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제 탄도탄의 변천과정, 스커드-A에서 시작해 노동미사일까지의 형태및 크기변화가 드러난다. | |
앞서의 연재에도 제시하였듯이 북한의 미사일 개발은 중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북한은 60년대 말의 프로그 탄도탄 도입 이래로, 공여국 소련의 허가 없이 일반고폭탄이 실린 탄두부에 임의로 화학탄을 탑재하는 개조를 통해 독자적인 미사일 기술을 확보해 나갔다. 그러나 다극화시대로 대표되는 70년대 냉전체제의 변화 속에서, 서로 대립하게 된 양대 사회주의 종주국-중공, 소련-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북한은 그 반작용으로 어느쪽으로 부터도 미사일 기술을 쉽게 얻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그리고 이 기술 장벽의 틈새에서 북한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된 것이, 역시 탄도탄 기술 확보를 갈망하던 중동이었다는 것은 이미 전술한 바 있다.
70년대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국가들은 중동에 세력기반을 구축하려는 소련의 의도에 따라 막대한 양의 소련제 최신병기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중 MIG-21전투기, 스틱스 대함미사일, T-62전차, BMP 보병전투차등의 병기들은 중동전에서도 크게 활약하였으며, 소련은 이집트에게 이스라엘의 탄도탄-제리코 단거리 탄도탄-에 대응하도록 이동식 스커드-B 미사일 까지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집트에게도 북한에게 했던것과 마찬가지로 완제품만이 아닌 생산기술의 이전만큼은 인색했다. 경쟁국 이스라엘은 이미 1970년에 프랑스의 기술로 지대지탄도탄을 국산화하여 중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당시 중동의 맹주를 자처하던 이집트는 탄도탄 수입에만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탄도탄기술을 확보하길 원했다. 그들은 과거 낫세르 집권기 때에도 독일 기술자의 협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탄도탄 체계를 확보하려다 서방측의 제재로 좌절당한 전력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이 나타난 협력자는 새로이 제3세계국가와의 반미, 반서방연대를 표방하던 북한이었다. 그리고 다년간의 역설계를 통한 무기 국산화 전력이 있는 북한과 이집트사이에서 미사일 본체와 역설계기술의 교환이라는 빅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빅딜이 바로 1981년 8월, 북한과 이집트 간의 ‘과학기술합의’였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 국산화는 이 이후 본격화 되었다고 추정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1984년, 최초의 북한제 스커드가 완성되어 동해를 향해 발사 테스트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때 만들어진 시제품은 보통 300km의 사거리를 갖는 스커드-B보다 사거리가 모자랐고(280km), 본격 양산은 그 약점을 개선한 1985년에 이루어졌다. 오리지날 스커드-B 보다 사거리가 연장된(320~340km) 북한제 스커드-B, 일명 화성 5호는 1986년에 들어서 월 8~12발 꼴로 양산되었고, 87년에는 중동으로 수출되기에 이른다. 첫 고객은 이라크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이란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는 소련제 무기로 충실히 무장하고 다량의 스커드 미사일까지 보유한 반면 이란은 회교혁명으로 종전에 보유하던 서방제 무기체계의 공급선이 끊기고 소련과의 관계도 그때까진 서먹하여 매우 불리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이라크군은 스커드 미사일의 떨어지는 탄착정밀도(명중오차범위 900m 이상)를 대도시와 같은 거대한 목표에 무차별 발사하는 것으로 보완했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이 공격으로 8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당시 테헤란 인구의 4분의 1이 공포심에서 도시를 탈출하게 만드는 부수적 효과까지 얻었다. (이는 통상탄두의 탄도탄이라도 상대국에 대해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북한의 스커드가 서울에서 120㎞ 떨어진 북한 신계기지에서 발사될 경우 서울에 3분30초 만에 도달하는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란은 새로운 무기도입선으로 독자 노선을 표방하던 북한을 선택했고, 북한으로부터 수입한 스커드가 다시 이라크에 대한 보복병기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사실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 국산화는 대량 구매를 약속한 이란이라는 시장이 있었기에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어서 1989년에는 스커드-B보다 사거리가 연장된 사정 500㎞, 탄두중량 700㎏인 스커드-C형 미사일을 자체 개발, 월 4~8발 양산 체제에 들어간다. 일설에는 이란이 자국 내에서 수거한 ‘알 후사인’(스커드-C의 이라크 판)의 잔해를 북한에 제공하고 그것을 참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 국방부는 1987년 3월에 「북한이 원산 북방에서 스커드-B를 기초로 한 장거리 미사일의 비밀실험을 하고 있다」고 발표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북한제 스커드-C형의 존재가 처음으로 공표된 보도일 것이다.
북한은 미사일의 개발이 진전되고 보유하는 미사일 수가 충분해지자 북한 인민군에 미사일 부대를 창설하였다. 1986년 초에 미사일 부대를 창설하고 1988년에는 인민군 제 4군단에 최초의 스커드-B 미사일 연대를 편성했으며, 1991년 스커드-C형 36기를 제조한 단계에서 미사일 여단을 편성하였다.
생산체제가 정비되자 북한은 수출에도 힘을 기울기 시작하여 스커드-C형을 1991년부터 이란에, 그리고 시리아에는 약 60기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1991년 5월 이란은 북한으로부터 도입한 스커드-C형을 테헤란 남방 500km의 사거리에 발사 실험한 것으로 알려졌고, 1992년 8월에는 이스라엘 수상이 시리아가 이란으로부터 입수한 북한제 스커드-C형 미사일 발사실험을 했다고 공식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첫 후원자였던 이집트에도 그 개량기술이 넘어가 이집트 독자의 사거리 연장형 스커드 개발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은 북한의 스커드-C형이 국제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고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중동국가들로부터의 미사일 판매대금은 다시 한 번 종전의 성능을 끌어올린 후속형의 개발에 투입된다. 이들 중동국가들이 제공하는 돈과 그것을 통해 더욱 개량된 미사일 공급의 반복, 이것이 북한과 중동간의 미사일 커넥션의 기본구조였다. 이후 노동 시리즈나 대포동 시리즈 등의 신형 중․장거리 탄도탄의 개발에도 이들 국가와의 커넥션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 노동미사일의 구조 개념도. 엑체연료추진식이라는 것은 기존의 스커드와 다를게 없지만, 최종 돌입단계에서 탄두부가 분리되도록 되어 있다. | |
이란에 스커드-C가 공급된 91년과 같은 해 북한은 벌어들인 외화를 통해 더욱 개량된 스커드-D라는 신형탄도탄을 개발했다. 스커드-D는 단순히 탄두를 줄이고 연료탱크를 조금 연장하는 식으로 개량된 스커드-C 와 달리 전반적으로 그 크기를 늘리고 탄두가 최종돌입단계에서 로켓부스터와 분리되는 등의 기술적 진보를 이룩했다. 스커드-D는 최초 91년도의 시험발사는 실패한 것으로 보였으나 93년 5월 29일 함경북도 김책시 부근의 노동(蘆洞)발사대에서 동해 중앙부를 향한 시험발사 성공을 통해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발사 사실이 처음 보도된 것은 6월 11일로 일본의 고위당국자가 ‘자위대가 확인했다’고 흘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6월 14일에는 일본 방위청이 조사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이것이 바로 일명 노동-1호의 등장이었다. 추정사거리 1,300km에 달하는 이 미사일은 한반도만이 아닌 일본까지 사정에 넣었고, 그 결과 북한의 탄도탄 확산문제에 일본까지 개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미사일의 주요 고객인 이란이 이 미사일을 확보할 경우 이슬람권 공통의 숙적 이스라엘까지 사거리에 넣을 수 있는바, 북한의 미사일수출은 대상지역의 안보구도에도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북한은 냉전붕괴와 함께 시작된 중소국가로의 탄도탄 확산 붐을 사실상 촉발시켰다. 제3세계와의 외교를 위한 당근으로 단거리탄도탄을 제공하던 소련이 냉전붕괴와 함께 사라지고, 중국역시 개방과 함께 단거리 탄도탄 수출을 자제하면서 생긴 공백에 북한이 대신 공급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문제는 북한이 결코 정정이 안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분쟁당사국들에게까지 외화벌이 수단으로 치명적 전술 전략무기인 탄도탄을 공급했다는 것에 있다. 북한이 지금까지 공급한 탄도탄은 화성 5-6(스커드-B, C)호가 이란․리비아․이집트․예멘 등에 500발, 노동미사일은 이란․리비아․파키스탄에 50~100발이 넘게 수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노동미사일은 이란에는 샤하브3, 파키스탄에는 가우리라는 명칭으로 각각 배치되어 주변국가(이스라엘, 인도 등등)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그 결과 비슷한 시기 벌어진 걸프전쟁을 통해 단거리 전술탄도탄도 얼마든지 상대국에 대한 치명적 공갈 및 위협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미국은 냉전붕괴로 폐기된 SDI(전략방위구상: 전면 핵전쟁에서의 대륙간탄도탄 요격시스템, 속칭 스타워즈계획)계획을 일부 부활시키기에 이른다. 제 3세계에 확산된 중거리 탄도미사일 -쉽게말해 관리되지 않는 위협- 으로부터 동맹국과 파견된 미군을 지키기 위한 TMD(전역미사일 방어)계획과 미 본토에 대한 탄도탄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NMD(본토 미사일 방어)계획, 총칭 MD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단순히 방어용 무기체계 개발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닌, 저렇게 무차별적으로 유통되는 미사일 공급원 그 자체의 단속 및 차단에도 주의를 돌리게 된다. 대량살상병기 통제에 대해 미국이 촉각을 기울이게 된 것에는 역시 북한의 탄도탄 수출도 큰 이유였던것이다. (konas)
▲ 수출용 노동미사일의 각형식. 위로부터 이란의 샤하브-B, 샤하브-A, 파키스탄의 가우리 순이다. 샤하브-B는 탄두부분만 다를 뿐 기본적으로는 가우리나 샤하브-A, 노동미사일과 동일하다. | |
김영림 코나스 객원기자