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함도 덜도 없는 여유로움의 부석사(浮石寺)
부석사(浮石寺)의 아름다움은 이미 저명한 인사들이 다 표현하여 어설프게 적어 놓았다가는 도리어 이상할 것 같아 단 줄로 표현하자면 ‘황색의 이미지이다.’ 부처님이 두른 황색 장삼(長衫)의 존엄한 느낌. 그러면서도 화려하지도 어둡지 않는 깨어있는 기분이다.
자연의 조화. 균형과 절재의 미. 더함도 덜도 없는 넉넉한 여유로움. 부석사(浮石寺) 안양루(安養樓)에 올라서면 드는 느낌이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당시 해동 화엄종주였던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한 고찰이다. 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이 신라를 침략하려는 책략을 알고 이를 문무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고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고자 귀국해 이 절을 창건하게 된다.
그 후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으며, 이는 경주의 불국사보다 75년이나 앞서 세워진 것이다. 부석사는 지금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듭하면서도 한국 5대 사찰의 하나로 불교문화의 성지로 깨달음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부석사(浮石寺)라는 이름은 불전(佛殿) 서쪽에 있는 큰 바위가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한데서 붙여졌다. 고려 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 불리웠으며,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병화(兵火)를 당하여 우왕 2년(1376)에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재건되고, 우왕 3년(1377)에는 조사당이 재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 벽화 6점은 목조 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보장각에 보관하고 있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호),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호), 조사당(국보 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45호), 조사당 벽화(국보 46호)등 국보 5점과,
석조여래좌상(보물 220호), 당간지주(보물 255호), 삼층석탑(보물 249호), 고려각판(보물 735호) 등 보물 4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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