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pyright Wayne Roberts All rights reserved. Watercolour 3/4 sheet. Private collection
영국식으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여름휴가 때 영국에 다녀왔다. 비행기로 10시간 거리의 영국은 분명 먼 나라인데도, 동생이 살고 있어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손쉽게 ‘후딱 다녀오자’고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런던. 빨간 버스와 ‘튜브’라 불리는 지하철이 정겹다. 여행가방엔 휴가용 책들이 대여섯 권 들어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제일 먼저 골라잡은 책은 독일의 전직기자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이었다. ‘보수적인 신문사의 참신한 맛을 돋우기 위해’ 스카웃됐던 저자는 경기가 악화돼 신문사가 구조조정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희생양이 됐다. 그는 실업보험금도 포기한 채 월수입 없이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길로 들어선다. 프리랜서 작가가 된 것이다.
그의 이름 ‘폰 쇤부르크’가 말해주듯, 그의 가족은 한 때 성 몇 채를 소유했던 귀족에서 가난한 시민으로 몰락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몰락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국가 중에서는 영국이 우아하게 몰락하는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그는 “대영제국이 초강대국에서 생활보호대상자로 추락한 과정을 다룬 논문은 도서관 여러 개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고 했다.
저자가 설명한 영국 상류층의 몰락 과정은 이렇다. 영국 귀족들은 1832년 개혁법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하고, 1894년 상속세법 이후 재산을 매각해 세금을 내며 경제적 주도권도 잃는다. 그래도 돈이 좀 있던 사람들은 1929년 대공황으로 알거지가 되고, 1946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수입을 올릴 가능성을 완전히 잃는다.
그래도 ‘정신’은 남았다. 신분은 돈이 아니라 행동과 언어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배워서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가졌느냐 보다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중산층이 되기도 하고 그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영국인을 ‘지배자의 민족’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타인을 지배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 비록 상상의 세계라 해도 ‘자기 세계의 주인’이라는 점에서 지배자라고 한다. 요컨대 자기극기가 강한 사람이 신사이고 숙녀인 것이다. 이런 정신은 생을 포기해버리고 싶은 순간에도 “나는 어떤 특별한 세계에 속한다”는 자부심이 되어 우리를 지켜준다. 그것이 돈이든 사회적 지위든 일자리든, 자신이 ‘소유한’ 무엇인가를 잃는다고 해서 한 순간에 무너지는 그런 인간이 되지 않도록 버텨주는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교에 갔다가 ‘해리 포터’ 영화에 나오는 식당의 무대였던 크라이스트 처치에 들렀다. 지금도 학생식당으로 쓰는데, 해리포터 덕에 완전히 관광지가 돼버렸다. 그런데 그곳, 예전에도 가본 적이 있다. 루이스 캐럴이란 필명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썼던 찰스 돗슨의 초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옥스퍼드대 수학교수였던 그의 신기한 상상력에 매료됐던 시절이라 기를 쓰고 그 식당에 찾아 갔었다.
나의 발길을 그 장소로 자꾸 이끄는 건 고풍스러운 건물이 아니다. 그 오래된 식당이 연상시켜주는 매번 다른 상상의 세계다. 식당은 같지만, 거기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달라지면 또 가보고 싶은 곳이 되는 것이다.
사실은 사람도 그렇다. 어떤 사람이 지금 당장 소유 또는 점유한 무엇인가는 우리를 잠시 ‘현혹’시키긴 해도 ‘매혹’시키진 못한다.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생의 가장 가혹한 순간에도 빛을 발하는 정신과 마음이다. 책 제목은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이었지만, 사실 저자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가진 것을 모두 잃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결핍’을 선생으로 모시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
출처: '강인선의 워싱턴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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