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만용과 용기 [ 2 ]

鶴山 徐 仁 2007. 4. 13. 19:46

비극의 서막

 

영국과 프랑스 연합해군의 피해가 크기는 했지만 이들 전함들로부터 막대한 포격을 당한 오스만투르크군도 사실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러섬 없는 치열한 교전 때문에 방어진지의 투르크군들은 탄약이 거의 소진 된 상태였고 만일 이 시기에 연합군이 육군을 상륙시킨다면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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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의 방어에 나선 투르크도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

 

하지만 처칠의 만용으로 해군만의 단독작전에 나서 참담한 실패를 맞본 연합군은 3월 12일에서야 영국 중동원정군 사령관 해밀턴 ( Sir Ian Standish Monteith Hamilton 1851 ~  1947 ) 으로 하여금 해군을 도와서 육해군 합동작전으로 갈리폴리에 전개된 오스만투르크수비군을 제압하도록 작전을 변경하였으나 준비부족으로 4월 25일에나 상륙작전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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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밀턴은 육해군 합동작전을 기획하였으나 준비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

 

이렇게 6주의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작전은 탄약과 병력 부족으로 허덕이던 투르크군이 원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즉시 10만의 병력과 장비를 충원 받아 요새를 재건하고 방어선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몇 차례의 공세로 해군력이 약화된 연합군이 이렇게 강화된 방어선으로 상륙군을 투입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작전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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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르크는 영국이 시간을 끄는 사이 충원에 성공합니다 ]

 

연합군의 상륙군은 멀리 오세아니아의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병사로 이루어진  ANZAC 원정군을 주축으로 각지에서 달려 온 대영제국의 병사들로 편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인근 이집트의 카이로에 집결하여 반복적인 상륙훈련을 받았는데 비록 사기는 왕성하였으나 아직까지 전선에 투입된 적이 없어 실전감각이 부족하였고 전쟁의 무서움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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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온 병사들의 자신만만한 모습

그러나 그들은 전쟁의 무서움을 몰랐습니다 ]

 

준비를 마친 연합군은 해밀턴 장군의 지휘 하에 드디어 1915년 4월 25일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개시하기로 합니다.  작전 계획은 기습적으로 갈리폴리해안선에 상륙한 ANZAC 군 전초부대가 해안선에 참호를 파서 이후 충원 될 병력과 장비가 안전하게 들어 올수 있는 교두보를 설치하여야 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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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은 우선 해안선에 교두보를 확보하여야 했습니다 ]

 

해안선 참호로 1차적인 교두보를 확보하면 상륙군은 언덕위에 요새선을 구축하고 있는 투르크군에 대한 제압만 하면 궁극적인 승리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지의 요새선은 육군만의 단독적인 돌파만으로 제압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항공기와 기갑부대를 이용하여 돌파를 꿈꾸던 시절은 아니었고 보병의 각개돌파로 점령을 하여야 할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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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지를 점령하여야 했는데 육해군간의 협조가 필수 요건이었습니다 ]

 

연합군이 할 수 있는 작전은 바다 위에 있는 해군의 포격으로 탄막을 형성하여 보호를 받은 상태로 상륙군이 상륙에 성공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고지로 달려 나가 투르크군의 요새를 점령하여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육군상륙부대와 해군엄호부대의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지어야 최종적으로 성공 할 수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리폴리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차질을 빗고 있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