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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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심동체 우리 부부처럼 한국과 중국도 하나됐죠.

鶴山 徐 仁 2007. 8. 23. 21:03
박승준 특파원(베이징) sjpark@chosun.com
입력 : 2007.08.21 22:19 / 수정 : 2007.08.21 22:34
  • 1997년 7월. 한중수교가 이뤄진 게 1992년 8월이니까 그 5년 뒤다. 중국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바오터우(包頭)시에서 35세의 한국 총각 한동훈(韓東訓)과 26세의 중국 한족(漢族) 처녀 차오신(曹昕)이 결혼식을 올렸다. 한씨는 1962년생의 서울대 82학번, 이른바 피끓는 386으로 국제경제학과 석사를 마치고 베이징대로 유학 가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차오씨는 차오화(曹華) 전 바오터우 시장의 딸로, 네이멍구 중의(中醫)대학을 졸업하고, 메이쉐(美雪)그룹이라는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동훈씨를 처음 만난 건 1994년이었어요. 같은 바오터우시 출신 친구이자 당시 베이징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었던 누샹둥(牛向東)이 우리 인연의 징검다리가 됐어요.”

  • ▲ 자택에서 만난‘한중 커플’가톨릭대 한동훈 교수와 차오신씨 부부. 남편은 아내에게“늘 감사한다”고 했고, 아내는 남편을“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숭배했다”고 했다. /베이징=이명진 특파원 mjlee@chosun.com
  • 누샹둥은 현재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시 시장 조리(助理·보좌역)를 맡고 있는 촉망받는 젊은이다. 누샹둥도 뛰어난 인재였지만 차오신은 그의 한국인 친구인 한동훈을 사랑하게 됐다.

    “말도 안 되는 거죠. 중국말도 나중에 배우기 시작한 동훈씨가 인재들만 모이는 베이징 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에서 누샹둥을 포함한 중국의 인재들을 다 제치고 1등만 한다는 거예요.”

    그 해 두 사람은 베이징대 부근의 하이뎬취(海澱區)에 있는 맥도널드 햄버거가게에서 처음으로 단둘이 마주앉아 감자칩을 먹었다.

  • “그리고 1년만인 1996년 처음으로 바오터우시에 있는 지금의 처가집으로 놀러갔습니다. 그런데 장인 될 사람의 눈치가 싸늘했어요… 장모 될 사람도 씨암탉은 커녕.”

    “아빠는 그때 내 귀에다 대고 ‘무슨 남자가 저러냐, 밥 먹고 그릇도 안 씻고 가만히 앉아있다니, 정말 게으른 친구로구나, 너 시집가면 고생깨나 시키겠다…’고 하시는 거에요.”

    그러나 피 끓는 젊은이들의 사랑을 누가 말리랴. 1997년 7월 한국 총각 한동훈과 중국처녀 차오신은 신봉길(申鳳吉) 당시 베이징총영사의 입회 아래 바오터우 신부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1년 뒤 한국에서 결혼식을 한 번 더 올렸다. 주례는 신랑이 존경하는 모교의 인류학과 김광억(金光億)교수가 섰다.

    신부는 결혼식장에서 신랑친구들이 신랑을 매달고 명태로 발바닥을 때리는 걸 보고는 기겁을 했다.

  • “앞으로 신부에게 잘 해 줄거냐고 물으면서 때리더군요. 진짜로 인정사정 없이 때리는 거예요. 중국에서는 신랑에게 술을 먹이거든요. 가까운 친구와 친척들이 돌아가면서 백주(白酒·배갈)를 한 잔씩 먹이죠. 신랑들은 100% 뻗어요.”

    결혼 후 한국에서 시작한 신혼생활 곳곳에서 한국과 중국의 생활문화 차이가 발견됐지만 두 사람은 결혼 당시의 어려움을 떠올리며 이 차이를 무난히 극복했다.

    “한국 사람들 중국을 너무 몰라요. 그냥 좋아하기만 하죠. 한국 외교관들도 중국을 잘 몰라요. 외교란 서로 주고받을 게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나 요즘 보면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받는 거 별로 없어요. 잘 보면 중국으로부터 받을 게 많아요. 중국은 일본에게는 줄 게 없지만 한국에게 줄 건 많은 나라에요.”

    두 사람의 한국 생활 8년 만에 남편은 가톨릭대학 국제학부 조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중국의 기업과 경제’ ‘동아시아 경제론’ 등의 저서를 쓴 한동훈 교수도 “두 나라가 수교한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한국이 중국을 너무 모른다”고 말한다.

    “지금 중국 사회는 30대가 주축입니다. 한국은 50대, 60대가 주축이지만 중국은 30대가 주축입니다. 재계의 주류도 30대이고 여자도 많습니다. 이 사람들을 파트너로 소개하면 한국 기업에서는 금방 눈쌀을 찌푸립니다. ‘그런 애송이가 뭘 알겠느냐’는 거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8년을 사는 사이에 신부 차오신은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사람이 됐다. 차오신은 또렷한 한국어로 말한다. “저는 전생에 한국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저는 중국사람이지만 한국을 더 사랑해요. 그런데 우리 남편 웃기는 건 내 돈도 자기 돈이고, 자기 돈도 자기 거래요. 중국사람들은 남자 돈 여자 돈 다르거든요(웃음). ”

    차오씨는 현재 베이징에 병원을 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의료사업을 통해 남을 돕고 사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한동훈 교수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 교류을 촉진하기 위한 활발한 저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2005년 11월 예선(禮鮮)이란 이름의 예쁜 딸이 태어났다. 수교 15주년을 맞는 2007년 8월 두 사람은 예선이를 데리고 바오터우시의 외할아버지댁에서 지내고 있다. 예선이가 스무살이 되는 2025년 한중 관계는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