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政治.社會 關係

뉴스가 진화하는 사회

鶴山 徐 仁 2007. 10. 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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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가 진화하는 사회     

       

    ‘뉴스 윤회설’을 들어 보았는가. 저널리스트들이 만들어낸 이 말은 한 번 썼으니까 끝난 줄 알았던 뉴스가 때맞춰 되살아오는 현상을 빗댄 것이다. 연말 무렵 언론들은 어김없이 10대 뉴스나 ‘올해의 인물’을 선정해 발표하기 바쁘다. 신년호엔 으레 십이지(十二支)에 따른 그해의 동물 이야기가 실린다. 추석에는 ‘추석 상차림’ 가이드가, 입사 철엔 새내기 직장인을 위한 기사가, 밸런타인데이엔 초콜릿이나 장미꽃 관련 이야기가 되살아난다.

    돌고 도는 이런 뉴스들은 세상이 나름대로의 리듬을 갖고 돌아간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자고 일어나면 끔찍한 사건·사고 소식이 들리지만, 그래도 세상은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곳이며, 거기서 갓 결혼한 새댁이 열심히 추석 상차림을 배우고, 새내기 직장인들이 옷차림을 고민하며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나간다.

    허영심 많은 한 젊은 여성의 거짓말에서 시작된 ‘신정아 사건’이 나날이 변모하는 걸 보며, ‘뉴스 진화론’을 추가하고 싶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 학력위조 사건으로 시작한 ‘예일대 가짜박사’ 사건이 문화-연예인의 고해성사 바람을 불러일으키더니, 청와대 인사와의 연루가 밝혀지면서 정권 말 게이트(권력형 비리사건)로 ‘진화’해 가고 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전(全)방향적인지,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나 남북정상회담이 빛을 잃을 정도다. 종교계, 교육계, 예술계, 관계, 언론계, 여성계를 망라한 신정아 뉴스는 ‘게이트’ 사건의 딱딱한 요소와 연애사건의 부드러운 부분이 두루 가미되어, 흥행의 요소치고는 좀 과하게 촘촘하다. 이런 뉴스는 정말 흔치 않다.

    대개 생물은 진화하면서 더욱 발전하고 고등동물이 되는 반면, 뉴스는 진화할수록 우리 사회의 깊숙한 부조리를 보여준다는 게 대조적이다. 뉴스 윤회설이 삶의 일정한 리듬을 일깨운다면, 뉴스 진화론은 세상의 깊이에 대한 통찰을 던진다. 신정아 사건은 “왜 우리 사회가 사기를 당했는가”를 성찰해 보게 했다. 사기 치는 사람도 문제지만, 당하는 사람도 조건이 있다. 어리석거나, 허영심이 있거나, 욕심이 과하거나, 게으르거나, 너무 맘이 좋아 알고도 당하거나, 뭔가 이유가 있어야 사기에 노출된다. 사회학에서는 이런 걸 ‘피해자 사회학’(victim sociology)이라고 부른다.

    신정아 사건은 우리 사회의 욕심지수가 얼마나 높은지, 학력 같은 껍데기를 중시하는 허영지수가 얼마나 높고, 예술을 빙자한 허위의식이 얼마나 그득한 곳인지 말해준다. 국민의 세금을 제 돈인 양 착각하는 공복, 거짓말 차단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 정의도 잠재우는 연줄의 힘이 모이면 단순 거짓말도 온 사회를 흔드는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사회라면 굳이 신정아가 아니라도 비슷한 수법에 언제든지 당할 수 있다. 자신도 학력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신정아의 주장은 그래서 흥미롭다. 설사 그 말이 일부 사실이라고 해도, 쉽게 학위를 따려는 허영심이 없었다면 자신도 사기의 피해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신정아 사건을 보며 권력 말기의 도덕적 해이를 비난하기도 하고, 혹자는 학력 만능의 허위문화를 개탄하기도 한다. 혹자는 언론의 윤리를 다잡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기도 하고, 혹자는 문화 예술계의 허술한 인력관리를 문제 삼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매일 진화하는 신정아 뉴스를 보며 한 줄기 안도를 느끼고 있다. 사회 구석구석을 굴러다니며 몸집을 불려 가는 먼지덩어리를 보는 건 역겹지만, 그래도 그걸 비춰 주는 빛이 있어야 청소도 할 수 있으므로. 한쪽에서는 언론이 대못질을 당하고 있는 와중에도 진실의 파편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뉴스의 바퀴를 열심히 굴린다는 건 아직 우리 사회가 건실하다는 증거이다.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 뉴스가 ‘사전검열’로 인해 태어나지도 못하거나, ‘유언비어’로 바람 속에 떠돌다가 사라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뉴스가 윤회하고 진화하는 사회는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다.

    박성희·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