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종종 친구들의 퇴근시각에 맞춰 서울 나들이를 한다. 대부분 술 약속이기 때문에 버스를 탄다. 타고난 산만함 탓인지 아니면 저혈압의 병증 때문인지, 흔들리는 차 안에서 책을 읽지 못하지만 1시간이 그리 지루하지 않게 지나간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거리도 내다보고 승객을 관찰하거나 귀에 들려오는 대화와 휴대전화의 통화 내용을 엿듣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타인의 인생을 상상하고 조립해보는 것이 재미있다. 그런데 훼방꾼이 있다. 바로 귀청을 때리는 라디오 소리이다.
만담 스타일의 과장된 수다, 아마추어의 트로트 경연…. 버스기사들이 틀어놓는 프로그램은 정해져 있다. 하루 종일 운전석에 앉아 같은 거리를 반복해서 주행하다 보면 졸음을 깨우는 농담이나 노래자랑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남녀노소 승객이 그것을 공유해야만 하는 걸까. 버스에 탄 사람은 거리 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 인생 중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고유한 시간을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
다혈질인 내 친구는 딱 한 번 라디오를 꺼달라고 요구했다가 버스기사로부터 면박만 당했다고 한다. 라디오 소리 듣기 싫으면 택시나 자가용 타고 다니지 왜 버스 탔냐는 말에 더 이상 대꾸를 못하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버렸다. 그는 내게 버스를 타려면 현대인답게 MP3나 DMB 수신기 혹은 수면용 귀마개를 장만하라고 충고한다. 그 문제에 관한 한 버스기사의 권위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버스기사의 권위가 아니라 ‘통념’의 권위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화나는 일이다.
권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전문성에서부터 돈이나 학벌, 신분에 이르기까지. 그 중에서 어떤 권위는 물리적 폭력을 수반한다. 남자들이 많은 자리에서는 이따금 호되게 맞았던 이야기가 화제가 된다. 깡패에게 맞은 이야기가 아니다. 군대 상사에게, 학교 교사에게, 선배에게, 드물지만 아버지나 형에게. 대부분은 어이없는 이유로 말이다. 대학에서 ‘군기 잡는’ 선배에게 통과의례로 ‘빠따’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단골 소재다.
폭력에 관련해서는 ‘담배 심부름’에 얽힌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한 후배는 외진 휴양시설에서 행사 뒤풀이 중 선배 작가의 담배 심부름을 하러 한밤중에 산길을 두 시간이나 걸었다고 한다. 나 역시 어느 술자리에서 꽤 알려진 감독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영화제작자를 본 적이 있다. 이른바 ‘군기’는 도제관계가 살아 있는 전문가 사회에서 특히 강한 듯한데 ‘응급환자 처치보다 선배의 담배 심부름이 먼저였다’는 대학병원 인턴의 인터뷰 기사도 있었다. 윗사람이라는 권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얼마전 할인마트에서 친구 집들이에 갖고 갈 포도주 한 병을 샀다. 소액 계산대가 닫혀 있어서 카트마다 가득히 물건을 싣고 있는 긴 줄에 서야 했다. 십여 분이 넘도록 같이 갈 일행이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마음이 급해졌다. 두 개의 카트를 가득 채워 갖고 있던 내 앞의 남자에게 용기를 내서 양보를 부탁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선점’의 권위가 있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화까지 나지는 않았지만 심각하게 무안했다. 대신 연휴의 고속도로 화장실에서 한 줄 서기의 선점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더욱 화가 날 수밖에.
긴 줄을 무시하는 사람 중에는 노인이 적지 않다. 지하철 표를 사거나 관공서 창구의 안내를 받을 때도 노인들은 기다리지 않을 권리가 있는 듯하다. 지하철 안에서 피곤해 잠든 회사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호통칠 때 그 권위에는 누구도 항의할 수 없다. 공공장소에서 제멋대로 떠들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약자로서의 어린아이’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다. 신문에 얼굴이 실리면 여러 장애단체로부터 동시에 손수 제작한 공예품을 사라는 연락을 받아야 하고 한번 응한 사람은 정례적인 지출을 해야만 하는 것, 그것도 일종의 ‘약자’라는 권위에 속하지 않을까. 물건을 싸게 사기 위해 혹은 집에 빨리 돌아가기 위해 할인마트나 택시 정류장에서 새치기를 하는 아줌마들은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생활력 강한 주부’의 권위를 행사하는 중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권위에 치여 이래저래 화가 나긴 하지만, 나는 싸움은 잘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길 자신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성격 급하고 배짱 약하고, 게다가 권위라고는 없는 새된 목소리를 갖고 있는 나로서는 상대방을 제압할 확률이 거의 없다. 싸움이 벌어질 상황이 되면 나는 미리부터 질 준비를 해야 한다. 나로서는 남의 잘못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생각을 바꿔서 상대를 이해하는 편이 훨씬 쉽게 느껴진다. 덕분에 이따금은 사고가 유연하다는 말도 듣는데, 순전히 싸움을 피하려는 비겁함으로부터 얻게 된 엉뚱한 부산물이다. 그런 내가 얼마 전 큰소리를 치며 싸운 일이 있었다. 부부싸움을 빼고는 평생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이었다.
일요일에 모임이 있어 친구의 아파트로 차를 운전해 갔다. 주차장 입구에 차단기가 내려져 있는데 경비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 전화를 받고 내려온 친구가 입주자 출입카드로 차단기를 올려주었다. 그날 모이기로 한 사람은 세 명, 그들이 도착할 때마다 친구는 매번 차단기를 올려주기 위해 주차장에 내려가야 했다. 집에 들어와서는 한걱정이었다. 방문객은 경비실에서 주차권을 받아 차 앞 유리에 붙여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한 달 안에는 도저히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접착력이 강한 주차위반 스티커를 붙인다는 것이었다. 과연 모임이 끝난 뒤 주차장에 내려가보니 차에 딱지가 붙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방주차를 하라는 경고장이었지만 당장은 주차위반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일행은 그냥 차에 올랐지만, 집주인인 친구는 오래도록 자리를 비운 경비원에게 다가가 책임을 물었다.
경비원의 태도는 완강했다. 공무로 자리를 비웠는데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거였다. 그럼 차단기를 열어줄 경비가 없어서 주차장에 들어오지 못하는 방문객은 어디에 차를 세우냐고 묻자 길가에 세우면 될 것 아니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주차장을 놔두고 불법주차를 하라는 거예요?”라는 말에는 “운전하는 사람이 그만한 ‘테크니컬한 운전’도 못하냐”며 은근히 운전 실력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는 거였다. 주차위반 스티커를 붙이지 않은 것만도 크게 봐준 일인데 고마워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 아줌마라고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차 안에서 듣고 있던 우리는 애당초 말이 통하지 않는 싸움이다 싶어 친구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차문을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삿대질을 하던 경비원이 주먹을 휘두르며 친구에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넷의 위선적일 정도의 지성에 대한 집착과 타인의 시선에 대한 자의식 및 차마 과격해질 수 없는 성격적 소심함을 걸고 맹세컨대, 무례하지는 않았다.
싸움에는 승패가 있는 법이다. 그날 우리는 깨끗이 졌다. 경비원이 내세운 여러 가지 권위에 진 것이다. ‘경비라고 무시하나 본데 나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피해의식의 권위. ‘집에 가면 당신들 나이만한 아들딸이 있어’라는 막무가내 장유유서의 권위. 그리고 ‘아니, 지금 이 여자들이 어디다 대고!’ 하는 남성이라는 권위. 장소가 아파트 경비실이 아니라 대학 수위실이었다면, 한가한 아줌마들의 일요일 수다 모임이 아니라 전문직 여성들의 좌담회쯤으로 보였다면, 만약 여자 넷이 아니고 남자 넷이었다면, 그랬다면 경비가 그 권위를 다 내세울 수 있었을까. 거기 비하면 입주자라는 권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우리 일행은 ‘손님이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집주인은 매일 마주쳐야 할 얼굴이니 경비원의 비위를 거슬러서 좋을 것 없다’는 결론을 냈다. 우리 역시 비겁한지라 ‘완장’에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사과의 뜻으로 경비에게 가져갈 드링크제를 사러 가며 서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을 했다. 우리가 젊게 보이긴 하나 봐. 40대 중반으로 봤으면 설마 주먹까지 휘둘렀겠어? 낼모레 50인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무리 나이를 먹더라도 그 나이 가지고 권위를 누릴 마음은 애당초 없으니, 젊어 보이기라도 해야지. 혹시 알아? 권위적이지 않은 덕분에 조금은 더 젊어 보일지.
은희경·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