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출처 : 마음바다
조계사(曹溪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다.
조계사의 창건은 각황사(覺皇寺)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910년 창건된 각황사는 원흥사(元興寺)에 있던
조선불교중앙회사무소를 옮겨와 종로구 옛 중동중학교 자리에서 새롭게 법등을 이었는데, 조선 이후 서울의
사대문 안에서 창건된 최초의 사찰이기도 하다.
이것은 곧 조선시대 내내 관통했던 숭유억불의 정책으로 쇠락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불교가 새롭게 활기를
띠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총독부가 주도가 되어 조선사찰령이라는 것을 선포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을 그들의 일본사원인
장충단의 박문사(博文寺)에 귀속시키려 할 때였다. 해인사 주지 회광, 마곡사 주지 만공, 그리고 만해 스님 등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여러 각도로 노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1929년 전국에서 모인 104명의 승려가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가 대회’를 열어 종회법(宗會法)을
제정하였고 그 뒤 1937년 각황사를 현재의 조계사로 옮기는 공사를 시작, 이듬해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였고, 절 이름을 태고사로 했다.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합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인가를 받아 조선불교 조계종이
발족되었고 제1대 종정에 한암 스님이 취임하였다. 1945년 9월 이곳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일본강점기 때
만들어진 사찰령 및 태고사법 폐지를 결의하고 새로이 조선불교 교헌(敎憲)을 제정하였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정화담화문>이 발표되는 것을 계기로 석우, 효봉, 동산, 금오 등의 선사와 청담, 경산,
구산, 탄허, 지효 등의 중견 수좌들은 앞장서서 '왜색화된 불교를 척결하고 비구 스님 중심의 전통 회복'이라는 목표로
불교정화운동을 벌이는데, 이 때 태고사는 지금처럼 조계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늘날 조계사는 한국불교와 그 대표종파인 조계종의 주요 사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조계사 법당은
불교 행사의 중심장소로서 거의 일년 내내 법회나 강좌, 제사 등 다양한 의식들이 거행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중수 불사가 한창인데, 일주문을 시작으로 해탈문, 극락전, 대웅전 등의 전각이 2008년 완공을 목표로
연차적으로 중수 될 예정으로 있다.
조계사의 창건은 각황사(覺皇寺)에서부터 비롯된다. 각황사는 1910년 옛 중동중학교 자리에 세워진 절로서
그 전에 원흥사(元興寺)에 있던 조선불교중앙회사무소를 옮겨와 한국 근대불교의 새 불교운동을 이어가게 했던
중심사찰이었다. 당시 일본은 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이라는 것을 선포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을 그들의
일본사원인 장충단의 박문사(博文寺)에 귀속시키려 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해인사 주지 회광(晦光),
마곡사(麻谷寺) 주지 만공(滿空), 그리고 용운(龍雲) 스님 등이 31본산주지회의를 열게 되었고 그때 만해 용운 스님이
<조선불교의 개혁안〉을 통하여 조선불교의 통일기반인 총본산(總本山)제도를 주창하였다.
이렇게 하여 겉으로는 한국 근대 불교운동의 기초가 굳게 세워진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내부적으로 큰 병폐를 지니고 있었다.
일본이 제정한 사찰령은 한국전통불교의 독신 비구생활을 무시하고 처를 거느리게 하는 등 수도자로서의
타락을 교묘히 유도하였다.
여기에 친일파로 돌아선 회광이 교권을 잡으면서 중국 만주 등지에 이르기까지 친일불교의 포교가 확대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사용의 헌납금을 사찰에서 우선하여 걷는 반민족적 행태를 일삼음으로써 한국불교의
맥은 사라지다시피 하였다.
사찰령과 태고사법이 폐지된 뒤에도 그 같은 현상은 없어지지 않아, 당시 스님들은 산중 선방의 수좌(首座)들로
겨우 몇 백 명 정도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같은 조계종의 부패는 급기야 사회적 물의를 빚게 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1954년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사찰정화담화문> 발표를 계기로 하여 석우(石友)·효봉(曉峰)·동산(東山)·금오(金烏) 등의 선사와 청담(靑覃)·
경산(慶山)·구산(九山)·탄허(呑虛)·지효(智曉) 등의 중견수좌들이 앞장서서 불교정화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불교정화운동은 비구와 대처 사이의 종권투쟁으로 비화되어 치열하고도 오랜 공방 끝에 결국 비구측이 종권을
확보하고 태고사를 인수하게 되면서 일단락되었고, 이어서 1962년 3월 통합종단으로 거듭 났다.
아무튼 불교정화운동이 일단락된 1955년 태고사를 조계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조계사는 현재까지 대한불교
조계종의 행정중심사찰이 되고 있다.
나무 안의 절
-이 성 선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 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나비 날아가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꽃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 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대웅전
팔작지붕에 앞면 7칸, 옆면 3칸 규모로 1910년에 세워졌다. 본래는 전라북도 정읍의 신흥종교인 보천교(普天敎)
교주 차천자(車天子)의 궁전이자 법당으로 쓰인 십일전(十一殿) 건물이었는데, 이것을 사들여 1937∼38년 사이에
이 곳에 옮겨지은 것이다.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고 내부가 155평이나 될 정도로 규모도 비교적 커서 한때 중앙청(현 국립중앙박물관)과
종로 사이에 가장 높은 건물로 사방의 거리를 짐작케 해주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2004년부터 대대적인 중수 공사에 들어가 2005년 중에 완공될 예정으로 있다.
석가여래상과 후불탱이 모셔져 있고 그 옆으로 천불탱이 있다. 모두 1974년에 봉안되었다. 석가불상은 전라남도
영암의 도갑사(道岬寺)에서 모셔온 것이라고 구전되는데 그다지 오래된 작품은 아니다.
그밖에도 법고(法鼓)·범종·아미타내영도 병풍·가마 등이 있다. <대웅전> 편액은 조선시대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 이광(李珖, 1589~1645)의 해서체 글씨로, 화엄사(華嚴寺) 현판 글씨를 그대로 복사하여 제작한 것이다.
현판 옆에 ‘의창군서(義昌君書)’라는 글씨가 조그맣게 쓰여 있다. 서울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의 대웅전 현판은
이것을 복각한 것이다.
칠층석탑
1914년 스리랑카의 달마바라(達摩婆羅) 스님이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하기 위해 1930년 스님들의 원력으로 세워졌다. 대웅전 앞에 있다.
절 마당의 새도 나에게는 조계사의 일부였던 날.
백송과 회화나무
조계사 경내에 천연기념물 제9호로 지정된 백송(白松)이 한 그루 있는데 흔히
‘서울 수송동의 백송’이라고 부른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약 5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한다.
백송은 소나무과에 딸린 상록교목으로 본래 중국의 호베이성(湖北省)과
허베이성(河北省)이 자생지이며 최대 25∼30m까지 자란다고 한다.
조계사 백송은 조선시대에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종자를 가져와 심은 것으로, 현재 높이 10m,
가슴높이 둘레 1.67m인데 7m쯤의 높이에서 7개의 가지로 갈라져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동쪽으로 향한 4가지는 건물과 인접해 있어서 말라죽어 잘렸고
서쪽의 대웅전으로 향한 가지만 살아남아 있다.
수세(樹勢)가 약화되고 줄기 상처부위가 썩어 들어가 1979년 외과수술을 실시한 결과
수세는 좋아졌으나 지금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못하다.
소나무는 본래 단지(短枝) 위에 두개의 솔잎이 붙어 있으나 이 백송은 세 개씩 나는 것이
보통 소나무와 크게 다른 점이다.
또 줄기는 나이가 어릴 때는 회청색을 띠다가 연륜이 거듭될수록 나무껍질이 벗겨져 가면서
껍질색이 점점 회백색으로 변해 가는 희귀한 나무여서 백송이라고 부른다.
이곳의 수송동(壽松洞)이라는 지명은 이 나무로 인해 생긴 것이라 한다.
또한 이곳에 있는 회화나무도 수령이 약 400년으로 추정되는데 훨씬 이전부터 이 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높이 24m, 둘레 2.7m로 현재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78호로 되어 있다. 옛날 이 나무를 중심으로
회화나무군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계사 부근의 옛 지명이 ‘회화나무 우물골’이었다고 한다.
편액은 조선시대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 이광(李珖, 1589~1645)의 해서체 글씨로,
화엄사(華嚴寺) 현판 글씨를 그대로 복사하여 제작한 것이다. 현판 옆에 ‘의창군서(義昌君書)’라는
글씨가 조그맣게 쓰여 있다. 서울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의 대웅전 현판은 이것을 복각한 것이다.
'대한민국 探訪'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내소사. 황홀한 설경에 빠지다 (0) | 2008.02.02 |
---|---|
설경이 뛰어난 한국의 산 (0) | 2008.01.27 |
[스크랩] 눈 녹는 고궁 산책 - 창경궁 - (0) | 2008.01.26 |
겨울온천 뜨거운 유혹…물좋은 곳서 '熱'나게 즐겨봐 (0) | 2008.01.26 |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청산도에 가다 (0) | 2008.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