을 낭비한 것은 결국 독소전 초기 독일의 자충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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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독일 제6군 ]

 

결국 혹한이 다가오고 모스크바 바로 앞에서 진격이 멈추자 정신없이 몰리기만 하였던 소련은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1941년 12월 6일 소련군은 모스크바를 압박하는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취합니다.  이른바 제1차 르제프 전투 ( The 1st Rzhev Battles ) 가 개시 된 것이었고 소련은 모스크바 전방에 포진한 독일 제9군을 대 포위 섬멸하기 위해 르제프, 시쵸프카 Sychevka, 브야즈마 Vyazma 를 탈취하기 위한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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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은 동장군의 엄호 하에 독소전 최초의 선제 반격에 나섭니다 ]

 

먼저 그동안 모스크바 북부를 방어하던 코네프 ( Ivan S. Konev 1897~1973 ) 지휘하의 칼리닌집단군쿠로츠킨 ( Pavel A. Kurochkin 1900~1989 )북서집단군 소속의 9개 야전군이 비테브스크 Vitebsk 와 스몰렌스크 북방을 향하여 전진을 개시하고 맹장 주코프가 지휘하는 서부집단군 예하 9개 야전군이 모스크바 남부에서 스몰렌스크와 브리얀스크 Bryansk 를 향하여 대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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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계전투와 관련하여 소련은 상대적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좋았습니다 ]

 

이러한 대공세는 독소전쟁 개시이후 소련에서 취한 최초의 공세였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모스크바를 향해 돌진하던 폰 보크 ( Fedor von Bock 1880~1945 ) 의 독일 중부집단군을 최대한 멀리 밀어내고 아울러 레닌그라드를 압박하던 폰 레브 ( Wilhelm Ritter von Leeb 1876~1956 ) 지휘하의 독일 북부집단군과의 연결을 끓어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중 목표는 앞서 언급한대로 르제프에 방어선을 펼치고 있던 스트라우스 ( Adolf Strauss 1879~1973 ) 의 독일 제9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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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의 맹공에 독일 9군은 고립됩니다 ]

 

소련의 선봉인 제22군제39군이 100Km를 전진하여 비테브스크 근처까지 내려오고 소련 제3공수군브야즈마 Vyazma 남부에 공수되자 순식간 독일 제9군은 배후가 절단 되고 완벽하게 포위 될 위험에 쳐하였습니다.  비록 회프너 ( Erich Hoepner 1886~1944 )제4기갑군, 구데리안제2기갑군 클루제 ( Gunther Hans von Kluge 1882~1944 )제4군이 남부에서 진격하여 들어오는 주코프의 서부집단군을 간신히 방어하고 있어 제9군에 대한 통로는 일단 확보하고 있었으나 결코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