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간 사태, 反美선동 경계한다 > < 문화일보 8.3.게재 >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돼 인질로 억류돼 있는 한국인 23명 중 2명이 벌써 희생됐다. 그 숫자가 더 늘어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다. 남은 사람들은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로 심장이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넋나간 여성 인질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해 보여준 납치범들의 소행은 잔인함의 극치다.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인질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피랍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범여권과 시민단체 일부를 중심으로 사태의 본질을 ‘미국 책임론’으로 몰아가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으며 반미(反美)감정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도 잇따르고 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인질사태의 본질은 파병에 있다고 강조하며 미국의 불개입 원칙에 대해 무책임하고 동맹국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원칙 고수로 피해를 더 촉발시킨다면 한국민의 감정에 어떤 변화가 올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또한 반미 성향의 일부 시민단체들은 주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부시 정부가 이번 사태의 주된 책임자” “미국이 즉각 탈레반과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강력한 촛불시위를 벌일 것” “정부는 이라크·레바논 즉각 철군으로 미국을 압박하라”고 주장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형을 선고받고 항소중인 강정구 교수는 “미국이 탈레반 수감자들을 석방해주면 인질이 풀려날 수 있는데도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는 것은 미국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미국을 방문중인 4당 원내대표 등 국회 방미단은 니컬러스 번스 국무부 차관을 만나 인질 석방을 위한 미국 정부의 협조와 자세 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미국이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접근은 사태를 꼬이게 만들 뿐이라면서, 설사 요청하더라도 조용히 해야지 떠들면 방해만 된다고 했다. 그동안 미국 정부는 미국인이 납치돼도 테러범의 요구를 거부해 왔다. 지금도 10여명의 미국인 인질이 생사 불명이다. 미국은 이 원칙이 무너지면 납치 테러는 전 세계에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으로 보고 있으며, 탈레반이 요구하는 조직원 석방은 미국 소관도 아니고 아프간 정부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사안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반미 세력들이 “미국이 나서라”고 고함을 지를수록 미국은 ‘테러와 협상 없다’는 대원칙 속에 갇히게 된다. 정당 원내대표 등이 미국의 역할을 촉구하기 위해 방미중이지만 인질들의 목숨을 더 위태롭게 만드는 ‘정치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납치단체는 인질 석방 조건으로 수감자 석방과 맞교환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 문제는 우리나 미국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주권국가인 아프간 정부에 대해 탈레반 수감자 석방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미국이 나서서 결정해야 한다는 접근은 국제법과 관례를 무시한 발상이다.
미국이 중요하다고 강조할수록 아프간 정부는 미국의 앞잡이라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리고 자국군 수천 명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국이 선뜻 호응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런 요구가 도를 넘어 자칫 ‘미국 때문에 우리 국민이 죽었다’는 식으로 비약되면 한국이 보게 될 국제적 위신 손상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사태가 심각해질수록 이 비극을 반미 선동의 호재로 만들려는 세력의 준동은 더 심해질 것이다. 누가 정말 우리 젊은이들의 목숨을 살려내려는 측이고, 누가 이 비극을 반미 선동의 호기로 삼으려는 세력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또다시 2002년 대선 때의 효순·미선양 사건과 같이 국민을 호도하여 반미감정을 부추기고 좌파세력들을 결집하여 무능력한 정권을 집권시키려 기도한다면 이는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